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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키츠네 Oct 15. 2023

우당탕탕 첫 전세 보금자리

4년 만에 월세에서 전세로

생애 첫 전세 계약을 맺었다.

보증금 9천에 관리비 14만 원. 약 1억 원 가까이 되는 거액과의 첫 대면이다. 주머니를 영혼까지 끌어 모아도 그만한 보증금이 당연히 수중에 없었다. 이율이 상대적으로 낮은 청년 전세대출 상품을 이용해 80퍼센트는 은행 돈을 빌려 보증금을 마련했다. 과정은 험난했다. 준비할 서류는 많았고 최종승인까지 시간은 보름 넘게 걸렸다. 내가 전세를 구할 때쯤에 1,000채가 넘는 빌라를 소유한 전세왕 사기 사건이 터진 때여서, 계약을 끝낼 때까지 신경이 곤두선 채 가시가 바짝 선 고슴도치가 될 수밖에 없었다. 최종 승인이 나고 잔금을 치르고서 입주까지 완료하고서야 뾰족했던 가시를 거둘 수 있었다.


힘든 여정을 알고서도 이번엔 전세를 꼭 구해야 했다. 사회생활에 첫 발을 딛고서 월세로 보증금 걱정 없이 잘 살아왔지만 관리비까지 50만 원 가까이 되는 주거비용이 늘 부담이었다. 매월 단돈 20만 원이라도 아낄 수 있다면 2년이 지났을 때 500만 원 20년이 지났을 땐 5,000만 원을 모으는 셈이다(그랜저 한 대 값이다). 이제는 짝이 있든 없든 결혼도 염두에 두어야 할 나이가 됐기에 하루라도 빨리 전세 매물을 구해서 한 푼 두 푼 더 모아야겠단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그렇게 지난 연말부터 급하게 전세 매물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위치는 여전히 내가 머물고 있는 대연동이어야 했다. 스물한 살 포항 구룡포 출신의 나는 부산 대연동에 위치한 대학에서 20대를 보냈다. 대연동 번화가를 경대(경성대)라고도 하는데 부경대와 경성대라는 두 대학교가 인접하게 자리한 덕에 상권이 발달했고, 서면이나 다른 번화가에 비해 부족한 게 없었기에 친구들끼리 약속장소도 늘 경대가 되곤 했다. 대연동은 나의 20대이자 제2의 고향이어서 결혼하기 전까지는 여기에 살고 싶었다. 직장과 집은 대중교통으로 40분이 걸려 직장 동료들은 그쪽에 우렁각시라도 숨겨놨냐고 우스갯소리를 건네기도 한다. 사실, 40분 거리는 어릴 적 구룡포에서 포항 시내의 학교로 버스를 타고 통학할 때 거리라서 익숙하다. 그때 내 별명이 유학생 '룡포'였으니, 우렁각시를 숨겨놨냐는 우스갯소리 정도는 애교다.


다행히 내가 원하는 조건에 맞는 오피스텔 전세 매물이 있었다. 계약까지 끝냈고 입주만 하면 끝이다. 공무원 월급에 허리띠라도 졸라매보고자 직접 이사를 하기로 했다. 대연동에서 대연동으로 이사를 하는 거고 짐을 옮길 자동차도 생긴 터라 이삿짐센터 없이 직접 할 만한 근거는 충분하다고 판단했다. 대학 동기 1명과 후배 1명에게 짐 싣는 것만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이들 흔쾌히 도와주겠노라 하니, 룰루랄라 휘파람을 부르며 미짐부터 싸기 시작했다. 겉에 보이는 물건들로 견적을 내니 수월하게 짐을 싸겠구나라고 착각했다, 그것이 빙산의 일부라는 걸 모른 채. 장롱 안에 있던 옷이, 책장 안에 있던 책이, 찻장 속에 있던 컵이 실체를 드러내니 물아래 잠긴 빙산의 본체처럼 그 방대함을 드러냈다. 1인 자취생이 사는 6평 남짓한 공간에서 어떻게 그런 거대한 빙산이 나타날 수 있는지 아직도 의문이다.


이사를 할수록 자신의 성향을 알게 되는 것 같다. 나는 잘 버리지를 못하는 성향이었다. 안 입는 옷들과 이상한 잡동사니들만 2박스 양이 나왔다. 이참에 1년 이상 안 입은 옷들하고 구석에 처박힌 잡동사니들을 죄다 버리기로 했다. 넷플릭스 시리즈물 중에 곤도 마리에의 '설레지 않으면 버려라'란 프로그램이 있는데, 곤도 마리에는 강아지를 안을 때 설렘을 느끼듯이 옷을 손에 쥐었을 때 그런 설렘을 느끼지 못하면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보내주라고 말한다. 색이 바랜 티셔츠, 쭈굴 해진 셔츠, 작아져버린 니트, 촌스러워진 외투를 한데 모아놓고 손에 쥐어 보았다.

