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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무도 May 19. 2020

권태로움에 관하여

신문을 읽다가 결혼생활에 대한 글에서 “악으로부터 인류를 지키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이 권태로부터 결혼을 구하는 것일지도‘라는 구절을 읽었다. 읽자마자 웃음을 터뜨렸다.    


권태를 사전에서 찾아봤더니 ‘단조로움, 따분함, 심심함을 모두 포괄하는 지루함은 근대의 현상이다’라고 한다.  단조로움, 따분함, 심심함, 지루함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자극이 없다는 거다. 사실 엄밀히 말하면 권태는 설렘 free 기쁨 free 고통 free 걱정 free 상태이다. 기쁨과 설렘 같은 흥분을 일으키는 감정이 일어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걱정과 고통 같은 괴로움을 느끼는 감정도 없기 때문에 지루하고 따분한 것이다.


우리는 자극에 반응한다. 자극은 부정적이거나 긍정적인 것이다. 배가 고프면 꼬르륵하고 배가 부르면 포만감을 느낀다. 그 사이에 배가 고프지도 않고 배가 부르지도 않은 무감각의 시간이 온다.  배가 고프거나 부른 상태는 인식하지만 그 사이에 편안한 상태는 인식하지 못한다.  어느 누구도 "나 지금 배가 고프지도 않고 부르지도 않고 딱 좋네"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침 식사 후 9-11시, 점심식사 후 2-4시. 내 몸에 위장의 존재와 위치를 잊는 시간.  자극의 측면에서 보면 무감각 상태지만 사실은 만족스러운 시간이다. 가장 만족스러운 상태는 인식조차 하지 못하는 바로 그때다. 그 시간은 가장 안정적인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편안하기 때문에 ‘인식’ 자체를 하지 못한다.   


신체적으로 신호를 받지 않는 이 시간이 감정적으로 보면 고통스럽지도 기쁘지도 않은 '권태로움'의 상태일 수 있다.  이 시간에 주로 하루의 주요 일과를 처리한다.  안정된 상태에서 몰입도를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무자극의 상태를 잘 견디는 것. 그것이 '안정감을 누릴 수 있는 권한'을 준다. 

 

문제는 권태를 설렘, 기쁨이 없는 상태로만 인식하고 고통, 불행이 없는 상태로는 인정하지 않는 데 있다. 수십 년 같이 살아온 부부간에 설렘이 없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인데 말이다.


아무 문제가 없는 상태를 만족스러운 상태로 인식하지 못하고 우리는 때론 ‘자극’을 갈구한다.

권태의 상태에 약간의 충격을 부과하면 바로 그 권태는 사라지고 쇼크를 일으키는 감정에 충실하게 된다. 그리고 그 충격이 해소되고 나면 일시적이나마 행복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행복의 상태가 지속되면 모든 게 익숙해지고 또다시 권태감에 빠져든다.




건강검진을 받고 '이상 소견'이 있어서 재검사나 조직 검사를 받아 본 적이 있다. 결과가 나오기까지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 모른다. 기다리는 그 며칠간 이 생각 저 생각으로 뒤척이며 극심한 불안감에 시달렸다. 


며칠 뒤, 아무 문제가 없다고 통보를 받고 나면  그 고통의 자리는 바로 행복으로 채워지곤 했다.

사실 그 행복함은 며칠 전 건강검진을 받기 전과 다를 바 없는 일상에서 나온 것이다. 


검사를 받기 전, 권태롭기만 하던 일상이 약간의 고통을 주입한 뒤 고통을 제거함으로써 너무나 평화롭고 행복한 나날로 변하는 걸 느끼게 된다.


권태로움은 행복함의 반대가 아니다. 권태로움은 그저 자극이 없는 상태다. 어쩌면 고통의 반대인지도 모른다. 권태로움을 느낄 때마다 기쁨도 없지만 고통도 없는 상태라는 자각을 해보도록 하는 건 어떨까.


지금 결혼생활이 권태롭다는 것은 고통스러울 정도로 불행하지 않다는 것이다.


권태로운 이 봄, 고통스럽지 않다는 점에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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