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에서 농사를 가르쳐야 하는 이유
지난 6년간 지역의 학교에서 국어, 수학, 영어처럼 교과로서 텃밭시간을 기획, 운영해 왔습니다.
지역에서 살아가는 청년으로, 농사와 교육을 연결하는 일이 즐거운 농부로 그려온 일입니다.
학교에 농사지으러 간다라고 하면 으레 생태수업, 짧게 진행하는 특별활동처럼 생각하지만, 학교에서 꼭 배워야 하는 핵심 교과로서 농사를 가르쳐왔습니다.
농촌에서 학교를 다니고, 비인가 대안학교를 다니다 학교를 왜 가야 할지 모르겠어서 진학을 하지 않고 1년간 시간을 보내고, 다시 학교를 다니는 조금 다른 교육과정을 거치며 왜 학교를 가야 할까? 학교는 왜 있을까? 고민했었습니다.
반대로 받는 교육에서 주는 교육의 관점에 섰을 때 이 질문은 아주 집요하리만치 머리와 마음을 두드렸습니다.
우리는 왜 학교를 만들었을까?
왜 학교를 가야 할까?
학교가 아니더라도 '교육'이란건 왜 해야 하는 걸까.
그렇게 지금도 바닥을 더듬으며 찾고 있지만 지금의 답은 '자립'입니다.
교육의 본질은 스스로를 돌보며 살아갈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하기 위한 일, 스스로 설 수 있어야 다른 이와 함께 살아가는 것이 가능해지기 때문입니다.
'자립'
남에게 예속되거나 의지하지 아니하고 스스로 섬.
을 의미합니다.
다르게 말하면 '삶'의 지속은 스스로 먹고 씻고 지을 수 있을 때 가능합니다.
먹지 않고 살 수 있는 인간을 없습니다.
또한 스스로 선다는 것은 가치관의 일이기도 합니다.
가치관은 "나"를 만나는 일부터 시작합니다. 나는 무엇을 좋아하는 사람인지, 어떨 때 행복하고 힘든 사람인지 스스로를 만나는 일이 자립의 시작입니다.
그러나 안타까운 현실은 고등교육을 마치더라도 나의 생이 시작을 본적도 경험한 적도 없습니다.
그러니 제 밥 한 끼니 차려먹지 못하는 어른이 됩니다.
더 나아가서 사회에 일어나는 수많은 아픔들의 바탕에는 '나'를 몰라서, 혹은 나와 다름을 존중하지 못하는 문화에서 시작합니다. 더욱 넘쳐나는 정보과 사람들, 관계 안에서 다름을 인지하고 나를 지키는 일은 이미 남과 달랐을 때의 차별적 경험으로 나를 표현하는 일 드러내는 일이 줄어들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개개인의 색을 들여다보고 서로를 통해 나를 만나는 경험보다 보통과 성적이라는 숫자로만 판단하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다양성의 존중은 너는 빨간색이구나 나는 파란색이야 하고 지나치는 데서 오지 않습니다.
격렬하게 어떤 빨강을 가졌는지 나의 파랑은 너의 빨강과 어떻게 다른지를 부딪혀가며 경험하는 것으로 색이 듭니다. 서로의 다른 색을 설득하기 위한 게 아닌 각자의 색이 더 또렷해지고 그 색을 공유하고 있는 것으로 우리는 서로 어우러지며 다채로울 수 있습니다.
받아온 교육들을 바탕으로 주는 교육을 고민할 때 처음 깨달은 것은 나의 색이 어디로부터 왔는지, 안전할 때 우리가 성장할 수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니 국어, 수학, 영어 도 중요하지만 "삶"의 본질은 먹고사는 일(돈을 버는 경제활동에 국한한 것이 아닌 근원적인 살아가기 위해 어떻게 먹고살고 있는지), 한정된 시공간 안에서 우리는 어떻게 관계 맺고 있고, 어떻게 먹고살아갈 것인지를 아는 일이야 말로 자립의 시작입니다.
자립의 교육은 농사로부터 시작합니다.
오늘 내가 살아 숨 쉬고 움직이는 에너지는 다른 '생'으로부터 왔다는 것을 경험으로 아는 일, 나를 이루는 이 에너지의 관계 안에서 어떤 씨앗이 어떻게 자라 오늘의 내가 되는지를 머리가 아닌, 상이나 관념이 아닌 직접 경험을 통해 일상이 되는 일입니다.
그렇게 먹고사는 꼴, 생태계의 일원으로 살아가는 우리를 경험할 때 우리는 감자와 배추가 가진 꼴처럼 꼴을 이해하게 됩니다.
반대로 농업의 구조적 문제는 함께 살아가는 방식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바뀌어야 하는 일입니다.
자동차도 냄비도 핸드폰도 생산자가 가격을 결정하지만 농산물은 농부가 아닌 시장이, 유통업이 가격을 결정합니다.
그런 농업의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농부였던 아버지도 그 이전과 이후의 농민들이 누군가는 목숨을 잃어가면서까지 바꾸고자 했지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농민운동해 온 아버지와 현장을 통해 늘 들어온 말은 농자천하지대본이라는 말입니다.
