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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맹수봉 Dec 17. 2021

식사수발일기 03. 비트를 찌듯 살고 싶다.

귀찮고 어려운 일을 맞닥뜨렸을 때 어떻게 하면 좋을까?


비트 쪄서 먹기.

얼마나 간단한 일인가?



비트 껍질을 깐다.

까면서 정수기의 자동 버튼을 눌러 찜기에 물을 받는다.

비트를 툭 툭 툭-자른다.

자르면서 바로 찜기에 올린다.

냄비를 불에 올린다.


그리곤 15분 , 알람을 걸어둔다.


혹은 , 무쇠냄비에 물을 1/3 정도만 넣어주고

무심한 듯 툭툭 자른 비트를 넣어주고 중 약불에 15분-20분을 찐다.


다 쪄지면 먹는다.

혹은 아이 이유식에 넣는다.


우리 집에선 샐러드 위에 토핑을 해서 먹거나 , 다양한 과일과 야채를 넣고 갈아먹는다. 딸기와 비트 그리고 꿀을 좀 넣을 때면 상큼함을 맛볼 수 있고 사과, 당근을 넣어주면 유명한 ABC주스가 된다. 바나나와 푸른 야채 그리고 꿀을 좀 넣고 갈아주면 크게 거부감 없이 먹을 수 있다. 요즘은 날이 추워져서 푸른 잎이 거북 스러 운 날들이 종종 있어 살짝 찐 양배추를 넣어도 나쁘지 않았다. 예전엔 진입장벽이 너무 높던 친구였는데 , 비트에 몸에 좋은 성분들이 차고 넘친다는 이야기를 듣고 난 이후엔 가급적이면 자주 챙겨 먹으려 했고 그러다 보니 이제는 동네친구마냥 아주 편한 사이가 되었다.


발 뒤꿈치가 갈라지는 것도 모를 정도로 나보다 아이들을 돌보는 날들이 이어지지만 , 비트(더불어 케일)를 종종 챙겨 먹으며 소소하게나마 내 몸을 돌봐주고 있다는 작은 위로를 스스로에게 건네고 있다.



비트에는 베타인이라는 색소가 포함되어 있어 세포 손상을 억제하고 토마토의 8배에 달하는 항산화 작용으로 폐암, 폐렴 등 암을 예방하고 염증을 완화하는 효과가 있다. 비트의 8%는 염소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염소 성분은 간 정화작용을 하고, 골격 형성 및 유아 발육에 효과가 있다. 또한 철분과 비타민이 다량 함유되어 있어 적혈구 생성을 돕고, 혈액을 깨끗이 씻어 월경불순이나 갱년기 여성에게 좋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뿐만 아니라 위 손상을 막아주고 위 점막을 보호해주기도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비트 (우수 식재료 디렉토리)

* 좋다고 너무 많이 먹음 안된다. 애들은 1/4 개, 어른은 한 개 정도가 충분하다고 한다.

* 김이 오르고 15분 이상 삶으면 영양분이 소실된다고 하니 타이머를 이용하면 좋을 것 같다.





물 흐르듯 이어지는 비트를 삶고 먹는 과정.

얼마나 간단한가.


얼마  친구와 통화를 하던 중에 가계부를 적고 예산을 짜는 일에 대해 열변을 토한 적이 있다. 서른 중반 , 요즘처럼 가계부를 상세히 적고 그걸 자료 삼아 예산을 짜고,  예산에 맞춰 살아보도록 고군분투를 해본 적이 크게 없었다. 그냥 아주 심플하게 " 아껴살아야겠다" 더불어 돈이 생기면 비상금 통장에 넣어 두었다가 필요한 시기가 되면 종종 꺼내서 사용하는 정도로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최근에 부동산 관련해서 여러  뒤통수를 맞은 이후로  뒤통수가 없어질  같은 막연한 두려움에 경제공부를 시작했으나 그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맞지 않는 옷을 우겨 입는  같았다. 단어들은   그리 생경한 ! 보험은  알면  수록  모르겠는지! 엄마가 보험왕인데 !! 생활비를 단계적으로 줄여가는  이미 머릿속으로 수백  시물레이션을 돌려 성공을 했는데  어째서 현실에선 이루어지지 않는 것인지!!  가계부는  그리 귀찮은 건지!


