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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소운 Jul 21. 2020

'지랄' 10% 지금 써도 될까요?

어쨌든, 지랄 총량을 써야 한다면...쓰고 살자

'지랄 총량의 법칙'이라는 것이 있다.


 법칙이나 규칙처럼 뭔가를 규정하고 한정 짓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성격이지만 내가 정말 좋아하는, 요즘 말로 하자면 최애 하는 법칙이다. 이 법칙은 '질량 보존의 법칙*’과 많은 유사성을 가지고 있는, 같은 항렬(行列)에 속한다.

‘지랄 총량의 법칙’은 사람이 살면서 평생 해야 할 '지랄'의 총량이 정해져 있다는 것인데 죽기 전까지는 언제, 어떻게 쓰든 반드시 이 양을 다 쓴다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모두, 공평하고도 변칙 없이 '지랄'의 총량이 정해져 있다는 전제가 우선 마음에 든다.

또한 누구에게나 지랄에 총량이 있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언제 어떻게든 지랄을 떨고 산다는 얘기다. 나만 지랄을 떨고 살았던 것은 아니라는 일종의 위안이 되는 부분이다. 나의 지랄에 대한 합리화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아주 훌륭하다’에, 별점 다섯 개를 주고도 아깝지가 않다.




 이 법칙의 정의는 <불편해도 괜찮아>(국가인권위원회 기획, 김두식 지음, 창비출판사)라는 책에 나오는 말이다. 저자의 딸은 중학교 1학년 5월의 어느 날, “엄마 아빠 같은 찌질이로 살지 않겠다"라고 선언했다고 한다. 그 이후부터 부모의 모든 권위는 무시되었고 딸과 사사건건 충돌하였는데, 도무지 그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어 답답한 마음으로 희망제작소 유시주 선생님께 고민을 털어놓았는데,

"모든 인간에게는 평생 쓰고 죽어야 하는 '지랄'의 총량이 정해져 있는데 어떤 사람은 그 지랄을 사춘기에 다 떨고, 어떤 사람은 나중에 늦바람이 나기도 하지만 어쨌든 죽기 전까지 반드시 그 양을 다 쓰게 되어 있다"라는 대답을 들었다고 한다.

청소년, 성소수자, 여성, 장애인, 노동자 등의 인권문제를 다루고 있다.

 지랄 총량의 법칙에 따라  그나마 중2 때 지랄을 떨지 않으면 그 보다 더 중요한 시기일 수도 있는 고등학교, 대학교 때 어떤 방식으로든 지랄을 떠는 일이 생길 수 있기 때문에 지랄을 떠는 중2의 시기를 부모가 이해하는 편이 그래도 낫다는 위안의 의미가 담겨 있다.

  지랄 총량의 법칙을 이해한 저자는, 원래 ‘지랄’ 같은 단어는 입에 올리지도 않고 살아왔는데 그 모습이야말로 딸이 말하던 ‘찌질이’ 같아 이후로는 지랄을 달고 살았다고 한다.



 

 ‘지랄'이라는 말을 습관처럼 달고 살기로는 경상도 사람이 으뜸이다. 나 역시 부산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기에 지금도 “앗! 지랄” 혹은 “지랄하네” 정도의 말을 가끔 쓴다. 그런데 이 말은 ‘뭐라는 거야?’ ‘어쩌라고?’ ‘웃기는 소리 하고 있네!’ ‘ What?’... 등의 뜻을 내포하고 있다. ‘지랄계의 귀요미’쯤 되는 말이다.


 윗 대로 올라가면 지랄로만 그치지 않는다. 가히 살인적이라 할 수 있는데, 고등학교 1학년 담임선생님은 국어과 담당이었는데도 이 지랄이란 말을 달고 사셨다. 그것도 학교 복도가 쩌렁쩌렁 울리도록.

"지랄하네" "지랄 염병하네" "지랄 염병하고 자빠졌네" "지랄도 풍년이다" “쎄** 빠질 년” “쎄가 만발이나 빠질 년들"...

어찌나 욕을 찰방 지고도 대차게 하셨는지 그 시원시원함이 부럽기까지 했다.

