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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소운 Sep 01. 2022

당면의 전성시대

<그 시절 그 음식: 당면(唐麵)>

   어떤 것들은 눈으로 보고 인식의 단계를 미처 거치기도 전에 입에서 먼저 감탄사가 마중하게 하는 것들이 있다. 잠결에 후둑후둑 듣게 되는 빗소리는 '비가 오는구나.' 머리로 알게 되는 것이지만 하롱하롱 내리는 눈송이에는 "와~" 하는 탄성이 착실히 터져 나오는 것은 가슴이 반응한다는 것이다. 가슴이 먼저 날뛰게 되는 것은 분명 설렘을 동반하는 그 무엇이 존재한다는 뜻이다.


   모처럼 엄마가 소고기 불고기를 저녁 메뉴로 선정했다는 사실에  4형제는 낮부터 노골적으로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명절도 아니고 아빠의 월급날도 아니고 생일인 식구도 없는 날, 소불고기라니... 천지가 개벽할 일이었다. '엄마가 계 탄 날인가? 길에서 돈이라도 주은 걸까?...' 형제들은 시답잖은 생각을 하며 킥킥 웃었다. 가만히 있어도 웃음이 새어 나왔다. 선홍빛 소고기에 갖은양념을 더해 볶아낸 불고기를 한 젓가락 집어 입에 넣으면 눈꽃빙수처럼 사르르 녹아버릴 상상만으로도 우리는 신이 났으니까. 아랫목에 언 발을 묻으면 스르르 눈이 감길 것 같은 아찔함.


   드디어 밥상 위에 불고기 냄비가 올려졌다. 뚜껑이 열리면 함성처럼 하얀 김이 일제히 피어오른다. 이때다! 눈과 머리가 반응하기 전, 입이 먼저 마중 나오는 시간. 우리는 일제히 탄성부터 쏟아냈다. 와~, 우와~, 오호~, 야호~... 다중의 의미를 내포한 4인 4색의 외침이었다. 맛있겠다, 푸짐하다, 어마어마하다, 그리고 고기는 어딨지?


   그랬다. 그것은 소고기 불고기라는 타이틀을 빙자한 당면 볶음이었던 것이다.

 "여기가 당나라 군대야*, 뭐야? 그리고 이건 소고기 불고기야, 당면 볶음이야?" 형제들은 목소리를 높였다.

 "그래서 싫다는 거야? 양이 많다는 거야?" 엄마 역시 우리를 따라 두 가지 질문을 라임에 맞춰 한꺼번에 쏟아내셨다.

 "당면이 많아서 너무너무 너~무 좋다고요."

주객이 전도된, 소고기보다 당면이 많이 들어간 소고기 불고기에서 형제들은 언제나 당면부터 집중 공략해 들어갔다. 갓 지은 밥 위에 국물까지 듬뿍 떠서 쓱쓱 비벼 먹는 맛이 그렇게 맛있을 수 없었다. 엄마의 치밀한 전략은 언제나 먹혔다. 일명 하여 '양 불리기 전격 작전'. 엄마는 머리카락 한 올을 뽑아 당면 수백 가닥을 만드는 손오공의 분신술을 익혔음이 분명했다. 사형제는 고기 국물에 젖은 당면이라도 배불리 먹이고 싶었던 엄마의 의도를 알아채고 있었지만 속수무책, 당나라 군사처럼 고기인지 당면인지를 구분하지 못하고 덤벙대며 허겁을 떨었고 번번이 당면 앞에서 무너져 내렸다.


시작은 분명 소고기불고기였지만 당면을 만나면, 당면의 세력이 너무 강하면 당면소고기볶음이 될 수도 있다.

    내가 어렸을 적, 그러니까 7, 80년대는 의식주의 걱정에서 자유롭지 못한 시절이었다. 쌀밥 대신 보리나 다른 잡곡이 섞인 밥을 주로 먹었고(학교에서는 혼분식 장려운동의 일환으로 보리밥 섞인 도시락을 검사했다), 하루 한 끼 밀가루 음식을 권장했다. 그래서 하루 한 끼는 칼국수나 수제비, 국수를 먹었고 감자나 고구마 삶아 먹기, 꽈배기 핫도그 술빵 같은 간식을 만들어 먹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것들은 엄연히 독자적이었고 개별적인 음식 이름을 갖고 있었지만 당면은 입장이 달랐다. 당면이 제 몫을 제대로 수행하면서 당당할 수 있는 음식은 잡채뿐이었지만 잡채(雜菜)도 엄연히 따지만 채소나 버섯, 고기 같은 재료를 채 썰어 만든 음식이라는 의미였지 당면이 주 재료라는 인식을 주지 못하는 음식이었다. 조선시대, 1919년 당면 공장이 우리나라에 세워지기 전, 당면을 애용하기 시작했던 1930년 대 전에는 잡채에 당면은 들어가지 않았다. **)


   그러니까 당면은 항상 조연급이라는 당면 과제를 해결할 방법이 없는 식재료였다. 갈비탕의 당면은 있으면 좀 나은 조연이었고 소고기, 돼지고기 불고기에서 당면은 없어도 그만인 부재료에 불과했다. 그러나 우리 집에서는 고기보다 항상 양이 많아야 했고 없어서는 안 되는 식재료였다.

