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키츠네 Nov 22. 2022

환승이별

급작스럽게 헤어지게 되는 남녀, 하지만 급작스럽지만은 않은 헤어짐

남자는 모니터 앞 키보드를 타닥타닥 두드리고 있었다. 네이트판 톡톡 게시판에 하소연을 남기는 중이었다. 그곳은 온라인 공간의 대나무 숲이었다. 글의 제목은 ‘5년간 만난 여자친구에게 환승이별을 당했습니다.’였다. 남자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남자와 여자는 동갑내기로 대학생활 마지막 무렵에 취업스터디에서 만나 5년간 연인 관계를 이어왔다. 남자는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면서 몇 차례나 낙방했지만 일찍 취업한 여자가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버팀목이 되어준 덕에 포기하지 않았고, 마침내 시험에 합격했다. 


[부산광역시 공무원 임용]

2022년 제2회 부산광역시 공무원 임용시험에 최종 합격하셨습니다. 축하합니다.

-부산광역시 인사위원회-


남자는 문자를 본 순간 그 간의 고생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가며 코 끝이 찡해졌다. 길게 호흡을 하고선 핸드폰 단축번호 1번으로 전화를 걸었다.

“자기야, 나 합격 문자 받았어. 힘이 돼줘서 진짜 고마워. 앞으로 맛있는 것도 많이 먹고, 시외로 놀러도 많이 다니자. 사랑해.”

“정말? 축하해 그간 너무 고생 많았어. 사실 이번에도 안 되면 어쩌나 싶었다~ 자기 합격해서 정말 다행이야.”


발령을 받고, 첫 월급을 타고, 자기 노력으로 거머쥔 돈으로 남자는 여자에게 애플 워치를 선물했다. 아이폰을 쓰는 여자의 허전한 손목을 채워주고 싶단 생각을 줄곧 해왔는데, 받기만 했던 그가 드디어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손수 포장한 선물 박스를 내미게 된 것이다.


“갑자기 이게 무슨 선물이야. 자기 오늘 무슨 날이기라도 한 거야?”

오랜만에 받은 선물이라 그런지 여자는 낯설어하면서도 상기된 얼굴로 포장지를 뜯고 있었다.

“자기야, 언제 또 이런 걸 준비했대. 너무 이쁘다. 안 그래도 운동할 때 스마트워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은 했는데! 잘 쓰고 다닐게요. 고마워요.”

가시밭길은 지나쳐왔고 앞으로는 둘 사이에 장밋빛만 놓여 있을 거라고 남자는 생각했다. 그때에는.


남자는 커피숍에서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얼마 전까지 노랬던 가로수는 어느새 앙상한 모습으로 가지를 드러내고 있었다. 


‘몇 년만에 부산에서 영하권 기온이라 그랬던가. 지구가 망할 징조이긴 한가보다.’

남자는 아침에 무심코 틀어놓은 티비속 기상캐스터의 날씨 소식을 떠올렸다. 조금 늦을 것 같으니 먼저 들어가 있으란 여자의 말에 남자는 먼저 커피숍으로 들어가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 잔을 시키고선 여자를 기다렸다. 진동벨이 울릴 때 쯤 여자가 커피숍 문을 열고 들어왔다.


“많이 기다렸지? 내가 커피 가져올게.”

“아냐 별로 안기다렸어. 응 땡큐.”


적막에는 편안한 적막과 불편한 적막이 있다. 매순간 시시콜콜 떠들지 않고 가만히 있어도 되는 편안한 적막과 이 적막을 자꾸만 의심하게 되는 불편한 적막. 남자와 여자 사이엔 고요라는 허울만 남은 불편한 적막이 흐르고 있었다. 마치 둘이 시킨 차가운 커피와 따뜻한 커피의 온도차처럼 둘 사이의 간극은 벌어지고 있었다.


매일 보던 사이가 주에 3번으로 줄었고 이내 1번으로 줄었다. 경조사가 끼어 있는 날엔 주말에 보기도 어려웠고, 새벽 늦도록 시시콜콜한 이야기로 끝이 나지 않던 질긴 통화는 ‘how are you’ 형식으로 하루의 안부를 묻고 끝내는 형태로 그 수명이 줄어들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둘은 그 변화에 적응하고 있었다.


여자는 남자에게 헤어지자고 말했다. 남자는 분기점이 없는 헤어짐을 납득하지 못했다. 분명 여자가 귀찮아지는 순간이 생기긴 했지만, 얼굴을 보고 말을 나누지 않더라도 서로를 이어주는 안정감의 힘을 남자는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구차하지만 매달리며 말했다.


“자기야, 나 이제 취업도 했고, 우리 둘 사이에 당장의 설렘은 없어졌지만 그건 어떤 연애건 마찬가지잖아.”

“나는 자기랑 있으면 안정감을 느껴. 그 안정감이야말로 사랑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게 아닐까. 서운하거나 부족한 부분이 있다면 내가 더 노력할게. 그러니까...”


길어질 것 같은 남자의 말을 끊고 여자가 말했다.


“미안해, 근데 난 니가 남자로 느껴지지 않아. 좋은 기억으로 우리 사이를 마무리했으면 좋겠다. 응?”


5년간 남자를 채워주었던 여자의 존재가 썰물처럼 빠져나가자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된 그 황량함이 아려왔고, 더 이상 우리가 아니게 된 그 명명이 몹시 낯설어져 남자는 몇날 며칠을 술로 지새웠다. 헤어진지 일주일이 안됐을 무렵, 인스타그램 피드에 여자의 스토리가 올라왔다. 스토리 속 사진에는 음식과 함께 한 남자의 아이디가 태그되어 있었고, 새로운 사람이 생겼다는 걸 남자는 직감했다.

‘환승이별이네, 썅년’


남자는 알 수 없는 여자의 헤어짐을 호소할 대나무 숲이 필요했다. 그래서 네이트판에 글을 남기게 된 것이다. 남자의 핸드폰에 진동이 울렸다. 남자는 핸드폰을 쥐고 카톡을 확인했다. 보이스피싱을 조심하라는 은행의 카톡이었다. 2주 전에 머물러 있는 오픈채팅방은 묵묵부답이었다. 남자는 두 손으로 핸드폰 자판을 터치하며 메시지를 보냈다.


“저기 답이 없어서요. 혹시 오늘은 시간 안되시나요? 제가 술 한잔 살게요!”


남자는 또 다른 묵묵부답의 채팅방에 마찬가지로 메시지를 보냈다. 매우 능숙한 듯 보였다. 


“저기 답이 없어서요. 혹시 오늘은 시간 안되시나요? 제가 술 한잔 살게요!”


헤어진 여자와의 일주일 전 카톡은 점차 밀려나고 있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