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국이 잠잠해지면 언제 한 번 밥 먹자
“언제 밥이라도 한 번 먹자.”
‘언제 한번 밥’은 한국의 고유한 인사말입니다. 실제 밥 약속과는 상관없이 ‘나는 당신을 어느 정도 친근하게 생각하고 있으며, 관계를 유지하고 싶다’ 는 의사를 표현하는 멘트지요. 이 문구는 무척 편리해서, 사실은 만날 생각이 없는 사람에게도 적당히 웃으면서 말할 수 있습니다. “언제 한번 밥 한 끼 하시죠.”
언어학적으로 이렇게 고착화된 표현은 숙어이자 속담 같은 위치를 점유하고 있어서 어지간해서는 용법이 바뀌지 않습니다. 조선 시대 속담도 지금까지 전해 오는 마당에, 한 세대 안에서는 고정된 의미라고 봐야겠지요.
코로나 시대, 퍽 유구하게 이어져 오던 이 멘트는 그러나 새로운 변화를 맞았습니다. ‘시국이 잠잠해지면, 언제 밥이라도 한 번….’ 이라는 단서가 붙은 형태로 바뀌었지요.
‘언제 한 번 밥’ 의 묘미는 그 ‘언제’ 가 언제인지 모르기 때문에 적당히 미룰 수 있는 시기라는 점이 그 애매한 친목 용도에 꼭 맞았는데, 이 시대에 이르러 ‘우리가 만날 수 있는 언제’ 는 너무나 불투명한 의미가 되었습니다. 정말 만나고 싶은 친한 사람들끼리도 계속 ‘언제’ 가 미루어지는 마당에, 의례적으로 하는 인사에서 ‘언제’ 라고 하면 너무 성의가 없게 들려서일까요? 거기다 ‘시국이 잠잠해지면’ 은 왠지 상대방의 건강과 안녕을 염려하는 예의바른 수식어 같기도 하고, 요즘 세태를 반영하는 멘트이니 계절 인사 같기도 하고, 심지어 여전히 시국이 잠잠해지는 게 대체 언제인지 모르기 때문에 원래 ‘언제 한번 밥’ 의 애매모호한 용도에도 꼭 맞습니다. 그렇게 새로이 등장한 코로나 시대의 한국 인사말. 시국이 잠잠해지면 언제 밥 한 번 먹자.
밥은 왜 그렇게나 중요한 걸까요? 대부분 업무가 컴퓨터로 이루어지기에 마침 재택 근무 트렌드를 선도하기 좋은 IT 기업들에서는 비대면 온라인 회식까지도 하고 있습니다. 각자 회사 카드로 먹고 싶은 음식을 배달 주문한 다음에, 화상 회의 프로그램을 켜고 식사를 하면서 이야기를 나눕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 업무도 각자 집에서 하고, 모여서 밥 먹는다는 회식도 각자 집에서 먹을 수 있는데, 그럼에도 ‘시국이 잠잠해지면 밥 한 끼’ 는 (설령 실행되지는 않더라도) 실제로 얼굴 보고 만나서 식사를 하자는 의미를 내포합니다.
‘사회적 거리두기’ 가 더 이상 낯선 단어가 아니게 되면서, 그리고 이런 사회적 거리두기를 권장 실천하는 정책들로 인해 우리는 요즘 낯선 세계, 비대면 소통이 그 어느 때보다도 잦은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카카오톡 사용자 수는 3,700만 명에 이르고(국내 인구의 70%가 넘는 수치라고 합니다.), 각종 인터넷 커뮤니티에 가입하지 않은 사람도 드물며, 전통적인 방식으로 거슬러올라가자면 편지나 전화도 얼굴을 마주보지 않으니 비대면 소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중단되거나 대폭 축소된 학교 수업, 직장 생활, 장 보기라거나 모여서 밥 먹는 친구들과의 만남 등 우리의 일상은 대부분 다른 사람들과 얼굴을 맞댄 만남으로 가득했습니다.
전화, 이메일, 카카오톡으로 전달하지 못할 내용은 없습니다. 복잡한 업무도 만나지 않고 쓱쓱 처리하며 사진이나 참고 자료를 전송할 수 있으니까 어쩌면 그냥 말로 하는 것보다 더 체계적인 내용을 주고받을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얼굴을 보고 만나기를, 대면 소통을 바라는 이유는 의사 소통이란 내용을 전달하고 알아듣는 것만이 다가 아니기 때문이겠지요.
언어학에서 (글로 쓰인 문장이 아닌) 실제 대화 상황을 가정하고 연구하는 분야를 ‘화용론(Pragmatics)’ 이라고 하는데, 화용론에서는 말의 의미 층위를 ‘언어적 표현’ 과 ‘비언어적 표현’ 으로 분류합니다. 언어적 표현이 문장의 내용이라면 비언어적 표현은 몸짓, 태도, 눈빛 등입니다. 여기에 더해 화용론은 대화 맥락, 대화하는 사람들이 있는 공간, 대화의 환경과 목적 등도 포함해 말의 의미를 분석합니다.
“세상에, 오늘 날씨도 더운데!” 누가 아이스크림을 사 왔을 때 이렇게 말하면 ‘마침 잘 됐다, 어떻게 짐작하고 사 왔느냐’ 는 반가운 의미가 됩니다. 반면 오늘 만난 친구가 보기만 해도 더운 새까만 긴 팔 옷을 입고 왔을 때 이렇게 말한다면 ‘그런 걸 입고 덥지는 않은 건가?’ 싶은 놀라움을 표현하게 되지요. 맥락에 따라 말은 의미가 변화하고, 맥락이 없으면 할 수 없는 말도 있습니다.
“아, 정말 좋다.”
이 문장은 그리하여, 시국이 잠잠해지면 만나고 싶은 이 시대에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을 한 마디로 보여 주는 말입니다. 각자 집에서, 메신저로 혹은 통화로, 조금은 더 몸짓이나 눈빛을 알 수 있는 화상 통화더라도, 이렇게는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 정말 좋다.” 는, 바람이 선선하고 녹음이 우거진 어느 주말 낮, 보고 싶던 친구나 좋아하는 사람과 만나서, 10분 정도 길을 걷다가 시원한 음료수를 사 와서 나란히 의자에 앉고 흘러가는 구름이나 사람들이 지나가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문득 옆에 있는 사람에게 할 만한 말입니다. 혼자 하는 산책이라면 소리내서 말하지는 않을 테고, 누군가에게 거두절미하고 메신저로 보낼 수 있는 문장도 아니지요. 이 말은 오직 누군가 다른 사람과 현재의 시간을, 나의 감각을, 경험의 인상을 피부로 공유하고 있을 때만 성립합니다.
바로 그렇게 말하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평소에는 그저 사람이란 당연히 만나는 것이니 싶어 눈치채지 못하다가 우리는 비로소 느끼고 있습니다. 효율, 합리, 간편성을 넘어 우리가 기어코 만나서 밥을 먹고 싶어하는 이유입니다.
혹자는 판데믹과 IT기술이 결합해 코로나 이후 현대 사회는 원격 근무와 소통이 그야말로 본격화하리라고 전망합니다. 그러나 시류가 어떻게 흘러가든 우리는 지금의 경험으로, 사람들 사이에는 내용 이상의 소통이 필요하다고 기억했으면 합니다. 그래야만 기술 범람의 시대에 행복을 놓치지 않을 수 있고, 또 사람의 행복을 지원하는 기술도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