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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소운 Jul 12. 2020

반찬가게 이름 공모전

밥상 대첩에서 장렬히 전사하다

  퍽도 아름다운 이름을 가진 ‘풀잎’을 풀잎~하고 부르면 입에서 휘파람 소리가 난다는 <풀잎> 詩처럼,

반찬~ 반찬~ 맛있는 반찬~ 노래를 부르면 무슨 소리가 나려나? 개구리 반찬? 왕후의 밥 걸인의 찬? 도시락 반찬? 찬찬찬...


 반찬가게 이름을 공모합니다!

 조용한 호수에 톡~ 하고 던져진 돌 때문에 내 머릿속에서는 심상치 않은, 야릇한 일렁임이 감지됐다.

여러 해 돌리지 않고 방치되었던 낡은 기계를 꺼내 예전과 같은 동작과 속도를 기대하는 건 애초부터 무리였을까? 머리만 쿵쿵 짓찧고 있었다.

이름마저 거창한, 반찬 가게 이름 공모전 때문이다.


 친구가 내준 숙제를 제출해야 하는데, 마음은 자꾸 초조해만 지고

하루 종일 반찬, 반찬가게, 이름, 이름 되뇌다 ‘밥이 떠오르는 연상작용’으로 인해 밥만 많이 먹는 불상사가 벌어졌다.

 반찬가게 반찬가게 ‘ㅊ’ 소리가 이 사이로 빠지는 바람소리라 부드러운 느낌이 나지 않고 차가운 소리가 난다. 쳇! 흥칫뿡! 하고 혀 차는 소리, 내뱉는 소리가 나서 자꾸 누구에겐가 뻥뻥 차이는 느낌도 강하고...

 반찬 가게 이름, 뭐가 좋을까? 생각하다 하루가 속절없이 지나가 버렸다.


 ‘바쁜 중에 반찬가게 이름 하나 고민하고 던져주이소. 언니가 사정이 생겨 여기 양산으로 오면서 반찬가게 오픈 준비 .
되도록 ㅅㅈㅊㅁㅂㅍ 자음이 들어가면 좋다네 
ㅡㅡ반찬으로 하면   같은데
ㅡㅡ를 뭐로 하면 좋겠노 
언니가 문학도인 니한테 물어보란다


 친구의 톡은 이렇게 왔었다.

이름을 공모하는 주최 측의 문구 치고는 사사로이 무심한 듯한데 받아들이는 입장에서는 여간 고민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사정이 생겨’라는 말이 생선가시 목에 걸린 듯 껄끄럽게 자꾸 마음이 쓰였다.

무슨 일이 있는 걸까?

잘 사는 줄 알았는데, 잘 살아야 하는데...

생선 가시는 빠지지 않고 물 찾아 냉장고 앞에 선 내 마음이 아리다.



언니의 반찬가게 이름은 ‘반찬가게’였다.

 언니는 아주 오래전에도 반찬가게를 한 적이 있었다. 언니도 나도 결혼하기 전이었는데 어찌 그리도 험하고 힘든 일을 하려고 생각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동업자도 없이, 주방 보조도 없이.

친구가 새벽 청과물시장에서 장 본 물건을 가게에 부려놓으면 언니 혼자 하루 종일 음식을 만들고 판매까지 해야 했다. 젓갈이나 장아찌 종류는 가져와서 판다 해도 국이나 찌개, 나물 밑반찬 전 김치 정도는 그날그날 주인이 해야 손님들의 신뢰를 얻을 수 있는 만큼 지지고 볶아대는 일이 그야말로 전쟁이었다.

 

 나는 퇴근 후, 자주 언니네 반찬가게에 들러 포장이나 판매를 좀 거들어드렸는데 진짜 이유는 갓김치를 사기 위함이었다. 누가 여수사람 아니랄까 봐 여수에서 공수해 온 줄기 시퍼런 갓에 갈치속젓으로 담근 갓김치는 가부좌 틀고 수행하던 스님도 정신 못 챙기고 벌떡 일어설 정도의 맛이었다.

그야말로 Oh my God김치!!다.

‘불도장’이라는 음식 이름도 불가의 스님이 담장을 뛰어넘어가서 먹은 음식이라 하여 붙여졌듯, 그 맛이 어떤지는 모르지만 아마 갓김치와 쌍벽을 이루지 않을까 싶다.

 

 근처에서 피아노 학원을 하던 친구도 학원 수업을 마치고 언니네 가게로 오면 그제야 세 여자의 늦은 만찬은 시작되었다. 하루를 정신없이 살아내느라 넋이 나갈 대로 나간 우리는 커다란 양푼에 남은 반찬을 때려 넣는 의식을 거행함으로써 나갔던 정신을 차렸고 먹고 마시고 웃고 떠들며 그날을 단도리했다.

 ‘한참이나 늦은 나이에 10살이나 많은 애 둘 딸린 홀아비와의 결혼’이 주는 사회의 통념과 내적 갈등에서 비롯한 언니의 반찬가게는 고통을 고통으로 이기고 누르려는 일종의 시험대였고 고행이었다.

