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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nsylvia Sep 07. 2021

하노이시 대치동

 


“나 한국에 가고 싶어. 영어 싫어.”



영어는 못하지만 한 곳은 붙을 거라고 생각했던 국제학교의 인터뷰에서 몽땅 떨어지고 이미 잘 아는 한글을 배우는 한글학교도 거부했던 딸이 말했습니다. 핑크빛일 거라고 생각했던 해외 생활이 한 달도 안돼서 흙빛으로 변했습니다.



남편의 주재원 발령으로 휴직과 함께 가장 기대했던 건 바로 국제학교였습니다.

고등학교 때 같은 반에는 외국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친구들이 많았습니다. 완벽한 영어 발음으로 회화 선생님과 거리낌 없이 대화하는 것도 부러웠지만 그보다 더 샘났던 건 그들만의 여유였습니다. 코앞에 닥친 시험과 과제에 목맸던 그 당시 저에게 어린데도 삶을 즐길 줄 하는 그들의 마인드는 노력으로 가질 수 있는 게 아니었으니까요.   


교사가 되어 지도했던 학생들 중에서도 유독 해외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아이들이 많았습니다. 영미권부터 동남 아시아… 유럽까지. 대부분 외국에서 국제학교를 다녀서 영어를 모국어처럼 구사했습니다. 그들 역시 학창 시절 친구들처럼 유연한 사고와 여유로운 삶의 자세로 무장되어 있었습니다.


이젠 안정된 직장에 나이도 있어서 해외에서 학교를 다니는 것은 남들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남편의 갑작스러운 주재원 발령으로 그렇게 동경했던 국제학교를 제 딸들이 다닐 수 있게 된 겁니다. 유창한 영어 실력에 삶을 즐기는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에 준비기간 내내 흥분됐습니다. 게다가 큰 아이는 이중 언어자가 되기 딱 좋은 7살! 국제학교를 알아보면서 영어뿐만 아니라 베트남어까지 욕심났습니다. 한글도 스스로 터득하고 어린이집에서 하는 영어 방과 후 수업도 너무 좋아해서 집에서 영어 노래를 달고 살았는데... 이렇게 입학의 문턱조차 넘지 못할 거라고는 상상조차 못했습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정보가 너무 없었습니다. 

일단 초등학교 입학하기 전까지만 베트남에서 있다가 겨울에 한국 들어가기로 하고 당장 다닐 유치원부터 알아봤습니다. 어떤 유치원이 있는지도 잘 몰라서 남편이 가져온 ‘한인 소식’ 잡지에서 유치원 목록을 살펴봤습니다. 인터넷에 검색해보니 하노이에는 국제학교(유치원) 말고도 한국과 똑같은 일반 유치원과 한국식 영어 유치원들이 있었습니다. 여기까지 왔는데 한국과 똑같은 유치원을 보내기는 아까워서 우선 한국식 영어 유치원을 알아봤습니다.


하노이 한인타운에는 한국에서 유명한 영어 유치원 브랜드 두 곳의 하노이 지점이 있었습니다. 전화로 약속을 하고 두 기관을 모두 방문했습니다. 그런데 그중에 한 유치원의 원장이 상담 중에 물었습니다.

"아이가 영어를 읽을 수 있나요?"

"아… 니요."

"국제학교 인터뷰는 보실 거예요?"

"지난주에 세 군데 봤습니다."

"인터뷰를 … 봤다고요?"


원장은 어이없다는 듯이 저를 쳐다봤습니다. ‘어떻게 이 상태로 용감하게 인터뷰를 보셨어요? 그러니깐 당연히 떨어지죠’라고 말하는 듯했습니다. 순간 아이들을 위해 아무것도 안한 엄마가 된 것 같아 분노와 동시에 자잭감이 몰려왔습니다.

원장이 보여준 학원의 스케줄과 학습내용은 평범한 7살에게 과하게 느껴졌습니다. 15년 동안 학교에서 일하면서 과중한 사교육과 부모의 과한 욕심이 결국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지켜봤습니다. 그래서 제 아이에게는 7까지 한글도… 영어도… 어떤 사교육도 시키지 않았는데…

그게 큰 착각이었던가… 하는 생각에 마음이 복잡해졌습니다.


