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어학당은 10주 단위로 운영된다. 10주가 1학기인데 전반 5주, 후반 5주로 나눠 담임 선생님만 교체하곤 한다. 반 학생들은 10주간 함께하고 선생님은 5주 동안 한 반의 담임을 맡는 셈이다.
5주마다 낯선 학생들을 만나서 수업을 하는 것은 긴장감보다는 설렘이 더 가득한 일이었다.
5주란 기간은 사람의 장점을 발견하기엔 넉넉한 시간이고 단점을 찾아내기엔 부족한 시간이었다.
말하자면 5주 차까지 학생들의 장점만 하나씩 발견하다가 단점이 보일 즈음 헤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짧은 기간 인연을 맺는 것은 서로에 대한 실망감은 줄이고 만족도는 높이는 결과를 낳았다. 그래서인지 반이 바뀌고 나서도 복도에서 만나면 늘 반갑다 못해 애틋했다. 반 학생 중에는 내게 배운 지 일 년이 지나서도 꾸준히 메일을 보내는 일도 드물지 않았다.
사람을 쉽게 좋아하지 못하는 나로서는 사람에 대해 유일하게 무장해제됐던 시기였다. 돌이켜보면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내가 다른 건 상대방에 대한 기대감의 차이인 것 같다.
불완전한 언어 소통, 외국인이라는 거리감, 결정적으로 한정된 만남의 기간은 나 자신이 상대방에 가지는 기대감을 많이 내려놓게 했고 이해심과 인내심을 늘여놓았다.
나란 사람은 낯익고 정든 관계보다 낯설고 곧 끝맺을 관계에 더 관대 해지는 것 같다.
최소한 "네가 나한테 어떻게 이럴 수 있어?"라고 할만한 끈적한 스토리가 생길 일이 없다는 것이 산뜻했다.
지금도 강의실에서 틈틈이 주고받았던 일상의 소소한 이야기들과 서로를 향한 밝은 미소가 생각나곤 한다. 대부분이 이러니 가끔 까칠한 학생이 있으면 상대적으로 더 부각된다.
한국어 특성상 예외가 많은 발음이나 문법을 가르칠 때가 되면 학생들의 반응은 극명하게 갈렸다.
예외를 흥미롭게 접근하는 학생이 있는가 하면
예외를 순응적으로 받아들이는 학생도 있다.
드물게는 예외를 부당하게 느끼는 학생이 나타난다.
"왜 여기선 이렇게 해야 하죠?" 하면서 따지듯 물어보고 나서 설명을 듣고 나면 고개를 설레 설레 젓는 학생. 그런 학생의 대부분은 한국말 문법이나 발음의 예외를 횡단보도 빨간 불에 길을 건너는 범법자 취급한다. 그리고 그 범법자가 많은 한국(말)을 차츰 적대시하기도 한다.
문법의 예외를 흥미롭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규칙을 어긴 범법자로 보는 학생은 대부분 학업 성취도가 낮다. 낯선 문화를 대할 때 수용하려는 마음가짐으로 대하는 것과 칼을 들며 문제점에 저항하겠다는 태도로 다가가는 것은 분명 다르다.
게다가 예외에는 딱히 규칙도 없는데-물론 있는 것도 있지만- 예외 안에서 규칙을 찾으려고 분석하기도 한다. 분석이 필요한 시점도 있지만 대부분의 예외 문법은 그저 받아들이는 자세가 더 중요한데 말이다.
예외적인 상황이 발생했을 때, 그 상황을 어쩌다 일어난 해프닝으로 가볍게 넘기고 마는 것,
예외를 부당하다고 느끼지 않고 그저 옷에서 튀어나온 실밥으로 여기는 것. 그런 가벼움이 필요해 보였다. 공부할 에너지를 지나친 분석으로 소모하고 있는 것이 안타까웠다.
분석한다고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세상엔 너무도 많다. 분석이라는 칼날보다 포용이라는 팔을 벌리는 게 더 나을 때도 꽤 잦다.
