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신들의 땅, 바이아

축복받은 땅의 저주받은 노예들

by 브라질소셜클럽

브라질에서 꼭 가야 하는 여행지를 물어보면 사람들은 뭐라고 답할까? 일단 예수상과 바다가 있는 히우 지 자네이루가 떠오른다. 자연의 보고, 아마존과 이과수 폭포도 빠질 수 없다. 브라질리아나 상파울루는 출장이면 몰라도 여행으로는 살짝 아쉬운 느낌이다. 그러고 나면 이제 다른 크고 작은 도시들이 남는다. 포르투갈 건축양식이 많이 남아 있는 미나스 제라이스, 선진 도시로 다큐멘터리에 나오기도 했던 쿠리치바, 브라질 사람들이 사랑하는 휴양지 플로리아노폴리스, 지젤 번천이 밭을 간다는 남부의 포르투 알레그리 등등.


그렇다면 북쪽은 어떨까?


포르투갈 식민지 시대의 첫 번째 수도이자 중심지였던 북쪽 바이아 주에는 오래된 건축 양식과 전통문화가 잘 보존되어 있지만, 수도가 히우 지 자네이루 그리고 또다시 브라질리아로 옮겨지고, 상파울루를 위시한 남쪽 지방의 발전에 비해 뒤처지면서 못 사는 지역으로 남게 되었다. 오늘도 바이아와 북쪽 지방에 사는 가난한 사람들은 일자리를 찾아 버스와 트럭을 타고 남부로 내려오고 있다.


바이아 하면 브라질 사람들은 우선 날씨가 덥고 흑인이 많고 한적한 동네라고 생각한다. 남부에 사는 샌님들은 바이아 사람(Baiano)들이 놀기를 좋아하고 느긋한 성격이라는 편견 또한 가지고 있다. 여기까지만 들으면 별로 매력이 없어 보이지만 내가 바이아에 간 이유는 단 하나, 브라질의 전통문화와 음악이 그곳에서 탄생했기 때문이었다.


왜냐면 쌈바는 저기 바이아에서 태어났기 때문이죠
그의 시는 백인의 것일지 몰라도,
그의 심장은 누구보다 검답니다
(Samba da Benção, Vinicius de Moraes)



미국에서도 뉴올리언스와 내쉬빌이 재즈와 컨트리 음악의 거장들을 내놓았듯이, 바이아의 주도 살바도르(Salvador)도 수많은 음악가들의 요람이 되었다. Dorival Caymmi, Caetano Veloso, Gilberto Gil, Joao Gilberto, Astrud Gilberto, Gal Costa, Daniela Mercury, Ivete Sangalo, Maria Bethania... 일일이 나열하기가 힘들 정도다. 그래서 꼭 한번 가보고 싶었다.




매력 넘치는 살바도르의 구시가지


분명 브라질의 겨울인 6월에 갔음에도, 살바도르는 반팔을 입어도 되는 완연한 여름이었다. 낮게 찰랑거리는 바다와 연중 따뜻한 날씨... 바이아 사람들이 느긋하다면 그것은 죄가 아니다. 바다 근처 Rio Vermelho에 있는 호스텔에 도착한 나를 흰머리의 주인아저씨가 맞아주었다. 그는 미국인이지만 브라질로 은퇴한 뒤 바이아에서 호스텔을 차렸다고 했다. 바이아까지 찾아온 나에게 그는 의미심장한 한 마디를 던졌다.


많은 여행자들이 여기 와서 바이아의 바다에는 영적인 기운이 있다고 말하더라.
당신도 여기서 살아보면 그것이 사실이라는 걸 알게 될 거네.


영적인 기운? 가끔씩 인도에 선교하러 가는 전도사들이 "인도는 영적인 땅"이라고 말하는 것은 들어봤지만 인도에 가보지 않은 나는 그 말의 의미를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바이아의 지난 오백년 역사를 돌이켜본다면 과장된 얘기는 아닐지도 모른다.


어느 나라든 불길한 일이 일어나거나 사람이 죽은 지역은 영적인 기운이 서린다고 믿는다. 바이아에 어떤 불길한 일이 있었냐고? 16세기부터 1888년 브라질의 노예들이 해방되기까지, 5백만 명이 넘는 흑인 노예들이 아프리카에서 브라질로 끌려왔다. 대다수는 브라질 북쪽인 살바도르와 헤시피(Recife)를 거쳐, 아메리카 대륙 곳곳으로 다시 팔려나갔다. 미국과 브라질을 비롯해 많은 아메리카 대륙의 개척지들은 값싼 노동력을 필요로 했고 노예상인들은 매일 노예선을 띄워 그 수요를 충족시켜 주었다. 자본주의가 낳은 괴물이라는 말이 아깝지 않은 인류 역사의 비극이었다.


