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먹사남 Apr 26. 2022

빵 위에 화려함을 펼치면, 피자

별걸 다 올려 먹지만, 그 '갬성'이 빠지면 안 돼

딩동댕동, 벨이 울린다. 인터폰 너머로 보이는 낯선 얼굴. 그의 손에 들린 넓적한 배달용 가방. 간밤에 치킨을 사 온 아버지 마중하듯 현관문이 활짝 열리면, 어딘가 바쁘고 초조해 보이는 배달원이 뜨끈한 열기가 전해지는 네모 반듯 납작한 종이상자를 내민다. 함께 내미는 검은 봉투 안에는 상자와 달리 청량한 냉기가 가득하다. 길쭉한 병에 든 것은 보글보글 기포가 올라오는 콜라, 동그란 통 안에는 새콤달콤한 피클. 둘 다 이 상자 안에 든 소중한 음식의 필수적인 동반자다. 소스 몇 가지가 함께 있지만 당장은 중요치 않다. 테이블 세팅이고 뭐고 빨리 한입 깨물어야 한다. 이 음식만큼은 밥 먹으라고 할 때마다 밥상에 밥이 없는데 뭘 먹으라는 거냐며 꿍얼거리던 동생 놈도 군소리가 없다. 테이블에 빠르고 신속하게, 하지만 흔들림 없이 상자를 내려놓으며 외친다.


"피자 먹자!"



특별한 생일상(이었던 것)


나름 촌동네에 30여 년을 살고 있다 보니 남들보다 뒤늦게 접한 음식이 많다. 그중 하나가 바로 피자. 돈가스는 가끔 부모님이 기분 내는 날 먹는 특별한 음식이기나 했지, 피자는 초등학교 고학년 즈음에야 그 존재를 알게 됐다. 친구의 말을 듣자니 피자빵과 비슷하게 생겼으나 훨씬 비싸고 전혀 다른 맛을 내는 무언가라고. 무엇보다 내가 그토록 좋아하는 햄이 잔뜩 들어가 있다지 않은가.


궁금하고 먹어보고 싶은 마음에 아주 조심스럽게, 곧 다가올 생일에 피자를 먹어보고 싶다 말하니 그대로 피자가 내 생일상으로 정해졌다. 그때까지만 해도 집에 있는 라면 한 봉 먹는 것에도 허락을 받고 먹는 착하고 여린(?) 아이였기에, 어머니의 흔쾌한 허락은 작지 않은 기쁨과 기대감으로 며칠간 잠을 설치게 했었다.


마침 읍내(지금은 시내가 되었지만)에 새로 생긴 가게에서 피자와 스파게티를 하는 가게가 하나 생겼다고 했다. 친구 몇을 초대해서 함께 파티를 할 수도 있었지만, 되도록 내가 많이 먹고 싶은 마음에(이런 돼지 새끼!), 돈이 많이 드니까 가족끼리 먹어요 하고 말했다. 욕심이야 아무렴 어떤가. 어린이에게 생일이란 온전히 나를 위한 날인 것을.


그렇게 가족이 둘러앉은 식탁. 좀처럼 나오지 않는 피자를 기다리며 초조한 마음으로 콜라만 쭉쭉 빨아먹곤 얼음만 남아서 타박을 듣다가, 먼저 나온 스파게티를 놓고 어머니께 포크로 면을 먹는 방법을 배운다. 포크로 면 몇 가닥을 들어 왼손에 든 숟가락에 대고 몇 번 돌돌돌, 입에 묻히지 않도록 애쓰며 먹기를 몇 분인가. 큼지막한 나무판에 둥그렇고 김이 펄펄 나는 빵이 나왔다. 위에는 하얗고 노랗고 빨간 것이 골고루 올라가 있고, 짱구와 내가 싫어하는 피망과 뭔지 모를 시커멓고 구멍 난 것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그리고 나이프와 포크가 식탁에 놓였다. 생전 처음 피자를 앞에 둔 어린아이는 직감적으로 편식할 자리가 아님을 깨닫고, 어머니를 따라 포크와 나이프를 들어 우아한 칼질을 흉내 내 본다.


