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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소운 Jul 03. 2020

읽생말쓰, 한다는 것 *

좌절하지 않으면 두려울 것이 없다.

  서울 나들이를 하는 날에는 마음이 설렌다. 한 시간 전부터 넓을 것 없는 집안 여기저기를 왔다 갔다 한다. 서울 살 때는 몰랐던 일인데 경기권으로 이사를 온 이후에 서울 가는 길이 수월치 않다는 걸 알게 되었다.  

서울 어디를 가느냐에 따라 지하철을 타야 할지 버스를 타야 할지를 정한다. 가는 시간 동안 눈을 붙일 것이냐 책을 읽을 것이냐에 따라 챙겨야 하는 물건도 달라진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휴지, 물, 손수건, 볼펜 등도 가방에 넣어야 한다. 깔끔하게 뭔가를 정리하고 챙기는 편이 아님에도 서울 가는 일은 준비과정부터 여행에 준하는 고 노동을 요구한다.


  그러나 만나기로 한 사람에 대한 간절함과 가야 할 곳에 대한 기대감이 나를 즐겁게 한다.


   오늘은 지하철을 타기로 했다.

그렇다면 오랜 습관처럼 책을 읽어야지, 가방에 책을 한 권 찔러 넣는다. 종•이•책이다.

종이책이라니, 참으로 낯선 단어다. 책은 다 종이로 만든 책이지 다른 책도 있나?라고 생각하는 나 같은 사람에게 ‘종이책’ 은 외래어도 아닌 외국어다.

오디오북 전자책 등과 구분되는 의미겠지만 영 입에 붙지 않아 거북하고 어색하다.


  시원한 지하철 안, 사람들은 페이지를 복사해 붙여놓은 것처럼 동일한 자세로 핸드폰에 몰두하고 있다. 마치 그 속으로 들어갈 듯 진지하게 각자의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는 것 역시 ‘종이책’이라는 단어만큼 낯설다. 비대면 인간관계와 혼자서 한 공간에서 모든 것을 처리하는 세상이 곧 도래할 것 같은 불안함에 갑자기 한기가 느껴졌다.


  사람들이 저마다의 세상에서 유영하듯 나 역시 책 속을 헤엄친다. 책을 펼치고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구나, 상그러운** 생각에 책을 접을까도 했지만 굳세어라 금순이지, 독야청청하리라, 글을 읽는다.

얼마를 읽었을까?  짜증이 나기 시작한다.

요즘 핫하다는 몇몇 작가가 쓴 글을 모은 책이라 작가나 글 내용이 내 취향에 따라 호불호가 나뉠 수밖에 없지만 참 성의 없이 글을 쓰는구나 싶었다.

구입한 책이 아니라 그나마 다행이다.

등단작가도 출간 작가도 아니면서 너나 잘하세요! 한다면 뭐 할 말 없지만 가끔 매너리즘에 빠진 작가의 글을 읽거나 말재간으로 얼버무려진 무의미한 글을 만나면 처치 곤란이라 난감하다.

  내 친구는 쓰레기통을 찾는다고 했다.




 그만큼 글쓰기는 어렵다. 글로 밥 먹고 돈 받고 하는 작가도 이럴진대, 나 역시 오랜만에 큰 맘먹고 도전하는 글쓰기라 어렵고 난감하다.

 그럴 때면 나는, 글 쓰는 이의 마음 가짐과 글이 주는 기쁨과 평온을 배웠던 초등학교 6학년 시절로 달려간다.


 책 읽고 글쓰기를 좋아하셨던 선생님은 학년 초에 각자의 이름이 쓰인 원고지 30장 정도를 실끈으로 묶은 개인문집을 나누어 주셨다.

그리고 일주일에 한 편의 시나 글을 써오도록 주제를 정해 주셨다. 교과 숙제는 많지 않은 편이었으나 일기와 개인문집 검사는 철저하셨다.

글쓰기 숙제한 것을 내는 날 아침이면 선생님 책상 위로 60권이 넘는 검은색 표지의 문집이 하나 둘 삐뚤빼뚤 쌓였고 쉬는 시간 짬짬이 문집을 읽고 첨삭을 정성스럽게 해 주셨다.

 잘못 썼다고 지적하는 첨삭이 아닌 올바른 원고지 사용법부터 철자법, 고운 우리말 사용, 다양한 표현법, 정확한 어휘 사용 등 더 잘 쓰라는 조언이었다.

이렇게 저렇게 쓰는 것이 좋고

주장에 대한 근거와 자료를 여기에 넣고

이것과 이것의 순서를 바꾸는 것이 낫고...

요즘 논술학원에서 자행되는 난도질의 첨삭이 아니었다.

우리를 색깔과 결이 다른 시인으로
인정해 주셨던 것 같았다.
조심스럽고도 배려 깊은 첨삭이었다.


 그리고 종례시간에는 말씀 대신 그 날 가장 잘 써진 시 두세 편을 뽑아 본인이 직접 낭독하게 하셨다.

어떤 부분을 정말 잘 표현했노라 칭찬 한마디도 빠뜨리지 않으셨다. 그 날 뽑힌 친구들의 게시판 이름 옆에는 스티커가 하나씩이 추가되었는데 매번 다른 친구의 작품이 낭독되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저게 무슨 시라고, 시 같지도 않은 걸 ‘오늘의 특선 시’로 뽑으시다니 너무 하신 거 아냐?

