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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nsylvia Aug 30. 2021

하늘에서 국제학교 따기


“Hello~ What’s your name?”


아이의 얼굴이 굳어진 건 이때부터였습니다. 알 수 없는 말을 하며 다가오는 금발에 파란 눈의 선생님을 보고 뒷걸음치는 아이를 선생님 쪽으로 밀며 말했습니다.

“저기 저 선생님 따라가. 엄마는 여기 있을게.”



3월 중순. 낮에는 한여름처럼 더웠습니다.

아이 둘을 데리고 남편이 휴대폰에 깔아준 Grab 으로 택시를 불러 스플랜도라에 있는 미국계 국제학교에 왔습니다. 정문에 들어서자 초록 잔디가 펼쳐진 커다란 운동장이 보였습니다. 가장 가까운 건물로 들어가 안내해주는 분에게 인터뷰를 하러 왔다고 하니 로비에서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아이들은 왜 왔는지도 모른채 마냥 신나 있었습니다.


잠시 뒤, 백인 여자 선생님이 나와 친절하게 인사했습니다. 뭐하러 왔는지 정확히 모르는 큰 아이는 조금 겁을 먹긴 했지만 순순히 선생님을 따라갔고, 전 둘째와 건물 밖으로 나와 학교를 구경했습니다. 4살짜리 아이 눈에 제일 먼저 띈 건 알록달록한 놀이터였습니다. 오랜만에 보는 놀이터에 흥분한 아이는 정글짐에서 신나게 놀았습니다. 30분쯤 지나 인터뷰가 끝날 시간이 다 된 거 같아 아이의 손을 잡고 로비 쪽으로 향했습니다.

로비로 가는 길에 한국 사람들로 보이는 학부모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습니다. 궁금한 마음에 그들을 따라 2층 강당으로 올라갔습니다. 강당에서는 무슨 행사를 하고 있었고, 아이들과 구경 온 학부모들로 가득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제 시선 안에 들어온 사람들이 죄다 한국인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일본이나 다른 동양계와는 구분되는... 분명 한국사람들이었습니다.

아주 드물게 다른 인종들이 보였습니다.


바쁘게 로비로 돌아오니 저쪽에서 큰 아이가 선생님과 걸어오고 있었습니다. 선생님이 메일로 결과를 알려주겠다고 말하는 동안 큰 아이는 굳은 얼굴로 제 옷자락을 잡고 있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 선생님이 무슨 질문을 했는지 물어봤습니다.

“숫자랑… 몰라… 뭐라고 하는지 모르겠어." 저와 눈을 마주치지 않고 얼버무리는 아이에게 더 이상 자세히 물을 수가 없었습니다. 영어 인터뷰라 뭐라고 했는지 모르는 게 당연했으니까요.




바로 다음날 두 번째 학교의 인터뷰가 있었습니다.

아침을 먹자마자 택시를 타고 30분 정도 떨어진 국제학교로 향했습니다. 한국인 코디 선생님이 미리 다른 학교에는 없는 학부모 인터뷰가 있다고 알려줬습니다. 학교에 도착하자 우리와 비슷한 시간에 인터뷰 일정이 잡힌 몇몇 가족들이 보였습니다. 우리 빼고 다 아빠까지 함께였습니다. 잉... 이럴 줄 알았으면 남편이랑 같이 올 걸… 괜히 서러웠습니다.


이제 대충 뭐하러 온 건지 눈치챈 큰 아이는 계속 굳은 얼굴로 조용히 앉아있었고 아무 생각 없는 막내는 새로운 곳을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잠시 뒤, 아이의 이름이 호명되고 우리는 다 같이 인터뷰 장소로 들어갔습니다.

방으로 들어가자 바이킹의 후예처럼 생긴 덩치가 크고 금발이 허리까지 오는 선생님이 테이블에 앉아 있었습니다. 미소 한번 보이지 않고 아이 이름을 확인한 후, 저에게 질문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아이의 장점이 무엇인지, 좋아하는 과목은 무엇인지, 자녀 교육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무엇인지, 집에서 부모님과 어떻게 노는지 등을 속사포처럼 물어봤습니다. 질문을 쏟아놓고 제가 대답할 때는 책상만 쳐다보며 무언가를 적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아이가 읽을 수 있는지 물었습니다. 이미 한글을 뗀 터라 그렇다고 대답했습니다.