물컹하고, 말랑하다. 찐득하고, 쫀득했다. 쭉쭉 허옇게 늘어지는 그것은 가끔 냉장고에 있던 치즈라고 했다. 이것이 정말로 그 투명한 비닐에 감싸여 있던 그 쿰쿰한 것이라고? 주저주저했지만 이것은 내가 선택한 생일상이다. 악으로 깡으로 먹어야 했다. 고민은 길었지만 시간은 찰나. 서투른 칼질에 이것저것 뒤섞여버린 그것을 입에 넣고 씹는다. 치즈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던 양파와 케첩과는 다른 토마토 맛이 팍 하고 입 안에 퍼졌다. 따뜻한 치즈는 몽글몽글 쫀득쫀득하고, 빵은 부드러우면서도 질겅거렸다. 생전 처음 먹어보는 맛에 잠시 취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거면 야채도 먹을 수 있겠다고.



피자는 왜 하필 여덟 조각이었을까


특별했던 생일상 이후로 피자를 접할 기회가 많아졌다. 피자를 전문으로 하는 식당이 두엇 더 생겼고, 나중에는 전화 한 통으로 배달까지 오기 시작했다. 당시 '배달=중국집'이었던 동네라, 나름 신문물이 읍내에 퍼지고 있다 여겼다. 달면 달고 짜면 짠 것이 음식의 전부인 줄 알던 꼬맹이에게, 복합적인 맛과 식감과 향을 뒤섞어 먹는 피자라는 것은 무슨 맛이라고 설명하긴 어렵지만 진짜 맛있는 음식으로 자리 잡았다. 


한 가지 불만이 있다면 피자는 크든 작든 늘 여덟 조각이라는 점이었다. 네 가족이 모여서 피자를 먹게 되면 딱 좋은 나눔이 되었겠으나, 우리 집은 그것이 안 되었다. 어머니께서 당신은 피자를 별로 안 좋아한다며 한 조각만 드셨기 때문이다. 다른 셋이 두 조각씩 먹었으니 당연히 한 조각이 남았고, 나와 동생은 그 둘을 누가 먹느냐고 다투는 대신 그대로 남겨두는 쪽을 선택했다. 가위로 반 갈라 먹으면 되었을 텐데, 동생은 마지막에 남은 음식에는 손을 안 대는 버릇이 있었다. 그래서 식사 말미엔 늘 마지막 계란말이 한쪽, 비엔나소시지 한 개, 부침개 한 조각 같은 것이 남아 있었다. 


이 버릇의 가장 고약한 점은 이 음식이 최초에는 인당 몇 개씩 먹으라고 어머니가 개수를 맞춰둔 것이라는 데에 있었다. 그렇게 음식을 남기면서도 '이거 형 먹어' 같은 소리는 절대 하질 않았고, 그대로 내버려 두면 언제고 자기가 남긴 몫을 먹어치웠다. 그러니 아무리 식탐 많은 꼬맹이라도 남은 피자는 내가 먹겠다는 말까진 할 수가 없었다. 동생에게 그러기엔 미안하면서도 자존심이 상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냉장고 구석에 차게 식어있는 피자 한 조각. 전자레인지에 30초만 데우면 도로 말랑말랑해질 그것을 보며 침을 꼴깍꼴깍 삼키다가, 피자 끄트머리를 살짝 뜯어먹었다. 단단하게 굳은 치즈 부분이 조금 많이 딸려와서, 피자의 뾰족한 끝부분에는 토마토소스만이 남아 있었다. 굳어버린 치즈와 빵은 별로 맛있지도 않았다. 괜히 그랬다고 후회하면서, 약간의 불안감과 함께 냉장고 문을 도로 닫았다.


그리고 대판 싸움이 났다.