농사는 국가의 근간이자 삶의 근간이라, 농사가 무너지면 국가도 삶도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윤봉길 의사의 농민독본에서도 조선은 농민의 나라다. 천대받아온 농업, 농촌, 농사를 살리는 일이 국가를 살리는 일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평생 농사지어온 농민들은 국가의 근간인 농업을 이야기하면서도 한 번도 사회적 가치로 인정받고 존중받아온 경험이 없을까. 그렇게 자녀들만큼은 농사짓고 살게 하지 않고 싶게 되었을까 를 들여다봅니다.
13년 전 농대를 졸업하고 농사짓기 시작할 때 할머니는 등짝을 때리면서 말렸습니다. 그 고된 고생을 손녀딸이 하는 것이 얼마나 속상한지 이야기했습니다.
마을에서는 대학을 나와서도 멀쩡한 직장을 못 다니고 농사짓는다고 내려와 있다며 지역살이하는 저를 포함한 농촌에서 사는 청년들을 실패자로 보는 시선도 많았습니다.
무엇이 우리를 '농'이 가진 가치를 떠나 부족한 사람들로 만들었을까.
그렇게 농촌의 지역소멸을 만들었을까.
도대체 어떻게 하면 이 구조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답은 교육에 있습니다. '농'이 가진 여러 가치에서 경제적 가치로만 판단할게 아니라 '농'이 가진 본래의 사회적, 환경적, 경제적 가치를 사회보편적 가치로 이야기할 수 있을 때 해결할 수 있습니다.
농업은 하나의 분리된 산업의 영역이 아닙니다.
어느 누구도 먹고사는 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지금 내가 어떻게 한 끼의 밥상을 먹는지 선택하는 것이 지금과 내일을 만드는 일입니다.
그래서 학교에서 농사를 가르칩니다.
농사는 교육의 본질인 자립을 교육은 농업의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는 구체적인 대안입니다.
재미있게도 농사를 짓는 일에는 국어, 수학, 영어, 사회, 미술, 음악 등 학교의 교육과정이 모두 담겨있습니다.
인간이 가진 중요한 감각 중 하나인 생태감각은 모든 인지영역에서 우선합니다.
인간은 강아지와 고양이를 구분하고 나면 사진으로 보든, 조금 다른 형태로 만나도 강아지와 고양이를 손쉽게 구분합니다. 세상 핫한 인공지능은 강아지와 고양이를 구분하기 위해 수많은 정보를 취합 분석하는 것과 다릅니다.
생태적 리터러시 라고 할 수 있는 이 분류가 가능한 능력은 오랫동안 인간이 먹고살기 위해 쌓아온 생태감각입니다.
학교에서 가르치는 농사는 배추와 상추의 온전한 한살이를 만나고 다시 관계 맺음으로 구분할 수 있게 되는 것, 더운 시간을 사는 작물과 추운 시간을 사는 작물의 생육과 기후를 만나며 인간의 생애주기를 만나는 일, 그로써 텃밭의 상추와 내가 어떻게 관계 맺고 사는지, 땅속에서 튀어나온 개구리와 나는 어떻게 함께 살아가는지를 경험과 감각으로 깨닫는 일입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머릿속에만 펼쳐졌던 '지식'을 살아있는 손과 발이 배우는 지식으로 생생하게 새기게 됩니다.
생각할 염 念은 마음에 새기는 일이라고 합니다.
농사를 지으면 교육과정의 교과목들이 살아납니다.
텃밭의 두둑의 넓이와 길이, 그 안에 내가 심고자 하는 작물의 종류와 개수를 가지고 농사계획을 하는 일에서 길이와 폭, 수학을 배우고 함께 자라며 서로를 돌보는 동반작물을 설계하며 함께 사는 다양한 방법을 배웁니다.
두둑을 만들고 풀을 베기 위해 호미와 낫을 사용하면서 도구의 이용과 몸의 사용을 배우고
심고 싶은 작물을 들여다보며 어떤 환경을 좋아하는지 어떻게 돌봐야 하는 지를 통해 관계 맺는 법, 당연했던 돌봄의 주체가 되는 경험으로 자존감을 형성합니다.
가지를 영어로 eggplant라고 하는 이유를 들여다보며 식물을 통해 전해지는 세계사와 지역마다 다른 문화와 이야기를 배우고
벼, 볍씨, 나락, 까락 등 늘 먹어온 밥이 되는 쌀의 또 다른 이름등을 통해 우리는 전승되어 온 지혜와 단어를 통해 이해하는 삶으로 문해력을 키웁니다.
감히 말하면 교육 과 농사를 분류한다면 농사는 교육을 담고 있는 더 큰 덩어리입니다.
우리의 삶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지혜이자 감각입니다.
국어, 수학, 영어 그 이전에 혹은 그것들 모두와 동등학교 학교에서는 교과로 농사를 가르쳐야 합니다.
기후위기 시대, 끊임없는 경쟁사회에서 '나는 어떤 사람인가, 우리는 어떻게 먹고 살아갈 것인가'를 세우는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