달리 선택권이 없었던 저는 다음날 다른 영어 유치원에 두 아이 모두 등록시켰습니다. 셔틀버스로 30분 이상 가야 했지만 아이들도 모두 한국 사람이고 외국인 담임 선생님 이외에 보조 한국인 선생님도 계신 곳이라 일단 안심이 됐습니다. 상담 날, 유치원 체육관에서 신나게 놀아서 거부감이 크지 않았던 터라 첫날은 비교적 잘 지나갔습니다.


 

둘째 날 아침. 어딘가 불편해 보이는 첫째가 셔틀 시간이 다가오자 점심에 데리러 오라고 떼를 썼습니다. 알겠다고 약속을 하고 점심에 유치원에 가서 아이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근데 그다음 날부터 유치원에 안 가겠다고 난리를 부리는 겁니다. 그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아이는 울며불며 통곡했습니다. 저도 같이 울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물러나면 아무것도 안 되겠다 싶었습니다. 마음을 단단히 먹고 아침에 수많은 사람들이 지나가는 롯데 앞에서 울며 매달리는 큰 아이들 들어 셔틀버스에 던져 넣었습니다. 언니가 우니깐 뭔지도 모르고 따라 우는 둘째도 억지로 버스에 태웠습니다. 엉엉 우는 아이들을 태운 버스가 오토바이로 가득한 큰 길가로 사라졌습니다. 7살인 큰 아이는 그날부터 6세 반으로 옮겼습니다.




집에서 바라본 하노이 시내

상의할 사람이 필요했던 저는 하노이에 꽤 오랫동안 산 사촌언니 지인에게 연락해 점심 약속을 잡았습니다. 롯데에 살고 있는 친한 동생까지 셋이서 한 레스토랑에서 만났습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이전엔 전혀 몰랐던 베트남에서의 한국인 자녀 교육의 현실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최근 베트남에는 여행객뿐만 아니라 엄청난 한국인들이 베트남과의 경제 협력으로 인한 특수를 누리기 위해 몰려오고 있었습니다. 베트남에서 외국인들이 가장 많이 사는 도시는 호찌민이지만, 몇 년 전부터 삼성과 엘지 공장에서 출퇴근 가능한 하노이에도 많은 한인들이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늘어나는 인구만큼 한식당도 많아지고 한국 물품을 구입하는 것도 점점 쉬워졌지만… 교육에 있어서는 오히려 악재로 작용한 겁니다.


베트남에 있는 국제학교는 나라마다 받아주는 인원이 정해져 있습니다. 때문에 최근 유독 많아진 한국 아이들만 서로 경쟁하며 입시 전쟁이 치르고 있었습니다. 한국 대기업들은 개인이 감당하기에는 부담스러운 국제학교의 학비를 일부 혹은 전액 지원해주기 때문에 주재원 자녀들이 국제학교에 더욱 몰리게 된 거죠. 국제학교를 다니면 좌절과 열등감으로 가득한 영어의 세계에서 내 아이만큼은 우위를 점할 수 있을꺼라는 부모의 기대감도 큰 역할을 했고요. 그 중에서도 대부분 주재원 자녀들의 나이가 밀집되어 있는 유치원부터 초등학교까지의 국제학교 입성이 중고등학교보다도 어려워진 겁니다. 한글도 아직 잘 모를 나이에 영어라는 외계어를 만나서 생애 처음으로 입시를 치르게 된 거죠. 입시는 아직 먼 이야기라고 생각했던 학부모들도 예상치 못했던 위기감에 불안감이 커지구요.

 

하지만 이런 불안감과 조바심은 좁은 문을 뚫고 입학을 한다고 끝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입학을 하고 영어로 의사소통이 조금씩 수월해지면 이젠 읽고 쓰는 영역이 걱정됩니다. 모국어로도 문해력이 낮은 아이들이 영어로 읽고 쓰지 못하는 건 너무나 당연한데... 뒤쳐지지는 않을까하는 부모들의 불안감은 가중됩니다. 이러한 부모의 불안감은 자연스럽게 사교육으로 연결됩니다.


그럼 읽고 쓸 줄 알면 이 불안이 없어지나요? 아닙니다.