제 인터뷰가 끝나고 아이 인터뷰 차례가 됐습니다. 거의 울 것 같은 얼굴을 한 아이를 남겨두고 막내만 데리고 대기실로 나왔습니다.

인터뷰하고 있는 언니를 기다리며 마냥 신난 둘째

대기실 바로 옆에는 키즈카페 같은 유치부 교실이 있었습니다. 장난감과 블록이 가득한 로비에 홀려서 들어간 막내는 언니의 사정은 모른 채 키즈카페에 온 것처럼 신나게 놀았습니다. 유치부 교실밖에는 아이들 이름이 붙어 있는 개인 사물함과 활동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막 쉬는 시간이 시작되어 아이들이 교실 밖에 있는 전용 놀이터로 뛰어갔습니다. 전에 본 그 어떤 놀이터보다도 예쁘게 잘 꾸며져 있었습니다. 아이들은 놀이터에서 놀다가 자기 가방과 물통을 가져와 나란히 앉아 간식을 먹었습니다. 금발머리, 갈색머리, 까만 머리… 다양한 인종과 국적으로 보이는 아이들이 다 같이 어울려 놀고 있었습니다. 


'아… 우리 아이도 저 틈에 끼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영어를 거의 모르는데… 과연 인터뷰를 통과할 수 있을까… 만 6세면 모국어도 완성되지 않는 나이인데… 설마 영어 못한다고 떨어트리진 않겠지? 한국에서 미리 영어 학원이라도 다녔어야 했나…'


즐겁게 놀고 있는 막내를 바라보며 수만 가지 생각이 사로잡혔습니다. 생각보다 인터뷰 시간은 길어서 의사소통이 안 되는 7살 아이가 이렇게 긴 시간을 버틸 수 있을까 걱정됐습니다. 더 놀고 싶어 하는 막내를 데리고 대기실로 돌아왔습니다.


잠시 뒤, 아까 보았던 바이킹처럼 생긴 선생님이 저에게 다가오더니 인사말도 없이 다짜고짜 물었습니다.

“아까 아이가 읽을 수 있다고 하지 않았나요?”

“네… 읽을 수 있는데요.”

“하나도 모르던데… 영어를 읽을 수 있는 거 맞아요?”

“영어 말고요. 한국어로 읽고 쓸 수 있는데요.”

선생님은 화난 듯 안으로 들어가 버렸고 큰 아이는 한쪽에 우두커니 서있었습니다. 너무나 당황스러워서 아이에게 인터뷰에 대해 묻지도 못하고 그대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아이도 내내 말이 없었습니다.



다음날 세 번째 인터뷰가 있었습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인터뷰를 이렇게 쪼르륵 잡지 말았어야 했는데….' 돌이킬 수 없는 후회가 밀려왔습니다.


마지막 학교는 롯데센터 바로 뒤에 있는 국제학교였습니다.

시간이 되어 학교로 들어가 지정된 장소에서 선생님을 기다렸습니다. 저쪽에서 키가 크고 양복을 깔끔하게 입은 백인이 다정한 얼굴로 다가왔습니다. 선생님은 무릎을 꿇고 아이와 눈을 마주치더니 반갑게 인사했습니다. 하지만 아이는 지난 이틀 동안의 경험으로 인해 거부감이 극에 달한 상태였습니다. 다정하게 인사하는 선생님에게 인사는커녕 눈도 마주치지 않고 저만 쳐다봤습니다. 금방이라도 울듯한 얼굴로 선생님과 함께 인터뷰 장소로 갔고, 저는 막내랑 또 다시 인터뷰가 끝나기를 기다려야만 했습니다.






마지막 인터뷰가 끝나고 불안함이 엄습해왔습니다.

뭔가 크게 잘못됐다는 걸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알 수 있었습니다.

