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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요 Feb 19. 2024

아버지와 나-3

  정신건강의학과에 다니게 되었다. 첫 공황발작이 온 지 거의 20년 만에 내디딘 어려운 발걸음이었다. 갑자기 가슴이 두근대고 숨이 차고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어서 과호흡을 하고, 과호흡으로 인해 팔다리와 안면까지 뻣뻣하게 굳은 채로 응급실에 실려 가는 일이 몇 차례 반복되었다. 응급실에서는 매번 원인을 모르겠다고 하고 몇 가지 검사를 하고 수액을 맞힌 후에 귀가를 시켰다. 대학병원의 여러 과에서 진료를 받고 갖가지 검사를 받아 보았지만, 모두들 몸에는 이상이 없고 스트레스 때문일 수도 있으니 스트레스를 받지 말라고 할 뿐이었다. 첫 발작 이후로 몇 차례 더 발작이 있었고, 그 이후로는 2~3년에 한 번 정도로 발생빈도가 줄었다가, 결혼을 하고 일을 그만두니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2020년 6월 경, 다시 일을 시작한 지 4개월 차에, 근무 도중 또 갑작스레 가슴이 두근대고 숨이 차기 시작했다. 과호흡 발작으로 발전하여 온몸에 강직이 오기까지 채 5분도 걸리지 않았던 것 같다. 동료교사가 불러 준 119 앰뷸런스를 타고 갔던 병원의 응급실에서, 처음으로 공황발작이 의심된다는 소견을 들었다. 이게 공황발작이라고? 공황장애는 연예인들이 많이 앓는다고 들었는데, 바로 그 공황? 근데 내가 왜? 

 정신건강의학과에 대한 거부감이나 선입견은 없었지만, 우울증이라면 모를까 내가 공황장애라는 게 잘 납득이 가지 않아 정신건강의학과 진료를 받는 것을 미루고 미루다가, 2년 여가 흘러 결국 한 달 동안 세 차례 정도의 공황발작을 치러내고 나서야 나는 진료를 받을 결심을 했다. 그리고, 여러 차례의 검사와 면담 끝에 나는 중증도의 우울장애와 공황장애, 불안장애 진단을 받았다. 무슨 트리플크라운도 아니고, 진단명을 한꺼번에 세 개나 받냐, 하고 어이가 없었지만 원래 우울과 공황과 불안은 세 쌍둥이와도 같은 거라는 걸 알게 되었다. 오래된 우울과 불안이 공황을 만들었고, 공황이라는 건 불편하고 힘들긴 하지만 내 몸이 '너 이러다 죽겠다, 너 자신 좀 돌봐, 응?' 하는 메시지를 보내는 것이니 너무 걱정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선생님은 자상하게 설명해 주었다. 

 이 사람에게 어디까지 이야기해도 되는 걸까, 어디서부터 어떻게 이야기를 할까 고민했던 것과 달리, 진료 횟수가 늘어날수록 나는 잊어버리고 있었던 기억까지 왈칵왈칵 쏟아놓게 되었다. 면담시간 20분이 너무 아쉬웠다. 아버지한테 다 하지 못했던, 아버지에게 서운했고 아버지가 무서웠고 아버지가 미웠던 모든 감정과 에피소드들을 쏟아내고 또 쏟아내었다. 진료가 끝나고 돌아오는 지하철에서, 아 이것도 이야기했어야 하는데, 하고 아쉬워하는 일들도 많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얼마간의 슬픔으로 인해 묻어둔 기억들이, 또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키우며 무뎌진 감정들이 치료를 받기 시작하면서 수면 위로 다시 떠오르기 시작하니 글자 그대로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진료가 거듭될수록 처방되는 약의 개수와 용량이 늘어갔고, 밤에 자려고 누우면 아버지가 내게 퍼부었던 폭언과 폭력들이 떠올라서 잠이 오지 않았다. 아버지, 혼자 천국 가니까 편해요? 아버지 딸은 덕분에 병원 다니면서 약 먹어요. 딸 공황장애 진단받게 해 놓고, 좋아요? 하고 허공에 삿대질을 하다가 울기도 했다. 어떤 날은 자다 말고 벌떡 일어나서, 할머니로부터 언니까지 내 모든 가족들에 대해 일목요연하게 엑셀로 표를 만들어 정리했다.  내가 조금만 아버지의 기준에 어긋나면 너 같은 건 이라거나 네까짓 게라는 말로 일장연설을 시작했던 아버지, 머리나 뺨을 때리는 것을 훈육으로 여기던 아버지, 쟁반을 내 머리에 깨부수고 나를 발로 찼던 일을 전혀 기억 못 하던 아버지, 간호과에 가기 싫다고 울며 애원했지만 내 의견과 감정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던 아버지, 어머니나 언니에게 서운한 일이 있으면 그 화풀이를 나에게 했던 아버지,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열심히 일해서 기껏 키워놨더니 고마워하지는 않고 안 좋은 이야기만 골라한다고 못마땅해하던 아버지.... 그리고, 아버지를 낳기만 하고 키우지도 않았으면서 돈만 뜯어간 할아버지와 할머니, 아버지로 인해 내가 힘들어하고 울고 있으면 아버지도 불쌍한 사람이니 네가 이해하라고 했던 엄마... 일방적으로 나만 피해자인 것처럼 쓰지 않으려고, 최대한 객관적으로 있었던 일만 서술하려고 노력했지만 다 적고 나니, 겉보기에만 멀쩡했지 참 형편없는 집이로구나 싶었다. 자식을 소리 지르고 때려서 키우면서도 '우리는 민주적인 부모, 우리 집은 화목하고 행복한 집'이라고 자부심을 가졌던 아버지에게 던져 주고 싶었지만, 당사자가 없는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출력물을 내 주치의 선생님에게 쥐어주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그다음 진료에서, 나는 최고의 위로를 받았다. '저번에 주신 자료를 다시 읽어보았습니다. 너무 감정적인 자산이 없는 집에서 자랐어요. 근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 잘 자랐어요. 환자분은 감정적 자수성가에 성공하신 분입니다. 제가 그동안 지켜본 환자분은 예의도 바르시고, 저에게 치료를 받는 동안 진료시간에 늦거나 빼먹은 적도 없고, 좋은 부모가 뭔지, 배우고 경험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좋은 부모가 되려고 노력하며 살고 있죠.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자신을 가지세요. ' 감정적 자수성가라니, 참 근사한 말이었다. 나는, 사랑 못 받고 자라 우울증 걸린 아줌마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자란 사람이었구나. 

