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요 Apr 08. 2024

숨 돌리기(feat. 굴포천 벚꽃)


 나는 염세적이고 우울한 사람이다. 그렇다고 하루종일 울상 죽상을 하고 있는 건 아니지만, 내 정서의 기본 베이스에는 우울함이 깔려 있다. 어떤 일을 하려고 계획할 때는 이게 되는 이유보다 안 되는 이유가 더 잘 떠오르고, 누군가와 만날 약속이라도 잡으면 만나서 맛있는 걸 먹고 재밌는 시간을 보내는 데에 대한 설렘보다 사람과 만나서 시간을 보내며 얼마나 많은 에너지가 소모될 지에 대한 염려가 더 큰 사람이다. 아무리 친하고 좋은 사람이라도, 이 사람과도 언젠가는 멀어지겠지, 이 사람과도 언젠가 싸우거나 등을 돌릴 일이 생기겠지, 사람이란 온전히 믿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니까,라는 전제 하에 관계를 맺는다. 특정 누군가에 대한 불신이 아닌, 그냥 인류 자체에 대한 불신과 회의에서 나오는 생각이다.  이런 사람이 학교에서 하루종일 보건실 문턱이 닳도록 드나드는 학생들을 상대하고 또 집에 오자마자 가족들과 함께 하니, 늘 에너지가 모자랄 수밖에 없고 우울감을 걷어낼 기회보다는 우울감이 더 짙어질 기회가 훨씬 많다. 사춘기를 겪거나 혹은 그 이상의 연령대 자녀를 키우는 부모들은 나보고 좋을 때다, 품 안의 자식이다, 나중 되면 엄마한테 들러붙던 시절이 그립다, 라고들 하지만 내 입장에서는 이래도 저래도 힘들 거라면 나 혼자만의 시간이 좀 주어지는 삶이 더 나을 것 같다고 생각되어 얼른들 커서 각자 할 일들 해라... 더 커서 독립도 어서들 해라... 싶은 것이다. 여하튼 결혼도 했고 아직 어린 자식들도 키워야 하고 직장도 다녀야 하고 그 속에서 수많은 사람과 부딪치며 살아야만 하니-하루종일 헤실헤실 웃으면서 실없는 농담을 하고, 커피와 차를 홀짝이고, 마카다미아 초콜릿을 씹고, 주말엔 떡볶이나 매운 라면을 먹고 가끔 글을 쓴다. 큰 기쁨과 행복을 느끼기 어렵다면 작고 사소한 기쁨과 행복거리라도 열심히 만들어 내는 수밖에. 


 어제는 뭔가, 눈물샘이 넘쳐흐를 것 같은 기분이었다. 화요일에 친구에게서 연락을 받았는데, 친구와 내가 함께 몸담고 있는 어떤 공동체에서 친구와 나에 대한 말이 돈다는 내용이었다. 공동체 내에서 우리 둘이 친한 것을 질투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과, 친구와 친구의 가족에 대한 어떤 소문이 도는데 그 소문의 진원지가 나일 수도 있다고 누군가가 생각한다는 내용이었다. 친구는 나를 원망하거나 의심하는 건 아니었다.  4~5명이 함께 하는 작은 그룹 속에서 우리 둘만 유독 친한 거면 이해하지만, 수많은 사람이 속해 있는 공동체에서 우리 둘이 친한 것을 문제 삼는 걸 친구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친구와 친구의 가족에 대한 소문은 내가 들어도 어이가 없을 만큼 얼토당토않은 내용이었기에, 친구도 내가 그 소문의 진원지가 나일리는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친구는 나에게 그런 이야기를 전하는 것도, 이런 상황 속에 처한 것도 무척 힘들어했다. 나 또한 통화를 끝내고 나서도 하루 종일 뭔가 끈적한 게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는 것 같은 기분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친구도 안쓰럽고 나도 안 됐고, 어떤 공동체든 이상한 사람들은 늘 존재하기 마련이지만  공동체의 리더가 그런 이상한 사람들을 문제 삼는 게 아니라, 그러니까 앞으로 둘이 너무 친하게 지내지 말고 자기 마음속 이야기도 나누지 말아라...라고 결론 지었다는 것도 무척 서운했다. 사회생활을 워낙 오래 한 지라, 크고 작은 공동체 속에서 일어나는 이상하고도 어이없는 일들을 많이 겪은 나로서는 그냥 '원래 어디 가나 이상한 인간들은 꼭 있지.'라고 넘겨도 될만한 일이건만,  이 일의 파장이 계속 잔잔한 파도처럼 나를 조금씩, 툭, 건드리고 또 툭, 건드려 자꾸만 침체되었다. 그리고 직장과 학교에서 겪는, 진짜 어디 가서 뭐라 하기도 그런 아주 일상적이고 미세한 스트레스와 합쳐져 눈덩이처럼 커져 가는 시점에서  어제, 어떤 어른으로부터 '본인은 조언이신 줄 알지만 사실 무척 실례이고 오지랖인'말을 듣고 나니 숨을 쉬어도 쉬는 것같지가 않은 상황이 되어 버린 것이다. 저녁을 먹고 아이들에게 아이스크림을 사서 쥐어 주고, 무작정 에어팟을 끼고 집을 나섰다. 이럴 땐 그냥 소리를 크게 지르던지, 몸을 혹사시키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더라. 헬스장엘 못 가니, 많이 걸어 몸을 피곤하게 만드는 수밖엔 없었다. 마침 우리 집에서 약 15분 거리에 굴포천이 아주 길게 흐르고 그 주위로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니, 몸은 혹사시키고 눈은 호강시켜 나 자신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날이 저물어 가는 시간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방법으로 벚꽃을 즐기고 있었고, 나는 에어팟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으며 눈으로는 벚꽃을 보고 발로는 끊임없이 걷고- 중간중간 근사해 보이는 스폿에서는 사진도 찍으며  내 마음을 달랬다. 물소리가 들리는 곳에 쪼그려 앉아 졸졸졸 물소리를 들으며 꽃을 보고 있자니 일주일 동안 뭉쳐져 마음속에 자리 잡은 먼지 덩어리가 슬슬 걷히는 듯한 기분이었다. 날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장소에서 온전히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는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는 환기가 되는데, 꽤 괜찮은 풍경 속에서 내가 좋아하는 소리(내가 좋아하는 노래, 자연의 소리)를 듣고 있으니 비로소 숨이 제대로 쉬어지는 것 같았다. 열심히 눈에 담고 핸드폰 속에 저장한 오늘의 벚꽃이, 물소리가, 아름다운 저녁노을이, 내 우울을 아예 걷어갈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치열한 한 주를 살아가다가 잠깐 숨을 돌릴 때 작은 미소를 짓게 해 주길 바라 본다. 











작가의 이전글 나는 죽지 못해 산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