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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키츠네 Dec 06. 2021

겨울의 고유성

창밖 유리에 성에가 생겨나고 있었다. 영하권 가까이 떨어진 기온 탓이었다. 햇빛에 움츠려 들었던 추위가 제 세상이다하고 뛰쳐나온 모양이다. 두꺼운 패딩을 걸치고 집 밖으로 나섰다. 사람들은 두 손을 주머니 속에 푸욱 넣은 채 빠르게 지나가고 있었다. 문득 제일 빨개지는 귀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손으로 귀를 감싸주었지만 이미 차가워진 손은 귀를 녹여주진 못했다. 태양은 저 위에서 세상을 향해 빛을 뿜어내고 있지만 추위를 녹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 추위가 겨울의 고유성이라고 단념한 채 발걸음을 재촉할 수밖에.


내키는 대로 걷다가 작은 카페 앞에 멈춰 섰다. 테이크아웃 전문점인 듯했으나 카페 안 구석자리에 몇 안 되는 실내석이 눈에 띄었다. 그 공간에서는 어제 나눈 이야기들을 차분히 떠올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따로 자리를 먼저 잡을 필요도 없이 뜨거운 커피 한 잔을 주문했다. '배달의 민족~ 주문'이라는 알림음이 수시로 들려왔다. 이 추위가 무서운 배달비마저 삼키는 무지막지한 녀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메리카노는 추출된 에스프레소에 물만 섞을 뿐이어서 뚝딱 완성되어 나온다. 이 단순한 커피를 사람들은 무슨 맛으로 먹는 걸까.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시원한 맛으로, 핫 아메리카노는 따뜻한 맛으로 먹는다는 단순한 내 미각 회로가 마음에 들었다. 산미가 어쩌고 저쩌고까지 구분하지 못해서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까다롭지 않게 어디서든 어떤 것이든 그 나름의 고유성을 찾아 맛있게 먹을 수 있으니까. 차가운 두 손으로 커피잔을 움켜쥐었다. 그 온기를 빼앗아가야지. 그리고 어제의 시간들을 되감았다.


연말이 되면 많은 모임 약속이 생긴다. 동창회부터 직장동료 그리고 가족까지. 어제는 독서모임에서 인연을 맺은 친구들과 홈파티를 즐겼다. 연어초밥과 치킨 가라아케와 쥐포 그리고 보드카 앱솔루트에 토닉 워터를 준비했다. 약속시간에 딱 맞춰 K와 J가 나란히 초인종을 눌렀다.

"집 분위기 정말 좋다. 잘 지냈어요?"

K가 들어서자마자 환한 미소로 기분 좋은 인사를 건넸다.

"응 잘 지냈어. 나도 아까 와가지고 준비를 방금 부랴부랴 끝냈네. 어서 앉아."

K와 J는 집에 감성이 가득하다며 6평짜리 공간을 한 바퀴 쓰윽 둘러보면서 자리에 앉았다.

곧이어 동갑내기 H가 도착했다.

"안녕. 집 분위기 너무 예쁘다. 너 MBTI가 뭐였지?"

"나 ENFP 그.... 재기 발랄한 활동가였나."

"어쩐지 딱 소품 감성들이 인프피 스타일이야 아주."

조명부터 벽에 붙여놓은 영화 포스터와 빔프로젝터로 틀어놓은 러브레터 등 연말 분위기를 맘껏 뿜어내 보려던 시도가 먹힌 것 같아 좋으면서도 쑥스러워서 표현은 못한 채 막 도착한 배달음식들을 테이블 위에 세팅했다.


서로의 근황 얘기로 대화의 운을 띄었다. 늘 똑같지. 아, 경주에 다녀왔어. 이직하고 나서 너무 좋아. 최근에는 이런 걸 하기 시작했어. 네 명의 근황은 각기 달랐다. 최근에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꿈을 좇아 프리랜서로 전향한 K는 요새 하루에도 몇 번씩 행복하다는 말을 한다고 했다. 사람의 입에서 '행복하다'라는 말이 나온 것은 무척 오랜만이어서 그 단어가 낯설게 느껴졌다. 나는 행복의 맛을 느껴본지가 오래된 것만 같았다. 진짜 행복을 알고 있기는 한 걸까. 괜히 센치해지고야마는 연말 후유증이군. 대화는 점차 커져갔다. 보고 싶었던 만큼 아껴왔던 만큼 우리는 대화의 부피를 늘려갔다.


