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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할아버지카페 딸 Oct 04. 2022

나의 사랑스러운 소녀팬들

또 하나의 가족, 손님 이야기

저 또한 집에서는 평범하기 그지없는 ‘영감’입니다. 가족들이 그렇게 가져다 버리라는 무릎 나온 내복에 늘어진 난닝구를 입고 돌아다니다 싫은 소리를 듣기도 하고, 세수하면서 수염에 물든 김칫국물을 씻지 않아서 집사람이 혀 차는 소리를 하기도 합니다. 그래도 카페를 하면서부터는 제 외모를 칭찬해주시는 손님들이 있어서 나름대로 신경을 쓰는 편입니다. 코로나 사태가 일어나기 전까지는 일주일, 혹은 사나흘에 한 번씩 목욕탕에도 다녀오고, 보름에 한 번씩 이발소에 가서 수염을 다듬기도 합니다.     


아, 이쯤 해서 다들 제가 수염을 기른 이유가 궁금하실 듯합니다.   

   

제가 수염을 기르기 시작한 것은 대략 사십 대 중반의 일입니다. 그 무렵 저는 마음을 다지고자 백두대간 종주를 했습니다. 가을 무렵에 시작해서 초겨울에 지리산에서 끝이 났으니, 대략 3개월 정도 한 것 같습니다. 그 무렵 깍지 않은 수염이 덥수룩하게 자란 채로 사람들을 만나니, 그들의 첫마디가 ‘수염이 참 멋있습니다’ 하더군요. 이것이 수염을 기르게 된 단순한 이유입니다.


때문에, 할아버지카페를 열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가게를 찾아오는 손님마다 제 수염이나 스타일이 멋있다고 칭찬을 해주실 때는 얼마나 어리둥절했는지 모릅니다. 사실, 제 수염도 수염이지만, 저는 그다지 칭찬에 익숙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 때문에 낯 모르는 젊은 사람들이 제 칭찬을 하는 것만으로도 어딘가 쥐구멍을 찾아서 숨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마저도 차츰 익숙해지더군요. 그리고 언젠가부터는 저 또한 굳이 카페가 아닌 다른 장소에 가도 어깨가 펴지고 마음이 당당한 것이 나, 스스로가 얼마나 자랑스러운지 모르겠습니다. 요즈음 친구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칠십 평생 처음으로 ‘자존감 회복’을 경험한 셈입니다. 알고 보면 이것도 다, 할아버지카페와 찾아주시는 손님들의 덕분입니다.


그래서일까요. 할아버지 카페에는 언젠가부터 커피 맛이 아닌 제 외모를 보기 위해서 찾아오는 손님들이 있습니다. 그것도 젊은 친구들이 아니라, 저와 나이가 비슷한 연배의 ‘소녀팬’들이 있습니다. 젊은 친구들은 뭔가 이상하다 싶기도 하겠지만. ‘인생은 육십부터’ 이니 아무리 나이가 일흔을 넘겨 여든에 가까운 나이라도 고작해야 열다섯이나 열여섯이지요. 그러니 소녀팬들이 아니겠습니까?


이 소녀팬들의 제게 보여주는 애정이나 관심 또한 요즈음 젊은 친구들이 아이돌 그룹에 보여주는 열정에 절대 뒤처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욱 적극적이라고나 할까요. 우선은 같은 또래의 친구들과 함께 카페를 찾아와서 저의 ‘찐 팬’인 것을 스스로 밝히시며 무척이나 반가워하고 좋아하지요. 저를 정말 ‘마음의 친구’로 여기며 가족들이나 친구들 앞에서 자랑도 합니다. 저의 시답지 않은 우스갯소리에도 까르륵 웃음을 터뜨리기도 하고, 공방이나 수공예 모임에서 힘들게 만든 마스크나 두건 같은 선물을 수줍게 내밀기도 합니다.


한 번은 이른 아침. 꽤 거리가 먼 이웃 동네에서 둘레길을 짚어 저희 할아버지카페를 찾아오신 할머니 두 분이 있었습니다. 그날은 제게 개인적인 일이 있어 저희 딸 사장이 가게 문을 열었지요. 예상대로라면 두 어르신은 아침 산책의 마무리로 제가 만드는 카페라떼를 먹을 생각이었고, 우리 집의 마수걸이를 해주시는 개시 손님이기도 했지요. 그런데 웬걸? 가게 안을 쓱 들러보던 두 양반이 딸 사장에게 물었습니다. 할바님은 아직 안 나왔어? 할바님은 할아버지 바리스타님의 줄임말입니다. 인근 장학관의 어린 친구 몇몇이 그리 장난 삼아 부르다 별명처럼 되었지요. 네, 밖에 일이 있어서 오후 한두 시쯤 되어야 돌아오세요. 딸 사장이 표현을 빌자면, 두 어른의 표정이 그렇게 섭섭할 수가 없더랍니다. 그리고는 제가 돌아오는 시간에 맞춰 다시 오겠노라며 카페를 떠나셨다더군요.

 

앞서 이야기처럼 이 할아버지 바리스타를 두고두고 흐뭇하게 만드는 이야기가 있는가 하면, 때로는 제게 보여주시는 관심이나 좋아하는 마음이 지나쳐 부담스러울 때도 있습니다. 한가한 오후, 저 혼자 호젓하게 즐기는 산책길에 제 뒤를 따라와서 무리한 부탁이나 요구를 하기도 하고, 저희 가족들이 함께 있는 가운데, 과하다 싶게 관심을 표현할 때는, 할아버지 카페를 찾아주시는 고마운 손님임에도 조금 불편해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요즈음은 우리 가게를 찾아주시는 소녀팬들의 마음이 때때로 의심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분명 제가 멋있어서 가게를 찾아온 것 같았는데, 언젠가부터 저희 집사람을 찾을 때가 더 많습니다. 그것도 아주 오래전부터 알던 사람처럼 ‘할머니 마담님, 있어요?’ 하고 친근하게 집사람을 부르기도 하고, 딸아이의 이름을 붙여 ‘재요 엄마 어디 갔어요’ 하기도 합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오랫동안 홀로 지내던 나의 소녀팬 중 하나는 새로 사귄 남자 친구를 데려와 저희 집사람과 또 다른 소녀팬 친구들 앞에서 선을 보인 적도 있습니다. 그 와중에 저는 어줍지 않게 한마디를 했다가 궨스레 싫은 소리만 들었지요. 또 가끔은 저 혼자만 가게에 남겨놓고 딸사장을 운전사 삼아서 집사람과 함께 교외로 드라이브를 가기도 합니다. 그리고는 찜질방이다, 맛집이다 실컷 놀다가 늦은 밤이 되어서야 돌아옵니다. 그래도 이건 약과입니다. 요즈음은 나의 소녀팬들과 우리 집사람이 한통속이 되어서 저의 단순하고 생각 없는 행동을 나무라기도 하고, 조금 더 나아가서는 저더러 집사람에게 잘 해야 한다느니, 마누라를 업고 다녀야 한다느니, 훈계 아닌 훈계를 하기도 합니다.


도대체 이 소녀팬들은 제 팬인 걸까요? 아니면 우리 집사람의 팬인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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