'아, 이 모든 옷들에 콩닥 거리는 마음이 들지 않구나.'

무교론자이지만 옷에 대해서만큼은 매우 경건한 마음을 담아 성불해 달라고 기도를 올렸다. 옷도 환생이 된다면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길. 그렇게 한 두 박스 가까이 담기는 옷들도 버리고 나서야 짐을 조금이나마 줄일 수 있게 되었다. 케케묵은 마음의 체증도 내려가는 듯 했다.


이른 오후에 시작한 이사는 밤 9시가 되어서야 끝났다. 나뭇가지도 바들바들 떠는 한겨울이었지만 무거운 짐을 들고 왕복을 여러 번 하니 한여름처럼 몸에 땀이 나기 시작했다. 내 이마에 나는 땀은 괜찮았지만 친구들의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힐수록 미안함은 커져갈 수밖에. 매트리스나 테이블은 옮기는 데 품이 더 들었다. 특히 매트리스는 그 부피가 커서 자동차 트렁크에 실을 공간이 없었다. 뒷좌석을 앞으로 다 밀어도 180센티미터가 넘는 길이를 담기엔 역부족이었다. 10만 원 정도 하는 매트리스였지만 친구들이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니 되려 비용을 지불하고 대형 폐기물로 버리고 갈까란 생각도 들었다. 그러자 친구들은 자신들의 수고스러움보다 버리는 게 아깝다며 어떻게든 실을 방법이 없을지 고민해 주는 것이 아닌가. 집단 지성의 힘이란 이런 것일까. 매트리스를 U자처럼 구부리니 공간에 딱 맞게 실을 수 있었다. 부력의 원리를 발견한 아르키메데스처럼 우리끼리 "유레카!"를 외치며 흘린 땀은 잊고 있었다.


장장 8시간이 걸린 끝에 이사가 끝났다. 새 집에 짐을 옮기는 데만 8시간이 걸렸고 이 짐들을 풀려면 곱절의 시간이 더 필요하겠지. 지금 당장은 친구들에게 맛있는 소고기를 사주고 싶었고 꼭 사주어야만 했다. "꼬르륵꼬르륵" 노동에 연료가 필요하다며 알려오는 생체 경고음도 무시한 채 힘껏 도와준 그들이었기에 근처에 당장 갈 수 있는 소고기 집으로 그들을 데려갔다. 이렇게 고생시킬 줄 몰랐다고 사과를 거듭하며 마음껏 먹으라고 배 터지게 먹으라고 그래야 내가 괜찮아질 것 같다고 그들을 압박했다. 생색낼 줄 모르는 그들이기에 생색낼 수밖에 없게끔 압박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뭐 그까짓 거 괜찮다"며 소주랑 맥주를 시켜 잔에 따르고선 말없이 건배를 했다. 소고기는 오래 익히지 않고 금방 데쳐 먹기에 기다림 없이 바로 입 속으로 가져갈 수 있었다. 바로 먹을 수 있음에, 소고기의 빠른 회전율에 처음으로 감사하며 그들이 배가 불러지기를 기다렸다. 그들이 소고기를 한점 먹고 술을 한잔씩 비울수록 내 마음도 한결 편해지기 시작했다. 면죄부를 받는 느낌이랄까. 누군가는 이른 잠에 들 수도 있을 시간, 우리의 아주 늦은 저녁식사는 그렇게 소박하게 끝이 났다.


드디어 월세에서 탈출했다. 험난하다고 해서 엄두도 못 내고 있었다면 평생 월 50만 원을 남의 주머니에 갖다 바쳤겠지. 월 20만 원 절약하는 게 티끌일 순 있지만 티끌도 모으면 태산이 되는 법이다. 당분간은 옮겨놓은 박스를 푸느라 정신없을 테다. 다 쌓아놓고 보니 산이 되어 벽면 하나를 가득 가리는 이 커다란 태산. 친구들 덕분에 이 험난했던 태산을 넘을 수 있었다. 역시 세상은 혼자서만은 살아갈 수 없는 법 아닐까. 옛 향약 두레의 효능을 오늘 또 체감한다.


월세에서 전세까지 한 단계 올라서는데 4년 넘는 시간이 걸렸다. 남은 건 내 집인데 그 과정은 또 얼마나 험준할까. 그때 나를 도와줄 사람은 누가 있을까. 외로이 혼자서 이삿짐센터를 부르는 건 아니겠지. 날이 갈수록 어른의 요건을 쟁취해 가는 난이도가 올라가는 느낌이다. 그렇지만 다가오지 않은 미래의 불안에 휩싸이면 할 일도 못하는 법. 미래의 내가 잘 헤나갈 수 있도록 현재를 슬기롭게 살아가자고 다짐한다. 공간과 마음 모두 좀먹는 짐을 늘리지 않길. 그때도 내 사람이 내 옆에 있길. 어른이란 근육이 더 단단해져 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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