누군가 내게 한 달 중 제일 힘들 때를 고르라 하면 바로 답할 수 있다.

그건 바로 "월말!!!"

월말이 되면 정신적 피로가 상당했다.

정산을 하고 예산을 짜야하니까.


(아, 11월 정산도 여직 안 했다. 오늘 밤에는 꼭 해야지. 생각만 했는데도 벌써 피곤이 몰려온다.)


오랜 시간 가계부를 적고 예산 생활을 하던 친구는 그게 뭐가 그리 어렵냐 말한다. 너무 어렵게 하지 말고 심플하게 하란다. 그리고 어플을 사용한 가계부는 알아서 엑셀로 정리해서 내보낼 수 있기 때문에 그걸 사용해서 엑셀 작업을 하라고 '아주 간단히' 이야기했다.


엑셀..

그래 엑셀 좋지..


친구의 이야기를 듣고 머리로 시물레이션을 돌려보는 순간! 뚝배기에서 지진이 나버렸다. 아 못해 못해. 도리도리. 온몸이 가계부를 거부한다. 프로주부의 길이 이토록 힘든 것이었다니. 차라리 정답이 정해져 있는 전공책을 다시 보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이번엔 그 친구가 이유식 만드는 걸 내게 물어 왔다. 친구는 첫애의 이유식을 , 나는 둘째 이유식을 만드는 비슷한 시기를 겪고 있지만 나는 이미 첫애의 이유식을 만들었던 경력직 엄마이니 계량 같은 거 없이 그냥 뭐 저냥 뭐 야채 잘라서 밥에 넣으면 뚝딱 이유식이 나왔다. 그러나 친구의 입장에선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나 보다. 이제 곧 아이에게 비트를 먹여 봐야 하는데 식재료에 대한 거부감이 좀 있다 했다. 어라? 왜지? 비트가 왜 어려울까? 친구에게 이래 저래 비트를 잘 쪄서 아이 이유식에 잘라 넣고 나머지는 자네가 바나나와 갈아먹던지 아니면 그냥 먹던지 하라 했더니 , 생각만 해도 피로감이 몰려온다고 했다.


왜 피곤하지? 딱히 어려울 것 없는 과정인데.


"친구야 , 그냥 하면 되는데 그게 왜 어려워? 일단 껍질을 까! 일단! "이라 답하는 순간 정적이 찾아왔다.


".........."

".............."


"...ㅋㅋㅋ야! 비트 찌는 것처럼 가계부를 적어라!!!!!" 라며  친구는 내게 비트를 찌듯 가계부를 적고 예산을 설정하라 했다.  그리고 난 그 친구에게 가계부를 적듯 비트를 쪄보라 이야기했다. 각자에겐 늘 익숙한 무언가가 있다.  익숙한 일은 언제부터 익숙한 일이 되었을까. 그것도 처음엔 어려운 일이었을 텐데. 그러니 하나하나 차근히 시작해보자. '아 나 그런 거 못해' 포기만 하지 않으면 된다. 일단 필러로 비트 껍질을 까는 단계부터, 아니 냉장고 구석에 있는 비트를 꺼내오는 것부터 시작해서 그 과정이 손에 익기만 하면 아주 쉬운 것이 비트 찌기인 것처럼 말이다.


이렇게 매사 비트를 찌듯 살아간다면 ,

그게 무엇이든 어려울 것 없을 것이라 생각된다.

한 단계씩 천천히 천천히.

그리고 손에 익도록 여러 번을 반복한다면 말이다.


그래. 난 결심했다.

일단, 가계부 어플을 켜고 예산을 짜둔 노트북을 펼치자.


그게 바로 내가 오늘 할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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