보드카의 도수는 높다. 토닉워터로 희석해 먹는다고는 하지만 40도 본연의 도수는 증발하지 않고 체내를 잠식해갔다. K와 H의 양볼이 불그스름하게 홍조를 띄었다. 취할수록 우리들은 시간에 깊게 몰입해가고 있었다. 이 순간이 아주 더디게 흘러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오랜만에 했다. 지나가는 시간을 붙잡고 싶은 이유는 그 시간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지금 시간을 사랑하는 유일한 이유는 이 사람들. 추위로 시간마저 꽁꽁 얼었으면 좋겠다는 유치한 생각을 하며 대화를 이어 나갔다. 빔프로젝터 속 러브레터에서 히로코는 어느덧 설산에서 오겡끼데스까를 외치고 있었다.


사랑이 참 어려운 것 같아. 사랑은 우리 모임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주제다. 사랑 얘기는 죽을 때까지 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우리 모두 사랑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어서. 얼음 가득한 유리잔을 쥔 채 긴 호흡으로 H가 말했다.

"사랑하는 방식이 맞는 사람끼리 만나는 게 좋은 것 같아."

"처음에는 상대방만 보여서 상대방에게 모든 걸 맞추지만 결국엔 내가 보이게 돼."

"너는 전화를 자주 하고 싶은데 나는 전화보다는 문자를 하고 싶어 해."

"너의 방식과 나의 방식이 다르다면 그 사이에는 결국 균열이 생겨나기 마련이야."

"취향은 서로 맞춰갈 수 있어. 하지만 사랑하는 방식은 맞춰가기 어려워."

"그건 그 사람의 고유성이라고 생각해."

빔프로젝터에는 '이프온리'가 재생되고 있었다. 이안은 사만다에게 말하고 있었다.

진정 사랑했다면 그것만으로도 인생을 산거라고 생각해.
5분을 더 살든 50년을 더 살든..
오늘 네가 아니었다면 난 영영 사랑을 몰랐을 거야.
사랑하는 법을 알려줘서 고마워.
또 사랑받는 법도.

묘하게 H의 말과 이프온리에서의 대사가 겹치고 있었다. 지나간 사랑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사랑에 방정식이 있다면 너와 나의 기울기는 얼마나 달랐던 걸까. 결국 나는 너를 얼마나 외롭게 만들었던 걸까. 침전되어있던 기억의 부유물들이 부낭처럼 떠올랐다. 오겡끼데스까. 와타시와 겡끼데쓰. 문득 그렇게 전하고 싶어서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멈추고만 싶었던 지금이라는 순간이 빠르게 지나가고 있었다. 상대성 이론은 왜 시간에도 적용되는 걸까. 행복한 시간은 왜 더 빠르게 흘러가는 걸까. 너희를 보내고 나면 우리는 언제 또 만나게 되는 걸까. 당장에 내일이라도 보고 싶다면 네가 있는 곳으로 달려가도 되는 걸까. K는 이안과 사만다를 보면서 눈시울을 붉혔다. H는 도수가 센 술을 마셔서인지 머리가 아프다며 소파베드를 펼치고 누웠다. J는 아직 끄떡없다며 나의 속도에 맞춰 같이 술잔을 기울였다. 행복을 얼려서 모양을 확인할 수 있다면 지금 내 기분의 모양과 비슷하지 않을까란 생각이 들었다.


하루가 지나갔다. 어제의 시간은 사진이라는 추억의 형태로 남아 사진첩에 저장되어 있다. 아무도 오지 않는 테이크아웃 카페에서 홀로 따뜻한 커피를 마시고 있다. 겨울은 많은 사람들이 밀물처럼 들어왔다가 썰물처럼 빠져버리는 공허한 계절. 추억도 사랑도 꽁꽁 얼릴 수 있다면 좋겠다. 겨울은 그런 계절이니까 그것이 겨울의 고유성이니까. 따뜻했던 커피는 온기를 잃어버린 채 미지근해져 있었다. 영원한 건 없구나.

고유성.

그 말이 계속 머릿속에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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