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할아버지카페 딸 Dec 13. 2024

가게가 망했는데, 아빠는...

쫄딱 망했다, 라는 표현이 딱 들어맞는 상황이 내게 닥쳤다. 드디어. 

이 상황이 언젠가는 닥치리라는 것을 모르지는 않았으니까. 


깔딱,깔딱 물에 빠진 사람이 코끝까지 차오르는 물 위를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 같은 상황을 나는 지난해 이맘 때쯤부터 겪고 있었다. 자연, 코로나시기부터 껴 안고 있던 부채마저 감당하기 어려운 지경이 되었다. 개인회생을 신청했다. 그러고 숨통 좀 트이겠구나 싶었는데, 상황은 더욱 안좋아졌다. 가게 매출이 예전의 30%도 나오지 않았다. 나중에는 손님이 없는 날이 많아서 가게에 나와 앉아 있는 것이 무의미해질 정도였다. 장사가 되든 안되든 장사꾼이 가게를 지키는 것은 당연한 도리요 의무겠다. 하지만, 평소 주의력이 산만하고 생각이 많은 나는 문득 문득 '이토록 비생산적인 일'에 나 자신을 묶어두는 것이 합리적인가에 대한 의문을 떠 올렸다. 그리고나면, 말 할 수 없는 후딱증이 일어서 마음을 부지할 수가 없었다. 월세 130만원을 내는 가게의 한달 매출이 120만원이니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결국, 


지난 토요일에 일이 매듭지어졌다. 매출이 그 모양이니, 당연 월세가 여러달 밀려있었다. 그 문제를 이야기하려 전화를 했던 임대주와 합의를 봤다. 올해 연말까지만 장사를 하고 가게를 내어주는 것으로. 지난 토요일이 11월 30일이니 가게를 접을 때까지 대략 한달 정도의 말미가 있을 뿐이었다. 그리 깐깐하지 않은 임대주를 만나서 계약 만료일까지의 월세를 물리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내 손에 남는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어림잡아 계산을 해보니, 올 한해 동안 밀려있는 월세와 건물 관리비, 시설물 철거비 등등을 제하고 나면 겨우 300만원이 될까 말까 했다. 


참담했다. 


내 앞으로 되어 있던 작은 빌라 하나가 삼년이 조금 안된 기간동안에 물거품처럼 녹아 없어졌다. 외할머니가 내 앞으로 물려주신 현금과 엄마의 쌈짓돈을 보태어 장만했던 빌라였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맨처음 가게를 시작할 때 엄마 말을 듣기를 잘 했다는 것이다. 쓸 돈이 부족해도 집을 팔지 말고 전세를 놓으라는 것. 그래서 일억에서 몇 천이 조금 넘는 집을 일 억에 전세를 놓았다. 그 마저 털어보면 빈 껍데기일테지만, '나이 쉰에 가진 것 하나 없는 모자란 여자' 신세는 겨우 면했다. 겉으로는 보기 나쁘지 않았고, 사람들에게 말하기도 좋았다. 이 번에도 엄마말은 맞았다. 엄마는 절대 틀린 말은 하지 않는다. 


오랜만에 가슴이 쿡쿡 쑤시면서 울고 싶어졌다. 오 년 전에던가, 병원에서 자궁적출수술을 권유받았을 때 이후로 울고 싶은 마음이 든 것은 처음이었다. 그런데 눈물은 한방울도 나오지 않았다. 젊었을 적 철철 넘치던 눈물이 죄다 어디로 흘러서 사라졌는지 알 길이 없었다. 대신 무기력증을 동반한 몸살을 호되게 앓았다. 방문 밖으로 나오기가 싫어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토요일과 일요일, 휴일을 끼고 병이 나서 다행이었다. 꼬박 사흘을 침대에 누워 있다가 일요일 저녁이 되어서 밖으로 기어나왔다. 



내 기분이 참담하건, 내 머릿속이 헤집어져 난장판이 되었건, 우리집 두 어르신은 평소와 다름 없었다. 엄마는 산더미처럼 쌓인 빨래를 개키며 궁시렁궁시렁 혼잣말을 했다. 쉰이나 된 기집애가 양심이 없어도 너무 없어. 팔십이 다 된 엄마가 해주는 빨래를 맨얼굴로 냉큼냉큼 입었다가 벗었다가.... 그런 이야기가 쉴 새 없이 되풀이 되었다. 귀가 잘 들리지 않는 아빠는 말 많은 엄마를 뒤로 하고 텔레비전 앞에 바싹 다가 앉아서  드라마를  보고 있었다. 두 양반 모두, 삼년사이에 일억 가까이 털어먹은 딸에 대한 걱정은 정말 눈꼽만큼도 안중에 없는 듯 보였다. 




안방 문턱에서 나는 가만히 그런 두 어르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엄마랑 아빠가 시골에서 가져온 보리쌀자루처럼 묵직하면서도 쬐그맣게 방 한가운데 주저 앉아있었다. 나는 그냥 서러운 마음이 들어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 우리 아빠, 진희씨의 옆구리를 파고 들었다.  아빠는 여전히 텔레비전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마치 강아지를 어루만지듯 한 손으로 내 머리를 토닥토닥 쓰다듬었다. 눈물은 여즉 나오지 않았지만, 신음같은 한마디가 내 입에서 조르르 흘러나왔다. 아, 속상해. 속상해서 죽겠어. 아빠가 내 말에 대답했다.  에이, 뭘 속상해. 사람이 그럴 수도 있는거지. 걱정 마! 우리 딸은 잘 될거야. 


 아빠의 말에서 영혼이라던가, 관심이라던가 하는 마음의 엑기스는 한방울도 느껴지지 않았다. 드라마 속 쫓기는 노비가 추노꾼들에게 잡혀도 이 보다는 나은 대접을 받으리라.   아빠는 여전히 텔레비전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말을 이어나갔다. 