학년이 높아지면서 수학, 과학, 역사… 학교의 모든 과목이 신경 쓰입니다. 드디어 수업에 뒤떨어지지 않는 수준이 되면 이번엔 유치원 수준의 국어 실력이 신경쓰입니다. 주재 기간이 끝나면 한국에 돌아가야 하기 때문에… 나중에 한국에서 뒤처지지 않기 위해... 또 다른 사교육이 시작됩니다.


이러한 부모들의 불안감을 기가 막히게 간파한 한국 스타일의 학원들… 그리고 개인 과외가 이미 하노이에 성행하고 있었습니다.

모든 학교에 불합격하고 걱정과 불안이 극대화된 저는 한국 아이들이 다니는 학원에 가서 상담을 받았습니다. 학원은 교육계에서 일하지 않았다면 혹할 만큼의 말발과 정보의 차이에서 오는 불안감을 돋우는 멘트로 저의 불안을 자극했습니다. 그럴듯한 학습 내용은 그렇다 치더라도 수강료에 깜짝 놀랐습니다. 여기는 베트남인데… 모든 물가가 한국보다 싼데... 학원이나 과외비는 놀랄만큼 비쌌습니다. 서울에서도 사교육의 메카인 강남 수준이었습니다.

그새 아름아름 알게 된 또래 한국 아이들은 실제 엄청나게 많은 사교육을 받고 있었습니다. 하교 후에 매일 영어는 기본, 수학, 국어, 심지어 수영, 발레, 축구, 골프까지… 스케줄이 꽉 차있었죠. 그제하원후 구 한번 사귀어 볼려고 간식을 싸들고 딸들과 38층 놀이방에서 앉아있어도 영유아 아가들밖에 없었는지...이제 알게됐습니다.


다른 학부모들처럼 걸음마 수준인 영어를 이제부터라도 사교육으로 부스팅 해줘야 하는 건지… 아니면 한국에서 했던 것처럼 사교육 없는 삶을 유지해야 하는지...

저는 선택의 갈림길에 서 있었습니다.




그날도 우는 아이들을 억지로 차에 태워 보내고 1층 카페에 앉았습니다.

커피를 마시며 문뜩 학교에서 만났던 제자들이 생각났습니다. 해외에서 오래 살다와서 영어 실력은 출중하지만 학교 영어 성적도 탁월하지 않으면서 노력도 별로 하지 않는… 심지어 영어로 뭔가를 하는 걸 두려워하는…   

 한국에서 영어유치원부터 사립초등학교… 그리고 각종 사교육 덕분에 괜찮은 성적을 거뒀지만 고 2 때부터 급격히 무너지기 시작했던...


그런 아이들을 지도하며 뼈저리게 느꼈는데… 오히려 자유로울 줄 알았던 외국에서 어린아이를 두고 불안감에 빠지다니… 정들었던 친구들과 헤어지고 익숙한 동네에서 벗어나 낯선 환경에 놓인 것만으로도 힘들 아이들이 갑자기 영어를 못한다는 이유로 열등감을 느껴야 한다니…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설령 국제학교 문턱조차 밟지 못하고 한국으로 돌아가더라도… 주변에서 국제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이 부럽더라도… 주변에 휘둘리지 말고 내 아이를 아이답게 지켜주기로 다짐했습니다.


하노이의 명동, 짱 띠엔 거리에 마련된 아이들을 위한 전동차

국제학교에 대한 아쉬움은 여전히 있지만... 사교육 할 시간에 그동안 일하느라 같이 많이 못 있어준 정서적 빈자리를 채워주기로 했습니다. 아이들이 유치원에 있는 동안은 제 시간을 충분히 즐기고 아이들이 집에 오면 최대한 즐겁게 놀았습니다. 주말에는 아빠와 박물관, 놀이동산, 맛집을 누비고 하노이 중심지에 전동차를 타러도 자주 갔습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나자 딸들은 점차 울지 않고 등원을 했습니다. 낯선 곳에서의 연이은 실패로 장착된 큰 아이의 경계심 가득한 눈은 점차 호기심 가득한 원래의 눈으로 바뀌어 갔습니다.




어느 날 머리를 자르러 미용실에 갔는데 큰 아이가 잡지 옆에 있는 '초등 영어 사전'을 펼치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I go… to s…cho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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