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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무도 Jul 16. 2020

삶을 미룬다는 것

때로는 재생하기 위해 상처가 필요하다

언제부터인가 미장원에 가는 시기가 돌아오는 게 달갑지 않다. 미장원 의자에 앉으면 내 앞에 마주한 거울을 불가항력적으로 보고 있어야만 한다. 보고 싶지 않지만 피할 수 없다. 거울 속 나와 눈을 마주하는 순간, 낯선 사람을 보는 것보다 더 어색해 시선을 돌리게 된다.


중년의 나이에 미용실에 가서 거울을 마주한다는 건 매달 찾아오는 카드 명세서를 보는 것 같다. 둘 다 별로 보고 싶지 않지만 봐야 한다. 보고 나면 '사실'과 '인정' 사이에 있는 건널 수 없는 강을 마주하게 된다.


거울 속 얼굴은 분명 내 얼굴인데 내 얼굴이 아닌 것 같고 낯설다. 카드 명세서는 분명 내가 쓴 것일 텐데 사용한 기억은 희미하고 그 총액은 의심스러울 뿐이다. 실제로 카드회사에 전화해 상세내역을 물어본 적도 있다. 차마 내가 쓴 게 아닌 것 같다고는 말하지 못했다. 다행히 미장원에 앉아서 거울 속 "저 사람이 누구냐?"라고 물은 적은 없다.


그렇게 미루고 미루던 머리를 자르고 나서 큰 결심을 했다. 더 이상 거울 속 나를 외면하지 않을 대책을 세우기로 했다. 요즘 TV를 켜면 나오는 광고가 있다. 탄력 있는 피부의 여배우가 피부 미용기기를 사용하는 광고다. 그 기기를 사면 그 여배우가 될 수 있단 헛된 믿음 따위는 없다. 다만 거울 속 나와 화해하고 싶었다. 적어도 외면하지는 않고 웃으며 바라보고 싶었다.  


 매장에 들어서니 그 피부미용기기를 구경하고 있는 중년 여성들이 두세 명 있었다.

 “이걸 쓰면 피부가 탄력을 되찾는다고요?”

그들도 나처럼 그 기기의 기능을 못 믿으면서도 믿고 싶은 눈치였다. 의심 가득한 눈으로 그미용기를 만지면서 선뜻 손을 떼지 못했다.

                                        

그 광고 속 모델이 쓰고 나오는 가면은 피부를 탄력 있게 만들어 주는 기능을 한다고 한다. 실제로 보니 가면을 쓰면 아이언 맨이 되는 것 같아 거부감이 들었다. 돌아서 나오려는 데 그 옆에 자리한 한 손에 들 만만 작은 피부 탄력 기기가 눈에 들어왔다. 고주파기라는 건데 처음 들어보는 거라 생소해 직원한테 이것저것 물어봤다. 민감성 피부로 고생하고 있어서 부작용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직원의 설명을 듣고 있다가 유난히 마음을 흔드는 대목이 있었다.

 “이 기기는 일주일에 한 번만 사용하는 거예요. 피부 진피 층에 상처를 내서 회복하면서 피부가 재생되는 원리인데 그 회복되는 과정을 기다려야 하거든요.”


중년 여성의 피부, 그대로 두면 노화의 길로 접어드는 길밖에 없다. 그 피부를 재생시키는 방법으로 ‘상처’를 내는 선택을 한다는 게 특이했다. 보통 상처가 나면 흉터가 진다고 생각하곤 했는데 사실은 상처가 나서 아무는 과정에서 새살이 돋아나고 재생되는 것이었다니! 상처의 또 다른 측면을 보고 나니 여러 생각이 들었다.