그래서일까?

언니네 반찬가게 이름은 그냥 ‘반찬가게’였다.




‘의리’라는 이름을 내걸고 반찬가게 이름을 짓다

 그 ‘반찬가게’ 주인이었던 언니가, 결혼 후 광주에서 한식당을 하며 산다는 언니가, 20년이 훨씬 지난 어느 날, 사정이 생겨 양산으로 와 차리는 반찬가게란다.

 그때 먹었던 양푼 비빔밥 값을 치를 때가 되었다.

나는 신세 지고는 못 사는 깔끔한 성격이다.

김보성 씨만큼 ‘한 의리’ 하는 사람이다.


 사실 마음 같아서는 ‘의리! 반찬가게’, 이런 걸 제시하고 싶었다. 내 가게라면 이렇게 했을 것이다.

맛있고 정직한 반찬을 만들어 제공할 것이며 믿고 우리 가게에서 반찬을 사드시는 만큼 신뢰를 결코 져버리지 않겠습니다, 의리!!... 얼마나 좋아?


  녹슨 칼이 돼버린 펜을 들어 메모를 시작한다.

•반찬가게 위치는 양산

•상권 파악 : 주변의 입지, 아파트 단지, 주변 인구수, 유동인구, 인근 동종업체 분석

•타깃 : 30대~40대 여성(주), 20~30대 미혼 남녀

•소구점(수요자에게 호소하는 부분이나 측면) : 감성적, 자연친화적, 모던한, 공감각적...

그런데 이런 건 현장조사가 필수고 이미 감안해서 가게는 계약을 했을터, 필요가 없지. 그래도 그냥 긁적여 본다. 연령대의 분포, 지역특색에 따라 네이밍이 세련으로 갈 건지, 구수함으로 갈 건지  등등 방향을 정하는 포인트가 될 수 있으니까.


 기획사 카피라이터 시절에도 네이밍 관련 제안이 많이 들어왔었다. 회사 이름부터 브랜드 이름, 백화점, 아파트, 건물, 상점 이름 같은 것 말이다. 네이밍 작업 시 우선되는 것이 시장조사와 소비자요구 파악 및 소구점 찾기 등이었기에 그 작업이 먼저 떠오른 것이었지만 이번에는 쉽게 가도 되는 일이다.


  호미를 사용해야 되는 일에 불도저를 들이댈 필요는 없다. 약간의 언어의 유희가 필요한 일에 박사논문 초안 잡듯 비장했으니 오랜만의 일에 쫄긴 쫄았나 보다 생각한다.


 생각나는 대로 또 적어본다.

아차차! ㅅㅈㅊㅁㅂㅍ!!! 의뢰인의 요구사항, 엄청 중요하다. 특히 이런 공모에는 밑줄 쫙~

이미 있다 : 장독대, 밥도둑, 사계절 밥상, 내 이름은 반찬

부엌과 주방 관련 : 그녀의 식탁, 맛있는 주방, 엄마의 곳간, 행복한 식탁

‘반찬’이 들어간 이름 : 감동 반찬, 반찬 보감, 그 집 반찬, 착한 반찬가게, 반찬의 성지, 반찬을 담다

지역, 이름이 들어감 : 전라도 찬방, 옥이네 반찬가게, 엄마손 반찬

밑도 끝도 없는 이름 : 쏙담다담(마음에 쏙 드는 반찬을 담다 보니 다 담았네), 이찬저찬(이 반찬, 저 반찬)

숙고의 시간을 거쳐 친구에게 톡을 보냈다.

세 가지 이름 투척합니다. 아무쪼록 언니의 반찬가게 대박 나시길 바랍니다. 옛날 언니가 해준 나물비빔밥 맛이 그리워지는 새벽이네.
1. 그녀의 식탁 2. 반찬을 담다 3. 그 집 반찬

  



나의 공모 참여 사실을 알리지 말라

 일주일쯤이 지난 어느 날, 친구는 사진 한 장을 보내왔다. 반찬가게를 드디어 오픈했다고 한다.

잘된 일이다. 그런데, 이름이...

 ‘밥상 대첩’, 이순신 장군의 명량대첩도 아니고 이번 반찬가게 이름 공모에서 ‘너 탈락하셨습니다’라는 무언의 알림이었다.

이름 공모를 한 주최 측 혹은 이벤트 담당자의 간택을 받지 못한 것은 주최 측의 감성과 의중을 꿰뚫지 못함에 있다. 주최 측의 농간은 없었겠지?


 반찬가게 이름 공모전에서 나는 보기 좋게 떨어졌다. 나는 좌절했고 다시 도전하고자 하는 데 있어 두려움을 갖게 되었다. 난 소심한 사람이다.

나의 공모전 참여 사실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


 나는 이번 밥상 대첩에서 장렬하게 전사하고 말았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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