목격자인 Rugendas가 묘사한 노예선 안


노예선의 안은 거의 가축우리 수준이었다고 목격자들은 적고 있다. 오물이 그대로 방치되기도 했고 죽거나 병든 노예는 폐기되듯 바다로 던져졌다. 1-2달에 달하는 긴 여정 동안 사망률은 최대 15%까지 치솟았다. 런던의 보험회사들은 사망률과 항해의 위험성 등을 수치화해서 보험상품을 팔아 돈을 챙겼다. 그렇게 힘들게 끌려온 노예들의 평균 수명은 24세 정도였다고 한다. 한때 인구의 1/3을 차지할 정도로 브라질에 있어 노예의 중요성은 절대적이었다. 그렇기에 한 역사학자는 이렇게 단언했다:


노예제를 빼놓고는 브라질 역사책의 한 장도 쓰지 못할 것이다.


앙골라와 르완다를 비롯해 아프리카 각지에서 끌려온 노예들은 처음에는 부족도 말도 달랐지만 점차 현지 생활에 적응하여 자신들이 먹던 음식과, 부르던 노래와, 믿던 종교를 브라질에 퍼트렸다. 그래서 바이아의 음식과 노래와 종교는 포르투갈도 앙골라도 르완다도 아닌 제3의 잡탕이 되었다. 영문도 모르고 끌려온 노예들에게 포르투갈인들은 가톨릭의 성인들을 가르쳐주었고, 노예들은 자신들이 믿던 다신교 오리샤(Orixa) 신앙에 성인들을 하나씩 대입하기 시작했다. 한 예로 그들은 성모 마리아를 바다의 어머니 예만자(Yemanja)라고 '치고' 믿었다. 이렇게 종교 혼합(Syncretism)이 성행했던 바이아의 교회에는 아프리카에서 온 것 같이 알록달록한 성인 동상들이 가득하다. 예배당의 중앙에는 새까만 흑인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려 있었다. 그래. 백인 밑에서 맞아가면서 일하는 것도 서러운데 예수는 흑인이어야 마땅하다.


이 리본을 손목에다 세 번 매듭짓고, 그것이 풀리면 소원이 이루어진다.




나는 걸어서 살바도르의 중심지, 펠로리뉴(Pelourinho) 까지 도착했다. 낡았지만 고풍스러운 16, 17세기의 오래된 건물들과 돌바닥이 이곳의 역사를 생생하게 전달한다. 펠로리뉴라는 말은 포르투갈어로 형틀이다. 시가지 중앙에 서 있던 십자가 모양의 형틀에서 노예들을 채찍으로 때리던 곳이라는 말이다. 시가지에서 바닷가로 내려가려면 지금은 큼지막한 엘리베이터(Elevador Lacerda)를 타면 그만이지만 엘리베이터가 1873년 완공되기 전까지는 모두 가파른 언덕길을 걸어 다녔다. "게으름의 언덕(Ladeira da Preguica)"이라 명명된 이 길은 그곳을 오가는 노예들에게 주인들이 게으름뱅이라고 소리치던 데서 유래한다. 이렇듯 살바도르의 골목길 하나까지 노예들의 슬픈 역사로 점철되어 있다.


바이아를 대표하는 길거리 음식, 아카라제


펠로리뉴의 중심지는 한창 축제 준비로 바빠 보였다. 6월의 컨트리 축제(Festa Junina)가 바로 며칠 뒤였지만, 아쉽게도 여행이 끝나는 시점이라 볼 수는 없었다. 가지각색의 리본과 현수막을 지나 나는 아카라제를 먹으러 바다를 따라 걸어갔다. 남부의 스테이크도 맛있고 히우의 페이조아다도 맛있지만 바이아 지방의 음식은 브라질에서 아마 가장 다채롭고 재미있는 음식일 것이다. 아카라제(Acaraje) 하나만 해도 콩을 갈아서 튀긴 큼지막한 팔라펠 같은 음식에, 새우와 땅콩으로 만든 스튜에, 삶은 새우에, 핫소스가 들어간다. 서너 나라의 음식이 합쳐진 듯한 아카라제의 맛은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맛이지만 나는 현지 사람들과 야외에 앉아서 맥주 한 잔에 두 개를 끝내버렸다. 브라질에서는 맥주를 시키면 무척 차갑게(bem gelada)해서 주지만 바이아에서 마신 맥주는 슬러시가 되기 직전이었다. 이빨이 아플 정도로 찬 맥주를 다 마시고, 해가 지기 전에 호스텔로 돌아가기로 했다. (살바도르의 치안은 브라질 내에서도 좋지 않은 편이다) 해가 져 가는 바닷가를 걸으며, 나는 예전부터 좋아하던 Dorival Caymmi의 노래 한 곡을 흥얼거렸다.


Voce Ja Foi A Bahia - Familia Caymmi


너 바이아에 가 본 적 있어?
없다고? 그럼 가!
봉핑의 교회를 찾는 누구든
다시 돌아오고 싶어 하지 않아

옛 살바도르의 2층 집 발코니와
왕정 시대에 살았던 여인들의 기억
바이아의 모든 것, 모든 것들은
사람들을 정말로 원하게 만드네
바이아는 그 어느 땅도 가지지 못한 걸
가지고 있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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