내 마음이 투덜대고 있는 것을 알기라고 하듯 선생님은

누구라도 진심과 진정을 다해 글을 쓰면
그게 바로 좋은 글이다


라고 말씀하시곤 했다.




 이렇게 1년이 끝나갈 무렵, 우리는 그동안 써 온 시로 학급 시화전을 하기로 했다. 각자가 가장 장 썼다고 생각하는 시를 정하고 4절 크기의 종이에 시와 그림을 쓰고 그려 교실 내 전시하기로 한 것이다.

글씨체가 예쁘고 그림을 잘 그리는 몇몇은 친구들의 도우미를 자처하며 방과 후에 남아 작품 완성을 도왔다. 나는 선생님의 시화 판넬까지 맡게 되어 며칠을 쓰고 그리기를 해야 했다.

그림이 완성되면 선생님은 판넬에 일일이 못질을 하고 그림을 고정시켰다.

누가 시켜서 한 일이 아니라 선생님과 반 친구들이 자발적으로 여는 시화전이었던 만큼 서로 도우며 만들어 낸 판넬을 보며 얼마나 뿌듯해했는지 모른다.


우리 모두는 처녀작(處女作) 전시회를 앞둔 작가들처럼 들떠 있었다.


 그날은 하얀 눈이 내렸다.

시화전을 열기로 한 바로, 그 날 말이다.

부산에서 눈이 내려 쌓이는 날을 만난다는 건 거짓말 조금 보태 3천 년 만에 한번 피는 꽃, 우담바라를 마주하는 것과 같다고 해도 과언은 아닌데 거짓말처럼 눈이 내린 것이다.

우리는 아침부터 창밖을 보며 계속 감탄사만 뱉어냈고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하고 엉덩이만 들썩댔다.

눈 내린 도로 위가 오도 가도 못한 차들로 주차장이 되었건 말건, 시화전에 교장선생님을 비롯한 다른 반 선생님과 학생들이 장사진을 치든 말든, 우리는 눈 오는 날을 온몸으로 느끼고 싶었던 것이다.


가자, 뒷 산 언덕으로
오라, 찬 공기를 가르며


 

눈오는 날의 시화전. 선생님이 쓰신 시 제목도 ‘눈 내리는 날’. 글씨와 그림은 내가 그려드렸다.

 우리는 시화판넬을 들고 뒷산을 올랐다.

전시 공간을 교실에서 뒷산으로 바꾼 것이다.

일부는 판넬을 나뭇가지에 걸고 일부는 큰 나무 아래 기대 앉혀 놓고 장갑도 끼지 않은 언 손을 호호 불어가며 눈싸움도 하고 눈사람도 만들었다.

눈 오는 날, 오후, 산속 시화전에는,

바람이, 나무가, 눈사람이

우리의 시를 읽어주고 있었다.

내 생에 최고의 시화전이었다.

 


 

 그때는 어려서 미쳐 알지 못했지만 선생님은 작가가 꿈이셨던 것 같다. 책을 읽고 쓰는 것을 좋아하셨고 글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즐기셨다.

함께 백일장이나 문예대회에 나가 수상을 한 적도 있었고 내 글들을 나도 몰래 출판사에 보내기도 하셔서 잡지나 책이 배달돼 오기도 했다.

또 나를 비롯해 한두 명의 친구들을 방과 후에 남게 해서 함께 책을 읽고 글을 쓰도록 하셨는데 수업시간에 비해 매우 강도 높은 글쓰기 수업이었다.

  

 독후감을 쓰거나 일상 이야기 등 산문의 글을 쓰면 필요 없는 단어들을 최대한 삭제해 보라고 하셨고,

시나 시조 등 운문의 글을 쓰면

다양한 단어와 설명, 상황을 덧붙여 긴 글을 만들어 보라고 하셨다.

많은 단어를 삭제했음에도 뜻이 통하는 게 신기했고, 짧은 생각과 하나의 은유가 단초(端初)가 되어 시나리오가 되고 소설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짐작했다.

글 쓰는 시간이 너무 좋았고 글 쓰는 작업을 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 꿈은 오랫동안 내 마음속에서 자라서 언론사 시험도 치게 했고 신춘문예에도 도전하게 했지만 매번 떨어졌고 문단에 등단하지도 못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직업으로 글 쓰는 일을 했고 소소하게 글을 읽고 써왔기에 갈증은 없었다. 거듭되는 실패가 기분 좋은 것은 아니었지만 괴로워하거나 좌절하지 않았다. 나는 안되나 보다 내팽개친 적도 있었지만 다시 글을 쓰게 되면 오랜 친구를 만난 듯 편한 느낌이 들었다.

 선생님도 글로 성취할 목표가 있으셨던 것 같았지만 생각대로 되지 않아도 항상 읽고 생각하고 말하고 쓰셨다.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으셨다.


 아직도 잘 못하고, 모르는 일이지만 글을 쓴다는 것에는 좌절이란 단어는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좌절하지 않으니 두려울 일도 없다.
읽고 생각하고 말하고 다듬어 쓴다는 것.
그것으로 족하다.
더 바랄 게 없다.



*) 읽생말쓰; 읽고 생각하고 말하고 쓰다

**) 상그럽다; 불편하다 또는 차갑다 라는 뜻이 있는 경상도 사투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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