국제학교는 인터뷰를 보는데만 적게는 150달러, 많게는 400달러의 인터뷰 비가 듭니다. 그리고 한국에서 베트남에 있는 입학 담당자와 연락하기도 힘들고 연락이 된다 해도 지원 기회조차 주지 않는 학교들도 있어서 여기저기 지원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지원이 가능한 국제학교들과의 인터뷰만 잡았고요.

좀 걱정됐지만 중고등학생도 아니고 모국어도 잘 못하는 유치원생인데 영어를 그렇게 까지 잘할 필요가 있을까... 생각하며 스스로를 달랬습니다.



하지만... 결국 세 학교 모두 낙방.

정확히는 두 학교는 '낙방', 마지막 인터뷰 본 학교는 '대기'였습니다. 결론적으로 우리 아이를 받아준다는 학교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영어는 못했지만 그래도 세 개 중에 하나는 합격할 거라고 막연하게 믿었던 것이 저희의 아주 큰 착각이었던 겁니다.


참담한 결과와 더불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점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첫 번째 학교의 이메일을 자세히 살펴보니 수학 점수가 거의 0점. 영어를 몰라도 숫자를 보고 대충을 말할 수 있었을 텐데... 뭔가 이상했습니다.

네... 그렇습니다. 아이는 알고 있는 것도 아예 말을  안 한 겁니다.


큰 아이는 한국 어린이집에서 무척 행복했습니다. 한글도 스스로 터득해서 6살부터 쉬운 책은 혼자 읽었고 자기 생각도 조리 있게 잘 이야기했습니다. 처음 보는 친구와도 잘 놀고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아이였죠. 그런 아이가 인터뷰에서 말을 아예 안 했다는 건 저에겐 굉장히 충격적이었습니다. 그동안 몰랐었는데... 제 딸은 새로운 환경에 거부감이 심하고 완벽하게 알지 못하는 건 입밖에 내지 않는 성격이었던 겁니다.

내 아이에 대해 너무나 몰랐던 거죠.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나 눈앞이 깜깜했습니다. 어리면 한국 유치원이라도 보내며 시간을 벌어볼 텐데… 초등학교 입학을 미룰 수는 없으니까요.

이중 언어자가 되기에 가장 좋은 나이인 만 6세. 이때 국제학교를 다니면 영어도 빨리 늘고 외국 친구들도 자연스럽게 사귈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가 산산조각 나며 처음으로 베트남에 온 후회됐습니다. 남편도 학교를 들어갈 수 조차 없게 됐다는 소식을 듣고 적지 않게 놀랐습니다. 주변에 아는 주재원 자녀들은 다들 국제학교를 다니고 있어서 입학을 못한다는 건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으니깐요.






멘붕 속에서 토요일이 되었습니다.

한국에서 미리 접수한 ‘토요 한글학교’처음으로 가는 날이었습니다. 레지던스 로비에는 3~40명의 한국 아이들 있었습니다. 이렇게 많은 한국 아이들이 이 건물에 사는지 몰랐습니다. 평일에는 다들 학교에 가있어서 보이지 않았던 거죠.


첫날이라 다 같이 따라가기로 했습니다. 아이들과 소수의 학부모들을 태운 대형 관광버스가 토요 한글학교를 하는 ‘하노이 한국 국제학교’로 향했습니다. 20분 뒤쯤 버스는 허름한 학교 건물 앞에 도착했습니다. 지난주에 갔었던 국제학교들과 비교되게 낡고 오래된 건물이었습니다.

다 같이 유치부 '가'반 교실로 갔습니다. 큰 아이와 비슷해 보이는 아이들이 올망졸망 앉아 있었습니다. 오랜만에 또래 한국 아이들이 모여 있는 걸 보니 조금 안심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아이가 들어가지 않겠다며 교실 문 앞에서 소리를 질렀습니다.


한글학교 첫날.. 쉬는 시간에도 힘없이 앉아있는 큰 딸

“여기는 다 한국 사람들이야. 너 한글 알잖아. 되게 쉬운 거부터 배워.” 라며 달랬지만 아이는 계속 안 들어가겠다고 버텼습니다. 교실 안에 있는 선생님과 아이들이 모두 우리 가족을 쳐다봤습니다. 시작종이 울렸지만 아이는 여전히 들어가기 싫다고 울고 불고 난리를 쳤습니다.


