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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무도 Jun 12. 2020

인내심과 용기 사이

인생엔 화이트가 없어서

고등학생들 시험 기간이다.


큰아이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생이 된 지 수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난 고등학생들을 보면 측은하다.


특히 시험기간 집 앞 고등학교에서 축 처진 어깨로 하교하는 학생들을 보고 있으면 불러다가 아이스크림이라도 사주고 싶다. -물론 이상한 아줌마로 보이기 싫어서 생각만으로 그친다-


이맘때가 되면 생각나는 일이 있다.

수년 전 큰아이 고등학생 때 학부모 시험감독을 했을 때 일이다.


시험 시작 전 교실에 들어가니  평소에 그리 말 안 듣던 그 나이 또래 아이들이 잔뜩 기가 죽어 있었다.  


시험 시작 10분 만에 포기하고 엎어져 자는 학생도 있었다.  그렇지만 그 학생이 자다 일어났을 때 얼굴을 보고 난 알 수 있었다.

잘 수밖에 없는 현실에 자신도 갑갑해 하고 있다는 것을.


시험 종로 4분 전,  한 학생이 시험감독을 불러 답안지 교체를 요구했다.

선생님은 지금 바꾸면 서술형 문제를 다 옮겨 적을 시간이 부족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학생은 알겠다고 하며 냉큼 교체할 답안지를 받아 들었다.


잠시 후, 그 듬직한 어깨에 어울리지 않는 떨림이 내게 전해졌다.

시험 종로  3분 전이 되자 학생 손은 바들바들 떨렸다.

내가 다가가서 대신 마킹해 주고 싶을 지경이었다.

2분 전, 그제야 서술형 답안을 쓰기 시작했다

뒤에서 보고 있던 난 주먹을 꽉 쥔 채  움찔움찔했다.


띠리리링

종은 울렸고 그 학생은 교체하기 전 서술형 답안의  80퍼센트 정도만을 옮겨 적은 채 제출해야만 했다.

난 그 학생이 울까 봐 응시하며 가슴을 졸이고 있었다.

그런데 낙담했던 학생의 얼굴은 의외로 금세  개운하면서도 당당한 기운으로 덮어졌다.


아마도 그 4분 전 내린 자신의 결단에 대한 만족감이었을지도 모른다. 긴박하고 위험 부담이 있었을지언정 답안지를 바꿔 쓴 용기.


그 후로 문득문득 그 순간이 내게도  다가온 것 같은 착각이 들 때가 있다.


인생의 주요 답안 중 몇 문항을  잘못 기입했다는 걸 인식했지만

답안지를 바꿔 다시 쓰기엔 애매한 상황.

뻔히 몇 군데 오답을 적은 걸 알게 됐지만

새 답안지로 바꿀 의욕도 용기도 부족한 시점,


물끄러미

정답과 오답이 혼재한 내 답안지를 바라본다.

인생을 이렇게 방치해도 되는 걸까??


아니다.

새 답안지로 교체해 정답으로 고쳐 쓴다고 해도

시간이 지나면 또다시 정답 사이에 오답이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정답은 시계처럼  변하니까.

조금 전의 정답은 열 시 오십 분이었다면

지금의 정답은 열 시 오십일 분이고

잠시 후의 정답은 열 두 시 오십 이 분일 테니까.


그런 핑계를 대며

멍하니 응시한다


그러다 다시 새 답안지를 받아 틀린 몇 문항을 고쳐 쓸 다짐을 한다.

언졘가는 시간이 지나 마지막 종이 울리겠지만

그때까지 오답 한번 보고  시계 한번 보며 이렇게 남은 시간을 때울 수는 없다.


이렇게 시계추처럼 왔다 갔다 하곤 한다.


살아 보니 내가 작성했더라도 정답만 있는 답안지는 없었다.

분명 답안지에 기입할 때는 정답들을 선택했지만

시간차를 두고 내 답안지를 보면

군데군데 오답으로 보이는 것들이 거슬리곤 했다.


대다수의 정답 사이에 숨겨진 오답을 고치려면


새 답안지를 꺼내 들고 처음부터 답안을 작성해야 한다.  

지난번 답안을  작성할 때 들였던 시간은 소멸되고  종료 전까지 남은 시간은 부족하다.


새 답안을 작성하다 말고 마침을 알리는 종이 울릴 위험부담도 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 답안지를 꺼낼 위험부담을 감수할 '용기'가  있을까.

아님 답안지 안의 대다수의 정답을 보고 위로하며

몇 개의 오답을 눈감아버릴 '인내심'이 필요한 것일까



내가 오답을 보고도 고치지 않고 견딜 만큼  인내심이 좋은 건지

새 답안지로 옮길  용기가 없는 건지 모르겠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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