밖에서 놀다 돌아온 동생은 어머니 삐삐에 집으로 전화하라는 메시지를 보냈고, 내가 보는 눈앞에서 형이 더럽고 치사한 짓을 했다는 듯 피자 끄트머리 실종의 전말을 일러바쳤다. 정확하게 기억하진 못하지만 그 당시 동생의 단어 선택은 몹시 잘못된 것이 많았고, 미안함으로 시작된 나의 죄책감은 어느새 분노로 바뀌었다. 그날 두 형제는 주먹과 발로 치고받았다. 체격도 힘도 내가 더 셌으니 당연히 동생을 압도했지만, 서로 치고받은 싸움에서 더 많이 때린 죄로 어머니에게 빗자루로 십 수대를 더 맞아야 했다(동생은 꾸지람만 들었다). 그 뒤로 몇 달간 집에서 피자를 먹자고 조를 수도 없었다. 상처뿐인 승리였다.


지금도 가끔 생각한다. 그때 피자가 일곱 조각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돌과 밀가루와 불의 향기 - 화덕 피자


성인이 될 즈음부터 피자 오두막 따위의 체인점의 유행이 시들해지는 느낌이었다. 두꺼운 빵은 맛이 없다는 얘기가 슬슬 들리고(난 좋았는데), 얇은 피자가 진짜라는 식의 광고도 제법 보였다. 매번 배달시켜먹던 '슈퍼슈프림' 따위의 피자 대신 별의별 토핑이 올라간 피자들이 나타났다. 나는 고구마 무스의 맛을 알아 버렸고, 동생은 맨날 해물이 올라간 피자에 군침을 흘렸다. 어느 피자든 빵 쪼가리가 얇아지고 토핑은 풍성해졌으며, 가격이 비싸졌으며 한 조각 뜯어내면 모든 내용물이 밑으로 줄줄 흘러내렸다. 피자의 트렌드가 변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알게 된 화덕피자란 것은 내겐 괴이쩍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대학가에 유행한다고 소개된 것을 보았는데, 생김새부터가 '불호'였다. 얇은 피자 도우가 어째선지 여기저기 마구 부풀어 있고, 변두리에는 탄 자국이 잔뜩. 토핑도 토마토소스 위에 루꼴란지 니콜라인지 하는 풀 쪼가리만 잔뜩이었다.


실제로 화덕피자를 눈앞에 뒀을 때에는 실망이 더했다. 크기도 배달로 오는 피자보다 작고, TV로 본 것보다 더 얇은 피자였다. 나 혼자 먹어도 양에 안 찰 것 같은데 사람은 셋이었다. 여느 피자집이 그렇듯 포크와 나이프를 주었는데, 포크로 찍힐 것 같지도 않았다. 귀찮은 마음에 접시에 잠시 덜어놓은 것을 세로로 반 접어 대충 입에 구겨 넣었다.


단언컨대, 새롭다는 점에서 미각으로 겪은 경험 중 한 손에 꼽을만했다.


제일 먼저 느낀 것은, 어릴 적 아버지 따라 낚시를 갔을 때 강가에서 주워 입에 물었던 자갈의 맛이었다. 햇빛에 달궈진, 미지근하고 매끈한 돌멩이의 냄새가 났다.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먹었던 오징어에서 이런 냄새가 난 적이 있었던 것도 같았다. 도우는 얇은데도 불구하고 탄력이 있었다. 짜거나 달거나 고소한 것 하나 없이 그저 바탕에 깔리는 밍밍한 맛이었으나, 어금니 위로 옮겨 힘껏 씹는 순간 토마토 주스가 팍 터져 나와 혓바닥 위를 싹 코팅하더니, 끄트머리에 아작아작 씹히는 것이 있었다. 루꼴라, 그저 풀 쪼가리라고 생각했는데 미묘한 식감과 쌉싸래한 향기가 있었다. 냉장고에서 툭하면 쉬어버리는 시금치와는 또 다른 맛이었다. 거기에 처음부터 끝까지 감도는 탄 냄새, 아니 불의 향기가 있었다. 피자 바닥면을 슬쩍 보니 군데군데 작은 점처럼 탄 자국이 있었다. 부풀고 깨져 구멍이 난 것 같은데 용케 밑으로 새는 것이 없다 싶을 정도인데, 여기서 어떤 조미료도 내지 못하는 맛이 나고 있었다. 그제야 탄 음식이 맛있다던 동생의 말이 이해가 됐다. 미친 거 아닌가 생각했었는데, 마음속으로 사과했다. 굳이 말로 해 주고 싶진 않았다.