내가 그랬잖아. 올해는 갑진년이라, 경술일에 태어난 너하고는 천간충 지지충 부딪히기만 하고 맞는게 없다고. 눈 질끈 감고 동지까지만 참아. 동지만 지나면 ... 


아빠의 말은 내 사주와 세운에 관한 것이었다. 소싯적부터 왼갖 잡다하고 쓸모없는 것들에 관심이 많은 우리 아빠 진희씨는 사주명리에 의외로 정통했다. 틀린 말은 절대 하지 않는 엄마처럼은 아니지만, 아빠의 명리학적 소견들은 이따금 신통한 면모를 보이곤 했었다.  


나도 모르게 늑골 사이를 훑는듯한 한숨이 쉬어졌다. 그래도 이건 아니었다.  생각을 곰곰히 해봐라. 이제 쉰이 넘은 빈털터리 노처녀에게 잘 될 나중이 있기는 하겠는가? 있다면 또 얼마나 있겠는가? 나는 우리 아빠가 사주 철학관이 아닌 카페를 차리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이런 상담가를 만나서 운명 감정이란 것을 한다면 얼마나 억이 막히겠는가. 나도 모르게 빽, 하고 지르는 소리가 나왔다. 


다, 살은 놈의 팔자 무슨 영화를 보자고! 


어라? 지금껏 나불나불거리면서 잘 돌아가던 텔레비전 소리가 뚝 끄쳤다. 모든 시선이 텔레비전으로 가 있던 아빠의 눈이 동그래져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빠가 나에게 물려준 눈은 와이셔츠 단추구멍만큼 작고 찢어진 눈이었다. 아빠가 그 작은 눈을 어찌나 크게 떳는지, 평소 보이지 않던 흰자가 다 보일 지경이었다.  


딸, 그게 무슨 말이야! 다 살았다니! 


내가 짜증섞인 목소리로 대꾸했다. 


올해보다 나으면 뭐하냐고! 지금껏 살면서 좋은 적이 있었어야지, 내년에는 좋아진다, 좋아진다  아빠말만 믿고 살다가 이렇게 나이만 먹었잖아! 내 인생은 정말 그랬다. 정말로 아빠는 해마다 내 운로가 좋다고, 올해는 잘 될거라고 점을 쳤지만, 실상은 뭔가 제대로 일이 풀려간 적은 없었다. 아빠는 평소에 늘 하던대로 지필묵을 대령해서 나의 사주팔자를 적었다. 그리고 해당 글자에 동그라미를 그리며, 내년에는 합이 들어서 일이 잘 풀릴거라고, 확신을 하듯 말했다. 그 또한 늘 있는 일이었다. 아! 몰라, 몰라, 몰라... 나 이제 어떻게 살아야할지 머리속이 아득하단 말이야. 역시, 눈물이 한방울도 나오지는 않았지만, 나는 우는 소리를 연신 해댔다. 


딸, 모르다니! 세상 하는 일마나 가로막히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데...  내년에는 죽이되는 밥이되든 무엇인가 내 뜻대로 된다고  희망이라도 가지고, 꿈이라도 꿀 수 있잖니?  그게 얼마나 다행이야! 


꿈은 무슨, 희망은 개뿔! 


아빠가 손에 쥐고 있던 리모콘을 내려놓고 막말을 쏟아붙는 내 입을 틀어막았다. 마치 누군가의 귀에라도 들어갔다가는 잡혀갈듯 불온한 소리를 한 것처럼. 다른 집도 마찬가지이겠지만. 아빠가 리모콘을 손에서 내려 놓는 일은 절대 없었다. 배에다 리모콘을 올려놓고 드르렁 드르렁 코고는 소리가 나서 우리가 리모콘을 집어들면, '나, 안잔다' 하고는 벌떡 일어나는 게 우리 아빠들 아니던가? 그런 아빠가 리모콘을 내려놓을만큼, 내가 중차대한 발언을 했다고는 그때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다, 기울어져가는 이 엄마, 아빠도 꿈이 있고, 희망이 있는데, 

네가 개뿔이면 우린 어떻게 하니? 


이 심란하고 우울한 상황 속에서 뭔가, 생각지 못한 균열이 생긴 것은 바로 그 때였다. 상황의 반전은 늘 그렇게 온다. 아빠는 1947년 정해생 일흔 여덟이었고, 엄마는 1946년 병술생 일흔 아홉이었다. 그런 엄마 아빠의 꿈과 희망이라니! 그것도 쉰이 넘은 딸래미가 하던 사업을 말아먹은 이 시기에 말이다. 우리 부녀 뒤에서 양말을 동글동글 말아서 짝을 채우던 엄마가 아빠를 거들었다. 


우리가 꿈이 왜 없어! 

우리도 허리 아픈거 고치고 내후년에는 동유럽가려고 적금도 부었는데, 

마흔 년, 네 년이 징징대는 바람에 마음이 약해져서 절반을 떼어먹어 그렇지. 


무엇때문이었는지 몰라도, 그렇게도 안나오던 눈물 한방울이 찔끔, 눈 앞고리를 타고 흘렀다. 지난 봄에 엄마가 이모를 팔아 융통해준 돈 사백만원이 바로 그거였구나. 하는 짐작과 함께, 또 다른 생각이 그 짐작 사이를 파고 들었다. 이 양반들 지금 무슨 생각하는 거래? 아주 이상하고 낯선 느낌이었다. 엄마와 아빠의 희망에 마치 내가 일부분을 의무적으로 담당해 하는듯한... 절대 절대 절대 그렇게 되고야 말거라는 그런 기분 말이다. 


바로 믿음에 대한 느낌이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