고추장이 벌겋게 들어간 닭볶음탕이나 부대찌개에도 당면을 넣어 먹었고 떡볶이 국물에 당면 김말이를 찍어 먹었으며 떡볶이에는 라면과 당면을 공평하게 넣어 먹었다. 우리 집에서 당면은 주연이었고 시선 강탈, 마음을 훔치는 '씬 스틸러'였다. 어디 그뿐이랴. 당면 겉포장에는 20인분, 40인분이라는 수치가 분명 적혀 있었지만 잡채를 할 때는 40인분 짜리, 탕이나 볶음 요리에는 20인분 짜리를 남김없이 그대로 썼다. 

 "이게 무슨 40인분이야? 4인분이구만."

형제들은 누가 그 분량 기준을 정한 것인지 의아해했다. 40인분 당면을 4명이 먹었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나는 아직도 당면 겉봉에 적힌 숫자를 이해할 수 없어 가족 4명이 먹는 소불고기에 당면 10인분을 넣는 만행을 저지른다.


부산 식당에서는 닭볶음탕에도 당면(좌)을 넣는다. 국제시장의 비빔당면(중,우)

   우리 집에서는 항상 위풍당당했던 당면. 그 당면의 위세가 정점을 찍을 때가 있었다. 부산 사람들이라면 또 무조건 아는 음식, 비빔당면되시겠다. 고등학생 때 친구와 놀러 갔던 남포동 옆 국제시장 좌판에서 비빔당면을 처음 먹었다. 오롯이 당면이 주재료였고 위에 얹힌 고명은 빨노초로 화려했으나 당근 단무지 어묵 정구지(부추)로 소박했으며 양념간장 한 숟가락이 무심히 끼얹어지면 되는 간편 음식이었다.

 "순대 하고, 어묵 하고, 마차 묵으마 기가 멕힌기라, 마, 묵어봐야 안다 아이가!"

마, 고마, 음식을 파는 할머니의 마, 한마디에 이끌리듯 비빔당면을 시켰고 그 놀라운 신세계에 입문하게 되었다. 입 안에서 탱글탱글 돌돌 헤엄치고 다니는 이 칼칼하고 달달한 당면의 맛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나는 다음 날, 식구들을 위해 맛있고 색다른 음식을 만들어 주겠노라 호언했다. 맛있는 음식을 혼자만 알고 먹을 수 없다는 의리녀 다운 당연한 행동이었다. 20인분 당면을 삶고 고명은 어묵과 단무지 오이를 준비했다. 양념간장에는 내가 좋아하는 식초를 좀 섞었다.

 "이기 뭐꼬? 잡채도 아이고, 볶은 것도 아이고, 그냥 비빈 거네?" 식구들은 입 맛을 다시면서도 쉽게 음식 앞으로 다가오지 못했다. 그러나 한 젓가락 먹기 시작하는 순간, 전세는 역전됐다. 보기에는 시시껄렁해 보여도 맛 하나는 기가 막히다는 표정과 감탄사. '내 그럴 줄 알았다고!'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고 이후 우리 집에서는 입이 심심해오는 점심 때면 가끔 "우리 비빔당면이나 해 먹을까?"소리가 들리곤 했다. 잡채와 고기볶음과 탕 요리에 주재료 버금가는 부재료로, 게다가 비빔당면까지... 가히 '당면의 전성시대'라 할 만했다.


   "우리 집에 당면이 있나?"

요즘도 우리 집에서는 옛날 우리 집에서처럼 식구들이 당면을 찾는다. 소고기 불고기에 당면을 넣어 먹고 싶다는 아들의 표현이고, 넓적 당면을 넣은 로제 떡볶이를 먹고 싶다는 딸의 요구이며, 고기 잔뜩 들어간 잡채 한 그릇쯤 올라가야 명절 기분 난다는 남편의 꼰대스런 발언이며, 부산 국제시장의 비빔당면을 함께 먹던 친구들과 그 시절에 대한 나의 연정(戀情)이다.






*) 당면(唐麵) : 당나라 당 자와 같은 한자를 쓴다. 호면()이라고도 한다. 중국이 원산지이다.

**) 지식백과 참고.

*) 표지 사진 : 루니 블로그. 부산 국제시장의 먹자골목 풍경. 비빔당면이 인기 메뉴였다.



4인 4색, 결 다른 사람들이 글쓰기 위해 모였습니다.

제대로 한번 써보자는 모의이며, 함께 생각을 나누며 어울려 살자는 시도입니다.

격주 목요일 매거진에 글로 작당 모의할 예정이니 지켜봐 주시길 바랍니다.

자, 그럼 수작(手作) 들어갑니다~, 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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