 처음 정신건강의학과 치료를 받을 때는 1~2주에 한 번씩 공황발작을 겪었는데 차츰 그 간격이 넓어지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전혀 나타나질 않았다. 아버지의 '니 까짓게'가 어느새 내가 나에게 던지는 '내 까짓게'가 되어서 나를 병들게 하고 있었다는 걸 받아들였다. 나는 그런 형편없는 사람이 아니었다. 아버지가 잘못 알고 있었고 나까지 완벽하게 속았다는 것을 깨닫기까지의 과정이 무척 길고 어려웠지만, 그걸 제대로 깨닫고 난 후부터 처방되는 약의 개수와 용량이 급속도로 줄기 시작했다. 부모로부터 못 받은 인정을, 나도 모르게 사회에서 받고자 해서 과도하게 성실하게 살다 보니 내 몸이 축났다는 것도 깨끗하게 받아들였다. 완벽한 인간, 완벽한 엄마, 완벽한 직장인으로 보이고 싶어서 발버둥 치며 살고 있었는데 그럴 필요가 전혀 없다는 걸 깨닫고 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무엇보다, 아버지를 떠올려도 아무렇지 않았다. 용서한 건 아니었다. 아버지가 어떠한 환경에서 자라 어떠한 연약함을 가지고 있었다고 해도 어린 나에게 그렇게 해서는 안 됐다. 여하튼, 아버지를 떠올렸을 때 더 이상 그립지도 밉지도 않았다. 돌아가시고 나서도 내 삶의 상당한 부분을 지배하던 아버지가 완벽한 과거의 사람이 되었음을 느꼈을 때, 나의 정신건강의학과 치료는 종결되었다. 

 지금도 가끔씩, 오래된 기억이 한 번씩 내 몸과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순간들은 있다. 화상이나 수술자국 같은 곳은 다 아문 후에도 흉터가 남고, 비가 오거나 하면 그 흉터가 쑤실 때도 있지 않나. 명절이나 기일이라 어쩔 수 없이 아버지의 납골당을 방문해야 할 때, 아버지와 금슬이 너무 좋았던 엄마가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나 추억 등을 이야기할 때, 잠깐 저릿하게 쑤시기도 하고 짜증이 확 나기도 한다. 하지만, 더 이상 아버지에게 휘둘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나는 아버지를 용서하지 않았고 불쌍하게 여기 지도 않고 그렇다고 미워하지도 않은 채, 그냥 지금 내 곁을 지켜 주는 나의 새로운 가족들과 행복을 만들어 가는 데 집중하려 한다. 벌써부터 반항하기 시작하는 초등학생 아들을 보며 한숨이 나오기도 하지만, 싸울 때 싸우더라도 우리 아이들이 부모에게 자신이 무척 사랑받고 보호받는다는 걸 알며 느끼며 자라기를 기도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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