어느덧 내 나이도 중년의 정점에 이르게 되었다. 최근 들어 지나간 일들을 시기별로 되돌아보곤 한다. 현시점에서는 보이지 않던 전체적인 구도가 시간이 좀 흐른 뒤 바라보면 객관적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현재에서 과거로 전환되면서 나를 둘러싼 상황들이 '1인칭 시점'에서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전환되는 묘한 변화를 느낄 수 있고 그 덕분에 놓쳤던 내 문제점을 발견할 수 있다.
'시간'이라는 자체가 주는 배움이라고 생각한다.
몇 해 전 프리랜서로 교육에 관한 글을 쓸 때 일이다. 회사 측에서 갑자기 발행 일정을 바꾸거나 내가 쓴 원고의 일부 내용을 마감 직전에 변경하기를 요구하는 등의 일이 있었다. 그런 일은 내게 불편함을 넘어서 무례하게 느껴졌다.
그 당시 난 축적된 내 경험에서 나온 나만의 규칙을 세우고 있었다. 그 규칙에 어긋난 상대방의 태도를 가차 없이 판단하며 평가하는 버릇이 굳어져 있었다. 약속을 너무 쉽게 어기는 일은 내 규칙에 따르면 상대방을 존중하지 않는 일이었다. 이런 일이 몇 차례 일어나고 나서 난 마치 교통 위반하는 차량의 딱지를 떼려고 벼르고 있던 경찰처럼 곤두서 있었다. "또 한 번만 고치라고 해봐!"
그 회사 특성상 마감 직전, 원고의 배열과 내용을 뒤집기도 하는 일은 종종 있는 일이었지만 나로서는 납득할 수 없었다. 항의도 해보았지만 그들에겐 글을 쓰는 사람보다 출간물 자체가 더 중요할 뿐이었다. 갑자기 전체 출간물의 콘셉트에 맞게 조정된 글의 배열이나 내용 수정은 그들에게는 그저 하나의 '예외'적인 일일 뿐이었는데 난 그 '예외'를 '무례'로 받아들였다.
최근에 그 당시를 되돌아보니 한국말을 배우면서 문법 규칙에 갇혀 예외를 부당하게 여기던 외국인 학생의 모습과 내 모습이 거의 흡사하게 겹쳐져 있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왜 예외냐고 내 규칙의 틀을 벗어난 상황을 비난할 것이 아니라 그냥 그들의 행동 패턴을 하나의 예외로 외워두는 게 더 유용하고 매끄럽다. 외우고 나면 다음엔 미리 예견해 피하거나 대응할 수 있다. 그게 전부다.ㅡ물론 사회적 불의나 다수가 행하는 악습 이런 것에 순응하자는 이야기는 아니다.
내 인생의 경험치에서 세운 규칙은 분석과 판단의 잣대가 되지만 동시에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는 걸림돌이 되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이해의 폭은 좁아지고 '예외'로 넘겨버려야 할 개개인의 문제까지 내 규칙에 맞지 않는다고 비생산적으로 분노하게 됐다.
내가 쌓은 인생의 규칙을 타인에게 적용해야 할 때도 있고 아닐 때도 있다.
칼을 들이대야 할 때가 있는 가 하면 칼을 들이대면 안 되는 때도 있다.
칼로 잘라먹는 수박이 있고 껍질을 벗겨 먹는 바나나가 있고 그대로 먹어야 하는 자두가 있듯이
그냥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 타인이나 집단의 예외도 있다. 그대로 외워야 하는 문법적 예외가 있듯이 말이다.
오늘도 난 내 사고 회로 속에서 쓸데없는 추측과 분석, 그리고 판단의 연결고리를 끊는 연습을 한다. 내가 생각하는 규칙에서 어긋나는 상황에 대해 그저 '예외'일뿐이라고 넘겨버리는 연습을 한다. 쉽지는 않지만 해보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