이런 것도 피자구나


다른 음식에서 으레 그리하였듯이, 한동안 화덕피자에 심취하는 기간이 있었다. 루꼴라, 바질, 시금치 따위가 올라간 것도 좋았지만, 맥주 맛을 알고 나니 생으로 치즈만 때려 박은 치즈 피자나 페퍼로니 피자는 볼 때마다 사랑스러울 지경이었다. 떠먹는 피자는 잠시의 유행이었는지 명맥이 남은 곳이 별로 없지만, 녹진한 치즈가 떠오를 때면 가끔 찾아다니는 메뉴이고, 20인치가 넘어가는 변태같이 큰 피자는 보자마자 쌍욕을 때려 박았지만 먹는 과정에 주르르 떨어지는 것이 많아서 두 번 쌍욕을 던졌지만 맛은 꽤 훌륭했다. 미국식 피자가 유행할 적에는 먹을 때마다 짜다며 맘에 안 들어했지만 야근할 때마다 먹는 돼지 한 마리내가 있었다.



음식의 종류가 다양해질수록, 식도락가에게는 행복한 고민이 늘어나는 법이다. 수십 가지의 피자가 범람하는 요즘, 반반 피자의 등장은 내게 작은 구원이었다.


한 자리에서 비슷한 비용에 둘 혹은 넷이나 되는 피자를 한꺼번에 맛볼 수 있다는 건 상당히 즐거운 일이다. 여러 번 찾아와 먹을 필요가 없어지니 시간도 돈도 아낀다. 보통의 피자 한 판 가격보다 조금 비싼 것은 아무런 흠이 아니지. 특히 갓 구워진 피자 위에 계란을 터뜨려 토핑 하는 비스마르크 피자 같은, 찾아보기 드문 피자가 있는 곳이라면, 메뉴에 반반 피자가 없어도 반반 주문이 가능한지 물어봐야만 한다. 다른 한쪽은 무난하고 좋아하는 피자로 주문하면 설령 새로운 도전이 실패였더라도 어느 정도 만회가 가능하기까지 하니까. 물론 내가 피자를 남기는 일은 없지만.


201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부터는 화려함이 더해진 피자들이 눈길을 끌었다. 별 모양을 내서 스텔라 피자, 도우 가장자리를 주머니처럼 만들어서 포켓 피자, 과일 토핑을 더한 초콜릿 피자 따위가 그렇다. 겉모양만 예쁜가. 기존 피자에는 쓰지 않던 리코타 치즈로 크리미 한 식감을 더한 다음 새콤달콤 녹진한 발사믹 글레이즈를 뿌려 맛과 향을 가미한다거나, 토핑 자체를 샐러드처럼 만들어 알록달록하게 해 놓은 것들도 있다. 파릇한 시금치에 감칠맛 가득한 치즈를 녹이지 않고 가루로 듬뿍 올려놓고 큐브 모양으로 썬 토마토 따위로 색감을 내는 것들도 있다. 심지어 토마토소스조차 없다! 대 SNS 시대에 걸맞은 사진용 메뉴인가 싶어 조심스럽게 한 입 먹어 보면 놀랍게도 맛과 식감과 향의 균형이 훌륭하다. 오히려 좋을 정도다. 피자가 꼭 뜨끈뜨끈할 필요도 없고, 어쩌면 이름마저 '피자'일 필요가 없다는, 새로운 깨달음이다.



