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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무도 Jun 09. 2020

인맥과 인연 사이

<나와 너> <나와 그것>

어려서 스쳐 지나가듯 들은 말이 오랫동안 내 삶에 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있다.


"학창 시절 친구가 인생의 친구지"라는 말이 내겐 그랬다.

그 말은 학창 시절 친구들과의 인연만 소중하게 여기도록 만들었다.

직장을 다닐 때도, 아이를 키우면서도, 그 말은 내게 남아  직장동료나  학부모와의 만남은 '시절 인연'이겠거니 하고 지레 단정 짓고 흘려보내게 했다.

 

그런데 그 학창 시절 친구관계를  30년, 길게는 40년 동안 변하지 않고 유지하는 것은 믿음만 가지고는 부족했다. 수십 년 동안 점차 자신의 색을 입혀가는 사람들이 만나 수십 년 전 감정을 공유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어렸을 때는 파스텔톤을 띄며 정체성이 약했다. 그에 반해 나이 들수록 점점 명료한 진한 색으로 변해갔다. 연분홍과 연하늘이 어느새 진빨강과 진파랑이 된 느낌이었다


친구가 된 지 30년이 훌쩍 넘은 때부터였던 것 같다. 관계가 겉돌고 작은 흠집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친구 A는 어느 순간부터  부탁이 있을 때만 연락하기 시작했다.  뜬금없이 톡으로 요구를 하고선 문제가 해결되고 나면 한동안 잠적하는 친구 A에게  한걸음만큼 거리감이 느껴졌다. 이해해 보려 하기도 하고, 슬쩍 서운한 감정을 내비치기도 했지만 소용없었다.


그러다 마르틴 부버의 <나와 너>라는 책을 읽게 됐다.

 마르틴 부버는  인간관계를 두 가지로 분류했다.  

'나와 너와의 관계(Ich-Du)'와 '나와 그것의 관계(Ich-Es)'.  


나와 너와의 관계(Ich-Du)는 상대방을 순수하게 인격체로 대한다.

문제는 나와 그것의 관계(Ich-Es)인데, 여기서 '나’의 만남의 대상은 ‘너’라는 인격체가 아니다.

나의 목적과 필요에 따른 네가 가진 '그것'이다.

즉 나는 ‘너’를 만나는 게 아니라 ‘그것'이 필요해서 ‘그것'을 만나는 것이다.


나는 너와 <나와 너>의 관계이고 싶은데

너는 <나와 그것>의 관계를 원할 경우,

나는 너에게 상처 받는다.


물론 '그것'쯤 얼마든지 내줄 수 있다. 35년 친구니까.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때로는 ‘그것’ 일 때도 ‘너’ 일 때도 있다. 

친구로서 나의 '그것'을 선뜻 내 줄 수도 있어야 한다

나를 ‘그것’으로 대하는 친구를 모두 다 적대시할 필요도 없다. 



그런데

'나의 그것' 받으려는 친구를 만나면

'나'는 '나'가 아닌 '그것'이 된 느낌이 든다.

그 텅 빈 느낌을 떨칠 수가 없다.


더 서글프고 안타까운 것은 그 친구와 나는  

전에는 분명 '순수한 (Ich-Du) 관계'였다는 것이다.


마르틴 부버가 "순수한 관계는 확증될 수 있을 뿐이지 보존될 수는 없다"라고 말한 것처럼 우리의 관계는  잘 보존되지 못하고 서서히 변질된 것이다.


관계의 연결고리는 남았지만 그 안의 생명은 줄어들고 있었다. 어쩌면 이미 예전에 우리의 인연은 인맥으로 변해버린 건지 모른다.


내가 친구와 공감대를 잘 형성하지 못해서일 수도 있다. 또는 친구가  중년의 삶이 고단해서 '자신의 필요를 채워주는 장치'를 설치하는 삶의 방식을 택했을 수도 있다. 그렇게 목적지향적으로 삶의 자세를 바꾼 친구에게 나는 어느새 ‘너’에서 ‘그것’으로 전락한 것이다.


문제는 내가 그 관계를 너무 오랫동안 방치한 것이다.

관계는 가꾸고 살펴봐야 하는데 난 오래됐다는 이유로 영원히 순수하리라고 착각했다. 확실히 믿음보다는 방치에 가까웠다.


틈틈이 징조가 보일 때마다 관계를 전지적 작가 시점에서 관찰했어야 했다. 그러고 나서 ‘너’에서 ‘그것’으로 변화되는 시점에 나도 관계의 지속성을 두고 고민했어야 했다.

나 또한 친구를 ‘그것’으로 대하며 친구에 대한 마음을 비울지. 계속 ‘너’로 대하며 관계 회복을 위해 애쓸지 말이다.

단. 나는 너를 ‘너’로 계속 대하며 관계 회복을 위해 애썼는데도

너는 나를 ‘그것’으로'만' 대한다면,  그래서 불쾌함을 넘어서 허망하기까지 하다면 당분간 거리를 두는 것도 방법이다.


인연에도 유효기한이 있다는 말이 있다.  

어쩌면 우리 사이는 이미 과거 완료된 지 오래인데 일 년에 서 너번 만나면서 현재 완료라고 착각했는지도 모른다. 우린 친해왔기 때문에 앞으로도 친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서로 만나오는 일은 생명력이 다한 탯줄을 끊지 않고 있는 것과 같다. 그보다는 마음이 내키지 않으면 그냥 잠시 관계를 놔 버리는 것도 괜찮다. 

친구와 관계의 밀도가 서로가 함께 한 세월과 꼭 정비례하는 것은 아니다. 

서로 긴밀한 교감이 이루어지지 않는 상태에서 “우린 친한 거야”라고 서로가 서로를 속일 수는 없는 것이니까.


처한 상황이 변하면 그에 따라 친밀감을 느끼는 대상도 변할 수밖에 없으니까.

나이 들면서 즐겨 입는 옷의 취향과 사이즈가 변하듯 나와 진정한 소통을 할 수 있는 친구도 바뀔 수 있다.  


자연스럽게 문을 열어놓고 인맥을 환기하는 것, 그 인맥을 다시 인연으로 이어가는 것이 필요하다.


인연이 인맥으로 넘어가는 것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만큼

인맥을 인연으로 이어가는 노력도 이어가야 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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