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치 있게 잘 늙어야지. 암.. 그래야지.
일이 바빠서 내 글을 쓸 시간이 없다. 하루하루 바쁘면 바쁠수록 내 안에 쏟아내지 못한 말들로 버겁다.
바쁘다를 입에 달고 산다. 딸이 묻는다. "엄마 지금 뭐가 제일 힘들어?" 딸의 의도는 지금 엄마가 제일 힘든 일이 뭔지 물어보고 도움을 주고 싶은 맘 일 것이다. 나의 답이 가관이다. 어린아이가 내 맘을 알릴 기회를 잡은 것처럼 딸 앞에서 지금 뭐가 힘들고, 이런 일을 해야 하고, 저런 일을 해야 하고, 줄줄이 늘어놓는다.
그렇게 늘어놓은 말이 순간 부끄러웠다. 지금 뭐 하는 거지? 얼마 전까지 난 딸에게 뭐든 다 해결해주고 책임지는 엄마였다. 풍족하지 않지만 딸의 필요를 채워줄 수 있는 경제권과 보호자라는 자리에 있었다. 지금은 딸에게 내가 보호자가 아니다. 결혼 후 사위는 딸의 보호자가 되었고, 가끔 "엄마 용돈"하며 카톡으로 보내는 송금은 마음이 고마우면서도, 공급자가 공급처가 된 변화된 위치를 느끼게 한다. 힘들다고 좀 알아달라고 징징거리는 아이를 보듯 안쓰러워하는 딸의 눈빛은 무능한 엄마로 전락해버린 뿌연 거울 앞에 선 초라한 나를 보게 한다. 아직 선명한 거울처럼 보이는 것이 아니라 다행이라는 마음도 든다. 모든 것을 직면해야 하는 때가 오면 날 인정하고 받아들이지 못하고 스스로 얼마나 파괴적인 생각을 하게 될지 두렵다.
어떤 일이든 빠른 결정과 선택으로 추진력 있게 일 처리하던 난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 용기 있게 도전하고 씩씩하게 살아냈던 적이 있었는가 싶다. 이제 혼자 결정하지 못하고 물어봐야 안심이 된다. 결정한 일도 확신하지 못해 불안해하고 선 듯 행동으로 이어지지 못한다.
백신 1차를 맞고 몸살을 앓았다. 몸살이 와도 일을 했고, 심하게 두근거리는 심장이 이러다 밖으로 튀어나오는 것이 아닐까 싶은 걱정 가득한 날도 책방을 지켰다. 침대에 누워있는 것이 죄악시할 정도로 오기가 얼마나 충만한지 기를 쓰고 일을 해낸다.
갱년기 증세인지, 백신 후유증인지 모를 심장의 요동은 마음도 요동치게 했다. 말과 행동을 다 순수하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별거 아닌 일에도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탄다.
그동안 사람들의 행동이 내 앞에서 보이는 것이 진심일 거라 믿었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좋으면 상대도 좋을 것이라 생각하고, 내가 친구라 생각하면 날 친구로 여길 것이라고 믿었다. 나이를 불문하고 누구나 가깝게 지내는 성향이 나의 장점이라고 생각했고, 상대도 그럴 것이라고 믿었다.
어느 순간부터인지 내가 생각한 관계가 아니었음을 조금씩 느끼기 시작했다. 내가 함께 해야 좋아할 거 란 자아도취형 미친 착각이 치료받지 못할 불치병처럼 느껴졌다. 절실히 느낀다. 적당히 자리를 피해 줘야 하는 센스, 알아도 모른 척해야 하는 지혜, 서운해도 쿨한 척해야 하는 연식, 그럼에도 손 내밀고 거룩한 척해야 하는 가증함이 필요한 때란 걸.
어쩌면 지금까지 착각 속에 산 날 어리석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겠지. '아직도 그걸 몰랐냐?' 하는 조롱 섞인 소릴 들어도 싸다는 생각도 든다. 왜 난 아니라고 생각했을까? 난 왜 꼰대가 아니고 뭔가 특별한 사람처럼 함께 하길 원한다고 믿었는지...
딸에게 하소연하며 넋두리 하다 멈칫 한 이유도 누구라도 나 힘든 거 알아줬으면 하는 본능에서 필터링 없이 징징거리는 낯선, 아니 숨기고 싶은 날 보았기 때문이다. 점점 이런 낯설고 보고 싶지 않은 나와 만나겠지? 늙어감의 서러움은 방울방울 눈물로 맺히기도 하고, 존재 의미의 퇴색은 깊은 먹먹함으로, 고독한 울먹임으로 밤을 지새운다. 언제쯤 받아들이고 아무렇지도 않아질까? 나의 예상의 답은 절대 익숙해지지 않을 것에 동그라미를 친다. 더하면 더하겠지.
인스타그램에 반가운 세 청년의 사진이 올라왔다. 다 정겨운 청년이라 글에 댓글을 썼다.
"아는 카페 아는 세 사람"
"다음엔 넷이 같이 와요~"
예전 같으면 "그래 그래~담엔 같이 가자~~" 당연한 듯이 댓글을 쓰고 함께 갈 날자를 생각해봤을 것이다. "진짜 내가 함께 하길 원하는 걸까?" 잠시 생각에 잠긴다.
다른 청년이 댓글을 올렸다
"함께 하면 영광이죠~~"
그동안 이런 말을 많이 들었다. 그렇게 말해주는 것이 참으로 큰 위로가 된 적이 많았었다. 그 말을 100% 믿었었다. 물론 거짓은 아니란 것을 안다. 그러나 예의를 갖춘 인사말일 경우도 있었다는 것을 염두에 둬야 한다. 지금은 눈치 없이 끼어있는 주책맞은 사람만이 아니길 바라는 마음이다. 어쩌다 하소연하는 것도 부끄러움으로 주저되는 내 인생이지만 이렇게 내 맘을 쏟아낼 글 쓸 공간이 있다는 것이 참 다행이다.
혹시라도 다시 나의 버거움이 들키더라도 부디 측은하고 안쓰러운 눈으로 보지 말아 주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