식재료도 조리법도 다양해져서 그런가, 기존의 발상을 뒤엎는 요리들이 많은 시대다. 퓨전요리의 형식으로 짧지 않은 과도기를 지내오면서, 새로이 완성된 맛이 우후죽순 나오고 있단 생각이다. 피자 또한 그렇다. 

디트로이트식 피자로 유명한 집의 대표 메뉴를 먹은 적이 있는데, 그 뒤로 소스 맛이 각별한 피자를 찾아 헤매게 됐다. 도우 위에 깔아놓은 소스가 모자라서 아예 토핑 위에 흥건할 정도로 다시 토마토소스를 얹어주는 메뉴였다(심지어 소스 추가가 가능하다).


처음 접한 디트로이트식 피자는 이전까지 경험해본 적 없는 바삭하고 네모난 '모서리'와 바닥에서 처음 놀라고, 두껍고 촉촉한 도우 안에 머금은 소스가 혀를 긴장시키고, 풍성한 토핑에서 오는 감칠맛이 상당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을 고르라면 단연 토마토소스일 거라고 생각했다. 대체 무엇을 얼마나 넣어 오랫동안 조리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혼연일체가 된, 하지만 체에 거르거나 하진 않아서 피자의 투박한 '멋'은 그대로 살린 그것을 피자 위에 '끼얹어' 먹어 보니 그 매력에 푹 빠질 수밖에 없더랬다. 페퍼로니의 짜고 고소한 기름기나 중간중간 개운하게 터지는 할라피뇨, 그리고 다시 소스를 촤악. 요리의 끝은 소스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단연코 맞는 말이지 않는가.


반면, 중국에 있을 적에는 중국식 피자랍시고 저 멀리 신장(新疆Xinjiang: 신강) 지역에서 화덕에 구워 먹는 피자 도우 닮은 밀가루 빵(보통 '낭'이라고 부른다)에 정체 모를 소스와 고기 부스러기를 대충 뿌려둔 것을 먹어보기도 했는데, 몇 달 안되어 가게가 사라지기도 했다. 중국식이라기엔 중국의 아이덴티티가 전혀 없는 것이었고, 맛 또한 피자와는 만리장성만큼이나 멀리 있는 것이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요즘 중국이 문화 침범하는 것을 보면 일찌감치 망해버려서 다행이지 싶을 정도의 먹거리였다. 모양만 닮았다고 해서 피자가 되는 것이 아니다. 한복이 한푸따위가 아닌 것처럼.


결국 피자라는 것은 구워낸 밀가루 반죽 위에 소스와 토핑을 얹어 먹는 것을 통칭하는 말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중국의 그것은 도통 왜 피자가 아니었을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건 '감성' 문제였다. 피자 맛이 나는 캡슐이 있다고 해서 그걸 피자라고 부를 순 없을 것이다. 반대로 둥그런 빵 모양에 소스와 토핑이 올라갔다고 해서 다 피자라고 부를 수 있는 것도 아닌 거다. 바삭하고 쫄깃한 도우에, 감칠맛 가득한 소스 듬뿍. 적당한 양에 치즈와 토핑, 그리고 내가 원하는 개인 커스텀(Custom)을 더한다. 오븐에서 12~15분 정도 맛있게 구워낸 다음, 커다란 칼로 슥슥, 여섯 또는 여덟 조각. 크기가 크면 열 조각이나 열 두 조각도 괜찮겠지. 적당히 온기가 남았을 때, 반으로 접든 두 장을 겹치든 돌돌 말아서 먹든, 취향껏 왕 베어 물고 어금니로 꾹 누를 때, 한낱 빵 쪼가리에 존재할리 없는 육즙과 채즙이 터져 나오며 입 안을 풍족하게 하는 그 맛까지.


눈으로 보자마자 기쁘고 즐거워지는, 눈으로만 봐도 자극적이고 화려한 맛의 감성이 있어야 피자다.


좋아, 오늘 밤은 피맥이나 하자.




작가의 이전글 둘 다 하면 어때서 - 탕짜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