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또래들이 유년시절을 보낼 때. 미운털이 톡톡히 박힌 자식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다리 밑에서 주워 온 아이라는 것.
지금이야, 두 눈 똥그랗게 뜨고, 유전자 검사를 해보자고 덤벼든다지만, 예전에는 내가 엄마 혹은 아빠의 아이가 아니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숨이 넘어가도록 울음보를 터뜨리곤 했었다. 태어나서 그토록 야멸차게 나의 정체성이 부정당해 본 기억이 또 어디에 있던가 싶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우리 엄마는 노골적으로 아들 하나밖에 없는 '아줌마'였다. 네 살 아래의 남동생은 예나 지금이나 '우리 재준이' 였으나, 나는 엄마의 자식이 아니었다. 엄마는 늘 입버릇처럼 말했다. '저건 당최 누굴 닮아서'
심지어 엄마는 내가 남동생과 지글지글하게 싸운다는 이유로 나를 작은 짐가방과 함께 보육원 앞에 가져다 버린 적도 있었다. '동생과 싸우는 아이는 우리 집 아이가 아니야' 그때의 심정이란. 평소에 들었던 말로 짐작건대, 올 것이 왔구나, 하는 비장한 각오가 어린 마음에 솟아났다. 그래서 누군가 나를 데려갈 때까지 나는 보육원 앞에 오독 커니 서 있었던 기억이 난다. 나에게는 한 없이 긴 시간이었지만, 나를 버린 '아줌마' 즉 지금의 우리 엄마는 고작 십분 정도였다고 한다. 내가 울며 불며 엄마 다리를 붙잡고 매달릴 줄 알았는데, 쪼그만 게 '누굴 닮아' 그리 독한지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더란다. 자칫하면 정말로 누군가 보육원에서 나와 저 애물을 데리고 들어가는 건 아닌지, 슬며시 겁이 났다고 한다. 그리고 나선 엄마와 집 근처 중국집에서 자장면을 시켜 먹었던 기억이 난다. 그날 일은 할머니에게 비밀로 하자고 굳게 약속을 했다. 그 때문이었을까? 그날은 이모가 서울에서 사 온 블라우스에 자장을 묻히고 먹었는데도 엄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이가 들어서의 일이다. 나는 폰빌레브란트병, 줄여서 V.W.G라는 희귀성 혈우질환을 가지고 있다. 어릴 적엔 증세가 심해서 병원에 입원을 한 적도 있었지만, 지금은 남들보다 지혈이 조금 늦거나 상처가 늦게 아무는 정도이다. 이와 더불어 갑상선암으로 인해 갑상선 부분절제를 한 상태다. 사실, 이 모든 것들은 외가 쪽에서 물려받은 유전질환이다. 그럼에도 우리 엄마는 내가 엄마의 자식인 것을 몹시도 격하게 부정을 한다. 목욕탕에서 함께 목욕을 할 때였다. 양치질을 하던 중에 한입 머금은 양치거품을 뱉어냈다. 핏물이 섞인 선홍색의 양치거품이었다. 양치를 할 때마다 피 섞인 거품이 나는 것은 V.W.G 때문이었다. 칫솔질과 같은 가벼운 자극에도 잇몸에 출혈이 생긴다. 내가 엄마를 닮았다는 충분한 증거임에도 엄마는 이렇게 말했다.
'어이구, 지 아비를 닮아서 어디 한 군데 변변한 구석이 없어'
여기서 내 친부모에 대한 한 가지 단서가 나온다. 엄마는 극구 아니라지만, '지 아비를 닮았으니' 나는 아빠의 딸이 아닌가? 하지만, 이 부분도 미심쩍은 데가 많다. 내 기억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 우리 아빠는 한 번도 나를 아빠 자식이라고 말한 적이 없었다. 내가 아빠에게 늘 나의 출생에 대해 물어보면 그 대답은 늘 한결같았다.
응, 너는 내가 다리밑에서 주워왔어
그것도 시기와 배경이 매우 구체적이다. 아빠의 말에 따르면. '내가 여름 초입에 퇴근을 하고 집에 가는데, 어찌나 배가 고프던지. 그런데 전농동 떡전교 앞을 지날 때였어. 다리 아래서 누군가 떡 사세요, 떡 사세요, 하지 않겠니? 그래서 다리 아래를 내려다봤더니 갓난아기를 하나 업은 아줌마가 콩가루에 고물고물 무쳐놓은 쑥덕을 팔고 있지 않겠니? 그래서 떡을 한 봉지 사고, 오백 원짜리 한 장을 내줬는데 잔돈이 없다는 거야. 그러더니 정 받아가려면 등에 업고 있는 아기라도 받아가라지 뭐니?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받아왔지. 그래서 네 생일이 7월 4일인 거야. 널 주워 온 날이지 뭐.
우리 아빠, 진희 씨의 말이 어찌나 사실 같던지. 오죽했으면 우리 가족이 지방에 살다가 서울에 올라오던 해. 고작 아홉 살 무렵, 청량리에 살던 내가, 옆집 살던 언니와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이 떡전교였다. 그 언니가 다니던 학교가 떡전교 근처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떡전교 아래는 내가 태어나기 훨씬 전부터 기차가 다니던 철길이었다. 때문에 아빠의 말이 참말이 아닌 것이 확인되긴 했지만.
그래도 문득문득 추운 겨울이나 무더운 여름에, 그리고 늦은 저녁에 길가에 큰 다라이를 놓고 먹거리나 푸성귀를 파는 아줌마들을 보면, 우리 친엄마 생각이 나서 마음 한편이 스산하고 추워졌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라서 그냥 쉽사리 지나치지 못하는 반푼이가 되어버렸다.
그런 내 마음의 상처를 아는지 모르는지. 우리 아빠, 진희 씨의 한결같은 대답은 내 나이 쉰이 되도록 늘 한결같기만 하다. 내가 아빠에게 장난 삼아 '나 누구 딸?' 하고 물어보면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아빠는 이렇게 대답한다. '얘는 맨날 말해줘도 몰라? 넌 떡전교 아래서 주워왔어.' 하고 말이다. 아마도 그런 뚝심과 한결같음으로 세상 일을 해왔다면 우리 아빠는 무엇이라도 하나 똑 부러지게 해냈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아빠의 한결같음은 이런 몹쓸 장난에서만 빛을 발한다. 그러고 보면, 가끔은 우리 아빠의 말이 설마 진실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마저 들게 한다. 왜 차마 진실을 이야기할 수는 없는 처지이고, 참담한 진실은 알려야겠기에 진담반, 농담반 섞어서 말하는 그런 방법들 말이다.
그런 가운데, 의문이 하나 드는 것은.
내가 아빠의 말대로 주워온 딸임에도 이상하리만치 아빠를 빼다 박았다는 것이다. 식성이나 말투는 함께 오래 살면 닮는다지만. 생긴 것은 그렇게 빼다밖기가 쉽지 않다. 오죽했으면 우리 아빠를 처음 본 내 친구 하나가 이렇게 말했다. 그 애는 아빠와 내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까르륵 웃음을 터뜨리고는 한참을 멈추지 못했다. 그리고 하는 말이,
얘, 너 턱밑에 수염하나만 붙여라. 그러면 딱, 너희 아버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쉰의 나는 오늘도 내 출생을 의심한다.
우리 아빠 생전에 '출생의 비밀'에 대한 진실을 들을 수 있기는 한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