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오랜만에 잠깐 책을 읽었다. 책의 제목은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본가에서 가져온 몇 권 안 되는 책 중 한 권이었다. 침대에 기대어 30분 정도를 가만히 읽고 있는데 문득 글을 읽는다는 감각이 낯설었다. 마지막으로 책을 읽은 기억을 되짚어보니 벌써 몇 달 전의 일이었다. 과제를 위해 읽은 책들을 빼고 내가 좋아서 책을 읽은 시간이 없었다. 충격적이었다. 하루에 몇 시간을 핸드폰과 노트북을 쥐고 살면서 책 한 장을 넘겨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 너무 부끄러웠다. 책을 다시 책장에 꽂아놓다 함께 가져왔던 열댓 권의 책과 눈이 마주쳤다. 그 책들이 자기는 도대체 언제 꺼내 볼 거냐며 말을 걸어오는 듯 해 황급히 자리에 누웠다.
지금은 이렇게 독서를 게을리하고 있지만, 예전의 나는 꽤 책을 좋아하는 학생이었다. 초등학생 때는 '책 열매상'이라 불리던 다독상을 휩쓸었고, 매일 수업이 끝나자마자 도서관에 얼굴도장을 찍는 아이였다. 그때 무슨 책을 읽었는지는 대부분 잊어버렸지만 이상하리만큼 도서관을 좋아했다는 점은 기억이 난다. 이후 중학교 때는 더했다. 책상을 반으로 나눠 반은 소설책, 반은 교과서를 넣어놓고 시간이 날 때마다 책을 꺼내 읽었다. 당시 같이 추리 소설에 푹 빠져있던 친구가 있었는데 만날 때마다 각자 읽은 책을 공유하고 추천하곤 했다. 주말만 되면 주변에 있는 인근 도서관을 돌아다니며 신간 소설이 들어왔는지 확인했을 정도로 책에 빠져있던 시기였다.
그러다 중학교 3학년이 되고, 내 독서량은 수직 낙하했다. 원인은 입시였다. 나는 고등학교 학력고사의 마지막 세대였는데, 당시 우리 학교에서는 그 시험을 준비해야 한다는 명목으로 매달 모의고사를 쳤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게까지 했어야 하나 싶지만 그때의 나에겐 수능만큼의 위압감을 주는 시험이었다. 무튼 그런 시험을 앞두고 나는 더 이상 소설 속에 빠져있을 수 없었다. 적어도 그땐 그렇게 생각했다. 새벽 시간을 쪼개가면서까지 공부를 했던 그때의 내게 원하는 책을 읽는 것은 사치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고등학교에 왔다. 의외로 고등학교 초중반까지 나는 책을 많이 읽었다. 그 이유로는 학교에서 주관하는 독서토론이 즐거워서도 있었고, 당시의 내가 온갖 분야에 관심을 보였기 때문도 있다. 학교의 독서토론은 말만 토론이지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에 가까웠다. 선생님들이 각자 책을 선정하면 학생들이 책을 읽고 특정 시간에 모여 의견을 나누는 식이었다. 사회 문제에 관한 고전, 시사 흐름을 담은 책 등을 읽고 각자의 생각을 말하고 듣는 시간은 내 고등학교의 낙 중 하나였다. 그러나 내가 본격적으로 입시를 시작한 순간, 그 행복은 서서히 무너졌다.
독서가 커리어가 되는 시기에 직면해서였다. 학교는 3년간 읽은 책을 생활기록부에 적고 자기소개서와 면접을 위해 정리해두라고 했다. 아직 전부 읽지 않았더라도 진로와 관련이 될 것 같으면 이름을 써두라는 조언이 암암리에 돌 만큼 독서는 입시에서 중요한 입지를 차지하는 존재였다. 지금 생각하면 숨이 막힐 정도의 공부량을 안겨주고 높은 독서 수준까지 요구한다는 게 참 어이가 없을 따름이지만 그때의 난 그 흐름에 순종했다. 불만을 가지면서도 '입시가 다 그렇지..'라는 생각을 하며 묵묵히 도서 목록을 적어나갔다. 이후 자소서를 쓰고 면접을 준비하며 자주 환멸이 났다. 그걸 온전히 독서의 탓으로 돌릴 순 없지만 아예 미워하지 않을 순 없었다. 그렇게 무언가를 탓하기라도 해야 살 수 있을 것 같던 시절이었고, 특히나 좋아했던 독서였기에 서러움은 더했다.
그리고 지금. 더 이상 독서가 내 일상에 존재하지 않는 지경까지 왔다. 쓰는 사람이 거의 읽지 않는다는 건 정말 어리석은 일이지만 그 사실마저 잊어버린 채 아둔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나 자신을 추궁하고 싶다. 다른 것은 의무라고 여기고 이를 악물어서라도 해내면서 자리에 앉아 책 한 권 읽는 건 왜 여유로 치부하는지. 언젠가 나를 구성하는 가장 큰 조각이자 나의 자부심이었던 수많은 책들을 왜 지금은 모두 잊어버렸는지. 내가 추구하던 삶을 망각하고 다시 성적이라는 눈앞의 문제에 얽매여 내가 챙겨야 할 것들을 나 몰라라 한 것은 아닌지. 지난 시간 동안 차근차근 물었어야 했던 질문들이 어제의 그 책 한 권을 촉매 삼아 봇물 터지듯 밀려왔다.
읽는 사람. 나는 원래 읽는 이였다. 쓰고, 그리기 이전에 내 시작은 읽기였다. 비록 현재의 힘듦으로 인해 자주 잊어버리긴 했지만 외면할 수 없는 사실이다. 내 정신적 풍요가 말라가는 요즘, 내가 잃어버린 것들의 시작은 읽기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먼 타지에 오면서도 포기할 수 없었던 18권의 책들을 천천히 올려다본다. 그들을 다시 나의 일상 위에 올려놓으리라 다짐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