취업을 준비 중인 여섯 살 아래의 여동생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몹시 답답해진 적이 있다.
'나는 그 나이 때 더 철저하게 준비했던 것 같은데...'
'아직 명확한 목표가 없다는 게 말이 되나...'
'준비를 제대로 하기는 하는 걸까?'
처음에는 그저 걱정으로 물꼬를 텄던 대화가 어느새 답답함을 앞세워 동생을 쏘아붙이고 있었다. 뭐가 문제였을까. 몇 년 더 인생을 살아온 선배로서 그리고 취업이라는 난관을 겪어본 경험자로서 걱정된 마음에 건넨 조언이었다고 생각했다. 동생에겐 그저 간섭에 지나지 않았고 서로의 이야기는 합의점을 찾지 못한 채 팽팽하게 맞섰다. 동생이 말했다.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할게!(참견 좀 하지마!)"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한다라는 말이 왜 그렇게 듣기 싫었던 걸까.
물고 늘어지는 대화 속에서 동생의 눈가에는 눈물이 맺혔고 더 이상의 논쟁을 그만하기로 했다. 그리고 지하철 역에 데려다주면서 사과를 했다. 오늘 일을 계기로 함부로 너의 삶을 제단 하려 들지 않겠다고. 유퀴즈라는 예능프로그램에 출연한 장기하 씨가 이런 말을 했다.
"상대방이 받아들이면 '조언'이고 안 받아들이면 '잔소리'다." "상대방을 내 마음대로 판단하고 참견하면 '오지랖'이고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면서 참견하면 '관심'이다."
나는 오지랖으로 가득 찬 잔소리를 했던 것이다. 내가 겪어온 인생의 순간들도 완벽하지 않았고 흠 많고 그러면서도 잔소리는 싫어서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으면서 똑같은 행동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라떼라는 말이 쉽게 입 밖으로 나오는 걸 보니 젊은 꼰대가 따로 없는 듯하다. 꼰대를 혐오하면서도 자연스레 꼰대가 되어가고 있다니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가.
어렸을 적부터 엄마에게 잔소리를 듣는 게 참 싫었다. 엄마의 잔소리는 분명히 팩트 폭격기였지만 팩트를 정통으로 맞는다고 해서 사람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그래서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리곤 했다. 예를 들면 이랬다. 고3 수능을 말아먹고 재수를 준비하던 시기에 나는 아침의 정기를 최대한 흡수하며 늦게 일어나곤 했는데 엄마는 그런 나의 모습이 정말 꼴 보기가 싫었던 거다. 수능도 거하게 말아먹은 녀석이 아침 8시, 9시에 일찍이 도서관에 가도 모자랄 판국에 10시, 11시까지 자고 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나는 올빼미형 인간이었고 아직 수능이 끝난 지 얼마 안 된 시점에서 무리하게 도서관에 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따지고 보면 엄마의 말도 일리가 있지만 늦게까지 자고 있는 모습 하나만으로 공부를 안 하고 빈둥거리는 사람으로 낙인찍히는 게 무척 억울했다. 나름대로 오후와 저녁에는 공부를 열심히 하면서 페이스 조절을 하는 중이었는데 말이다. 엄마의 말 이후로 내 생활패턴이 크게 달라지진 않았다. 원래 나라는 사람의 생활패턴이 있는 것이고 모두가 아침 일찍 일어나 벌레를 잡아먹는 새가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결과적으로 성적은 고3 때에 비해 많이 올랐고 부산에 있는 국립대로 진학을 할 수 있었다. 물론 이제와서는 그 당시 엄마의 걱정이 이해는 되지만 말이다.
정육면체를 어떤 각도에서 바라보아도 한 번에 볼 수 있는 면은 최대 3개라고 한다. 하물며 사람은 정육면체 보다도 더 복잡하고 다양한 면을 가지고 있는데 내 눈에 보이는 3개의 면으로 그 사람의 전체를 쉽사리 평가할 수 있을까.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는 축구에 관심이 없는 사람도 한 번쯤 들어본 세계 최고의 축구 선수다. 처음에는 이 선수의 겉모습과 화려한 플레이 때문에 '플레이보이'일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다. 뚜껑을 열어보니 누구보다 자기 관리에 철저한 프로 중에 프로였다. 누구보다 훈련장에 일찍 오고 누구보다 늦게 퇴근하는 노력파이다. 그는 15년이 넘는 선수생활 동안 큰 부상 한번 없이 아직까지도 절정의 기량을 과시하는 중이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는 속담도 있지만 소중한 사람을 대할 때는 더욱 조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 없고 한번 새겨진 상처는 꽤 오래가거나 혹은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후르츠바스켓'이라는 만화가 있다. 십이지신의 원령을 씌고 태어난 이들과 평범한 여고생 토오루와의 이야기인데, 쥐의 원령에 씐 유키는 자신의 상냥함이 위선이라고 생각한다. 토오루는 그런 유키를 보며 엄마와의 과거 대화를 떠올린다. 상냥함은 몸과 같아서 저마다 성장하는 거라 형태가 각기 다르다고, 그래서 후회하거나 위선이라고 생각하기 십상인데 토오루는 의심하기보다 믿어줄 수 있는 사람이 되라고. 그러면 분명 그 사람에게 힘이 될 거라고. 토오루는 유키에게 상냥함은 저마다 형태가 다른 거라고, 당신의 상냥함은 양초와 같아서 화악 켜지곤 하는데 그렇게 되면 자기는 기뻐서 활짝 웃고 싶어 진다고 말한다.
의심하는 건 쉽다. 아니, 의심하는 건 편하다. 내가 본 대로 필터링 없이 생각하면 그만이다. 그리고 그 생각을 아무 고민 없이 툭 내뱉으면 속 시원하다. 의심하는 건 철저히 나를 위한 이기적인 행동일 수 있다. 믿어주는 건 어렵다. 내 편견과 맞서 싸워야 하고 눈앞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믿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대방을 진심으로 응원해주고 격려해줄 수 있는 건 의심보다 믿음인 것 같다. 누구든 목적지까지 가는 도중에 길을 헤매기도 하고 잠시 쉬어가기도 한다. 그 험준한 길을 걷는 건 결국 내가 아니라 상대방이다. 헤매는 모습을 볼 때 왜 헤매냐고 다그치기보다 나 또한 헤매면서 갔다고, 누구든 그렇다고, 잘하고 있다고 건네는 믿음이야말로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서 풀어진 신발끈도 꽉 조일 수 있는 힘이 되지 않을까. 헤매어도 괜찮은 것이야 말로 청춘의 특권이기도 하다.
믿어주는 사람이 되고자 한다. 동생에게는 너의 그 부단한 고민의 흔적들을 깊게 생각해보지 못해 미안하다고 다시금 전달했다. 이제는 어깨를 무겁게 만드는 이야기보다는 일상의 소소한 이야기만 나누려고 한다. 때로는 도움이 될 만한 이야기가 있다 싶으면 조심스레 건넨다. '아'다르고 '어'다르다는 말을 새삼 실감하는 요즘이다. 편견과 강요를 떼어버리고 '잔소리'가 아닌 '조언'으로 전달될 수 있게끔 신경 쓰고 있다. 아직은 믿어주는 것에 겁이 나기도 하지만 조금 더 용기를 가져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