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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요 Mar 19. 2024

마음껏 울 수 있다는 건

 여느 때처럼 정신없이 분주하게 흘러가는 저녁시간이었다. 저녁을 먹고, 남편이 두 아이를 씻기고 닦아 내 보내면 나온 아이들의 얼굴부터 발끝까지 바디크림을 치덕치덕 발라주고, 옷 안 입고 까부는 아홉살과 일곱살 두 아들놈들(!)을 붙잡아서 옷을 던져주며 "제발 입어!!"를 외치고, 욕실 앞에 쌓여 있는 빨랫감을 다용도실에 가져다 놓고 나면 뭔가, 오늘 할 일은 다 한듯한 안도감이 든다. 야생마처럼 날뛰던 아들들이 그나마 저녁 먹고 목욕하고 나면 조금 차분해지기에, 이제 나도 느긋하게 샤워나 해볼까, 하며 욕실로 들어섰다. 샤워기에서 나오는 따뜻한 물줄기가 몸을 적당한 세기로 때려주는 게 너무 좋아서 좀 더 느긋하게 즐기고 싶은데 욕실 밖에서 또 뭔가 큰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그래, 망아지 같은 아들 둘 엄마에게 느긋한 샤워가 웬 말이냐, 부랴부랴 마무리하고 옷 입고 나가보니 큰 녀석이 엉엉 울고 있다. 작은 녀석이면 모를까, 속상한 일이 있으면 눈물을 뚝뚝 흘리긴 해도 저렇게 서럽게 엉엉 우는 일은 잘 없는 녀석이라 일단 "엄마한테 와!! 일로 와!!"하고 팔을 벌려 안아 주었다. 초등학교 들어간 이후로 뽀뽀도 포옹도 피하려 하는 녀석이 덥석 안기는 걸 보니 심상찮다. 

 "무슨 일이야, 엄마한테 말해 봐." 

 "엄마, 할머니 혼내 줘!!" 

 "왜 할머니가 어쨌는데, 왜 그래." 

 "봄이(둘째)가 나한테 저걸... 흑!! 던졌는데...!! 할머니가 나만 혼내고... 흑흑!!" 

 "할머니는 너를 왜 혼냈어?" 

 "내가... 봄이를 밀었어. 흑!!"

 "봄이가 저걸 던져서 네가 봄이를 밀었어?" 

 "응!!! 봄이가 먼저 던져서... 흑!! 내가 밀었는데, 나만 혼냈어!! 할머니 미워!!" 

 "그랬어? 그리고 또?" 

 "할머니는 봄이만 이뻐해!!! 흑흑!!! 그리고 내가 동물은 소중하다고 사랑해야 한다고... 흑흑!! 했는데...

 흑!!  할머니가 자꾸 사람이 더 소중하대!! 흑!! 동물이 살아야 사람도 사는 거잖아...!! 흑흑흑"

 동생이 자신한테 장난감을 던진 게 기분 나빠서 자신도 민 건데, 둘 다 혼나지 않고 자신만 혼난 것이 억울했고, 그저 동물의 소중함을 말하고 싶었고 할머니가 자신의 말에 공감을 해 주길 원한 건데 거기에 대고 아니야 사람이 더 소중해,라고 말하는 할머니의 화법이 무척 서운했던 거다. 늦게나마 작은 녀석에게도 형에게 장난감을 던진 점에 대해 혼을 내 주고, 친정엄마에게도 큰 녀석이 서운한 포인트가 무엇인지 알려 드렸다. 유로는 동물을 소중히 여기고 사랑해 줘야 한다는 사실을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할머니에게 말해주고 거기에 대한 동의와 공감을 얻고 싶었을 뿐이니, 다음부터 또 유로가 비슷한 이야기를 하면 '그랬구나, 유로가 그렇게 동물을 사랑하는구나.' 한 마디면 된다고 말이다. 작은 녀석이 형에게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고, 친정엄마가 큰 녀석을 끌어안고 '우리 유로 그래서 서운했구나, 할머니가 미안해'를 몇 번이나 반복하고 나서야 사태가 진정되었다. 아무도 싸우지도 않고 울지 않고 나도 느긋하게 샤워하고 나왔으면 참 좋았을 저녁이었지만, 그래도 큰 녀석이 저렇게 엉엉 울면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해 주는 게 나는 너무도 고맙고 다행스러웠다. 내가 아들 녀석들만했을 때는, 부모에게 솔직한 내 마음을 말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어느 날 갑자기 다른 지방으로 일을 하러 가시고, 엄마 혼자 아이 셋을 키우며 가게를 꾸려 가야 했던 시절이었다. 엄마는 결혼한 이후로 쭉 전업주부로서 살림과 육아만 해 왔고, 어린 내가 봐도 장사에는 적합지 않은 사람이었다. 체력이 약해 쉬이 지쳤고, 적극적이거나 활발하지도 못했다. 자세한 내막은 몰랐지만, 내가 일곱 살 때 갑자기 아빠가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다른 지방으로 가게 되었고 엄마는 팔자에도 없던 장사를 하게 되었다. 넉넉하지는 않아도 작은 아파트에서 단란하고 행복하게 살던 우리 식구들이 갑자기 낯선 동네의 가게 뒷방에서 엎치락뒤치락하며 살게 되었다. 엄마는 늘 바빴고 지쳐 있었고, 날이 서 있었다. 힘들다, 돈이 없다, 라는 말이 엄마의 입에서 습관처럼 흘러 나왔다. 갑자기 바뀐 환경에 나도 적응하기 힘들었고, 가뜩이나 내향적이고 낯가림 심한 내가 전학을 오니 학교에도 가기 싫었지만, 엄마에게 차마 힘들다거나 학교에 가기 싫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학교가 끝나고 집에 오면 엄마가 지친 표정으로 가게에 앉아 있었다. 누가 가르쳐준 것도 아닌데, 엄마에게 나의 힘든 마음이나 내 필요나 바램을 이야기해도 엄마가 그것을 받아들일 상태가 아니라는 것도, 해결해줄 수 없다는 것도 나는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던 것 같다. 학교 가기 싫어, 나 친한 친구가 한 사람도 없어, 나 핫도그가 먹고 싶어, 나 과자 많이 먹고 싶어... 입 속에서 맴도는 말들을 삼키고 또 삼키다 가끔 제어가 안될 때는 나도 모르게 불쑥 엄마, 하고 불렀다. 왜? 아무것도 아니야, 그렇게 싱겁게 끝나던 그 대화 속에 엄마한테 말하고 싶었던 수많은 말들이 꾹꾹 눌려져 있었던 걸 엄마는 지금도 모른다. 어쩌다 가끔 그 시절 이야기를 슬쩍 꺼내기라도 하면, 엄마는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그 때가 내 인생의 암흑기였다, 제일 힘든 시기였어, 라며 엄마가 어떤 점에서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늘어놓으니 나는 그 때나 지금이나 내 이야기를 할 수가 없다. 그래서, 나는 아이들이 눈물을 뚝뚝 흘리며 하소연을 하거나 가끔은 말도 안되는 일로 생떼를 쓰며 드러누워도, 마냥 싫지만은 않다. 너희들은 엄마를 믿는 구나, 엄마가 받아줄 거라고 생각하는 구나, 떼쓰고 울고 불고 해도 안되는 건 안되는 거지만 너네가 뭐라고 하는 지 들을 준비는 되어 있단다, 하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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