"난 한글 싫어~ 안 들어갈 거야~!!!"

한 번도 이렇게 심하게 떼 부린 적이 없었고 한글을 너무나 좋아했는데… 이렇게 대책 없이 난동을 부리는 모습에 저희 부부는 너무나 당황했습니다. 버릇없는 아이의 모습에 민망해진 남편은 결국 아이에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빨리 상황을 수습해야 했던 저는 선생님에게 오늘만 아이와 같이 수업을 들어도 되겠냐고 물었습니다. 다행히 선생님이 허락해주셔서 전 아이와 교실 맨 뒷자리에 나란히 앉았습니다.


수업은 ‘가, 나, 다’를 배우는 것부터 시작했습니다. 20명 정도 되는 7살 아이들이 선생님 말에 대답하는 모습이 너무 귀여웠습니다. 그런데 옆에 앉아있는 제 딸은 두 손으로 귀를 막은 채 책상 위에 엎드려 있었습니다. 너무 민망하고 부끄러워 얼굴을 들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선생님이 “여러분 ‘다’로 시작하는 단어가 뭐가 있지요?"라고 물으셨습니다. 여러 가지 대답 속에서 한 남자아이가 "똥~!"이라고 하자 아이들은 까르륵 웃기 시작했습니다. 제 딸도 엎드려 있었지만 엉뚱한 남학생의 대답에 어깨를 들썩이며 몰래 웃었습니다. 그때부터 조금씩 고개를 들고 수업을 듣더니 그림 그리는 시간이 되자 색연필을 꺼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아이에게 화장실을 갔다 오겠다고 말하고 교실을 빠져나왔습니다.

교실을 나와 운동장에서 둘째와 놀고 있는 남편에게 갔습니다. 남편도 처음 보는 아이의 모습에 많이 놀랐다며 괜히 베트남에 온 건 아닌지 자신의 선택을 후회했습니다. 베트남에서 좀 더 좋은 교육을 받을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던 우리 부부의 마음은 어두워져 갔습니다.





한글학교가 끝나고 셔틀을 타고 롯데로 돌아왔습니다. 차에서 내릴 때 딸이 한 남자아이를 가르치며 한글학교에서 같은 반이라고 했습니다. 온 지 얼마 안 되고 아직 아무데도 안 다니고 있어 친구가 한 명도 없었는데… 같은 레지던스에서 또래를 발견한 겁니다. 반가운 마음에 마중 나온 아이의 엄마와 인사를 했습니다.  레지던스 놀이방에서 아이들이 노는 동안 엄마들끼리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제가 여기 상황을 너무 모르고 학교를 준비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저에겐 쌀국수, 전쟁, 박항서 감독 밖에는 떠오르지 않았던 베트남.

이미 몇 년 전부터 한국과 활발한 경제적 교류를 하고 있었고… 그로 인해 많은 한국인들이 주재원이나 개인 사업을 위해 베트남으로 몰려들고 있었습니다. 그 바람에 최근 몇 년 사이에 저희와 같은 주재원 자녀들의 수가 엄청 늘어났고 다양성을 유지하기 위해 국적별 비율로 학생을 받는 국제학교에서 한국 아이들만 경쟁이 치열해진 겁니다. 다른 나라 아이들에게는 그저 통과의례인 인터뷰가 한국 아이들에게만 유치부부터 입시 전쟁이 됐다는 거죠.

아... 비싼 학비를 내고 지원하겠다는데도 왜 그렇게 메일도 잘 안 읽고 왜 그리도 불친절했는지… 그제야 알 수 있었습니다.


국제학교뿐만 아니라 ‘한국 국제학교’조차 늘어나는 한국 아이들을 다 수용할 수 없었습니다. 초등 1학년은 40명에 가까운 과밀학급인데도 다른 국제학교보다 더 입학하기 어렵다는 것도 얼마 후에 알게 됐습니다.



“오빠… 우리… 한국에 돌아가야 할 것 같아.”


부푼 마음으로 베트남에 온 지 이제 겨우 보름.

벌써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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