'나도 저렇게 감칠맛 나게 욕을 하고 싶은데 언제쯤 할 수 있을까?’ 흠모하기까지 했던 것이다.

그런데 맛있는 것도 먹어 본 사람이 먹는다고 부산 토박이가 아닌 데다 부모님들이 모두 경기도, 강원도 분들이라 집안에서 조차 이런 말들을 쓰지 않으니 아무리 격한 상황에서도 이런 말이 쉬이 나오질 않았다.

술을 좀 먹고라면 할 수 있겠다 싶어 술을 진탕 마시고 나도 나오는 말은 겨우 “지랄하네!’가 고작이었다. 욕하고 살 팔자는 아닌가 보다 했다.


2011년 SBS에서 방영되었던 <뿌리 깊은 나무>에서 세종대왕(한석규)은 성질 급한 욕쟁이로 묘사돼 있다.

 욕에 대해 말할 때 빼먹으면 섭섭할 사람이 있는데, 바로 세종대왕이다. 오래전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에서 세종의 괴팍한 언어습관에 대한 언급이 있었는데 지랄, 젠장, 우라질 3종 세트를 아주 유용하게 잘 사용하셨다. 성격까지 급하고 고기가 없으면 수라를 들지 않을 정도로 ‘육식파’ 셨으니 그것으로 인한 성정을 추측해 보건대, 3종 세트의 욕 이외에도 다른 육두문자를 쓰셨을 거라 짐작이 가는 대목이다. 게다가 한글을 창제하신 분이 아니신가? 욕도 창의적으로 쓰시지 않으셨을까?


그런데 사실 지랄, 젠장, 우라질은 엄연한
의미의 욕에 속하지 않는다.
자신에게 향하는 일종의 자책 섞인 말이고 푸념 담긴 넋두리다.
타인을 향한 날카로운 칼을 숨기고 있는
말들이 아니라 애교로 보는 게 맞다.




 경상도 사람들도 쓰고, 딸아이에게 찌질이 소리 들은 김두식 교수도 쓰고, 김영찬 국어 선생님도 쓰셨고, 성군이라 칭송받는 세종대왕도 쓰셨던 그 ‘지랄’ 말이다.


 그 지랄에 총량이 있다고 하고, 그 총량을 평생 동안 어쨌든 써야 한다면,

내가 죽을 때까지 쓸 수 있는 지랄의 양은 얼마나 남은 것인가? 심각하게 가늠 중이다.

제법 지랄을 하고 살아서 많은 양이 남아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지금, 10%쯤 써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더 나이 들어서 지랄하는 것도 힘이 들겠지만 무엇보다 추해 보일까 봐 지금 쓰는 게 여러모로 유리할 듯한 것이다.


 더구나...

모든 것의 중심은 나다, 내 생각대로 되어야 한다, 내가 정한 것이 법이요 규칙이다, 나 건드리지 마라, 이건 또 뭐야? 귀찮다, 졸라 열 받아 죽겠네, 알았으니 그만해라...  이 모든 것들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는, 그래서 ‘중2 때 쓰는 지랄이 그나마 낫다잖아요?’라고 말하듯 거침없이 마구 지랄하고 있는 우리 집 아들 앞에서, 잊을만하면 한 번씩 존재감 드러내며 간헐적 지랄을 하는 딸 앞에서, ‘지랄도 병인 양 하여 잠 못 들어 하노라’의 시적 화자들도 계시니... 연금보험 들어 놓듯 쌓여 있는 그 ‘지랄’ 중에서


10%, 지금 내가 좀 쓰면 안 될까?


 모처럼 지랄도 풍년이라고, 마음 놓고 썼더니 오래된 체증이 내려가는 기분이다.

오늘은 좋은 날일 것 같다.




*) 질량 보존의 법칙: 화학반응이 일어나기 전과 후에 물질의 모든 질량은 항상 일정하다는 원칙. 1774년에 라부아지에가 확인하였으며 근대 과학의 기초가 되었다.

**) 쎄: ‘혀’의 경상도 사투리.


첨언하자면...

‘지랄’의 사전적의미는...마구 법석을 떨며 분별없이 하는 행동을 속되게 이르는 말. 찌랄: 명사. ‘지랄’의 경상도 방언(네이버 국어사전 출처).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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