언제부턴가 상처는 내게 상처 이상이었다. 노화가 시작된 피부는 한번 상처가 나면 흉터로 이어지곤 했다. 작은 뾰루지 하나 났다가도 흉터로 남곤 했다. 그런 경험이 쌓여 상처를 현재의 상처로만 보지 못하고 미래의 흉터로 보기 때문에 두려움이 더 커졌다. 상처는 분명 나을 수도 있고 흉터질 수도 있는데 내 마음속 흉터에 대한 두려움이 상처를 흉터의 전 단계로만 보게 만들었다.


상처가 잘 아물지 않는 건 피부뿐만이 아니었다. 친구 사이에서든 가족 사이에서든 관계에서 한번 상처 받으면 쉽게 회복되지 않았다. 다시 상처 받지 않으려고 문을 닫거나 아예 거리를 두곤 했다. 마치 운전할 때처럼 사람을 대할 때 안전거리를 확보하려고 애썼다. 거리를 두고 다가오지 못하게 벽을 쌓거나 문을 닫는 방식을 선택했다.


하고 싶은 일이 생길 때에도 그 일이 잘 안될 경우의 수를 늘어놓곤 했다 그 경우의 수를 확장해 최악의 결과도 미리 예측했다. 그리고는 최악의 경우보다는 시작조차 하지 않는 것을 안전하다고 여기며 지냈다. 마치 투자를 해서 돈을 잃는 것보다는 옷장 서랍에 안전하게 넣어두는 게 낫다는 생각으로 어떤 시도도 하지 않는 나를 합리화했다.


언뜻 보면 아주 치밀한 계획과 사전 점검까지 한 것 같다. 그 과정에서 아주 열심히 고민하는 것 같지만 결과적으로는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인 적이 없었다.  난 하고 싶은 일이 있을 때마다 열심히 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찾으며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은 셈이다.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신나게 뛰어노는 아이들 옆에서 웅크리고 앉아있는 아이 같았다. 뛰다가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 뛰는 아이를 보며 넘어지지 않을까 걱정만 하고 있는 아이.  넘어지지는 않았지만 뛰어놀지도 못한 아이.


내 행동반경은 점점 축소돼 갔다. 그 안에서 쳇바퀴처럼 하루하루를 살았다. 나름 충실하게 생활했지만 새로운 시도가 없는 하루하루들을 모아놓고 보니 그저 같은 날이었다. 연말이 돼 그 해를 되돌아보면 떠오르는 장면들이 있는데 근래에는 그 장면들이 단조로웠다. 어제 같은 그제, 그제 같은 한 달 전, 그렇게 동일한 패턴으로 생활한 세월은 단 한 장면으로 압축돼 상기되곤 했다. 물론 위험부담이 없었으니 상처가 나지 않았고 상처가 나지 않았으니 흉터도 지지 않았다. 그렇지만 상처로 인해 재생된 것도 없는 셈이었다.


거울 속 내 얼굴이 기억 속 내 얼굴과 달리 낯설게 느껴지는 건  탄력 없이 늘어진 피부 때문이 아니라 도전을 두려워하는 웅크린 표정과 사라진 생기 때문이었다. 상처를 피해 시도조차 하지 않았기 때문에 재생할 기회를 놓치고 생기를 잃어갔던 것이다.


산다는 것은 다양한 시도로 여러 경험을 하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시도조차 하지 않고 웅크리고 있었던 내 지난 몇 년은 사는 게 아닌 삶을 미루는 행위였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어제와 같은 오늘은 삶의 확장이 아닌 반복일 뿐이고 경험의 측면에서 보면 무(無)에 가까운 삶이었다. 


이제부터 상처를 두려워 하지 않고 여러 시도를 해 보기로 결심했다. 상처는 받을 수 있겠지만 내 마음에 흉터는 남기지 않겠다. 


미용기를 구입하지 않고 매장을 나서는 발걸음이 가볍게 느껴졌다.

'탄력'은 잃어도 '생기'는 넘치는 중년이 돼야겠다.



                                                                                                               

         사진  비 온 뒤 청명하게 갠 2017년 7월의 어느날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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