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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관 Nov 10. 2024

오뎅탕과 오뎅국 2

그래 뭐 그랬지


아버지와 함께 가던 목욕탕에는 겨울에 탈의실 중간에 평상이 있고 앞에 거기에 난로가 있었다. 난로 위에는 큰 냄비 안에서 오뎅이 보글보글 끓고 있었다. 하나에 얼마였는지 기억은 없지만 목욕을 하고 나와서 머리에 물기가 덜 마른 채로 어른이고 아이고 발가벗고 서서 오뎅을 먹는 모습이 어쩐지 의식을 치르는 모습 같았다. 기괴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누구도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고 목욕을 나와서 오뎅을 하나씩 먹었다. 


장사가 잘 되었다. 너도나도 전부 오뎅을 먹었으니까. 당연하게도 여탕의 탈의실 모습은 모르겠지만 남탕의 모습은 꽤나 재미있다. 주로 아버지들의 재미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드라이기로 머리는 말리지 않고 사타구니만 말리는 아저씨, 수면실(라고 하기에는 거창하지만)에서 하나만 입고 잠을 자는데 그 하나가 양말인 아저씨, 등을 미는 때 미리 기계에 등만 얼마나 세게 밀었던지 등말 벌겋게 된 아저씨 등 재미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온도차이로 생긴 수증기가 가득한 목욕탕에서 있는 힘을 다 해 아버지의 등을 밀고 있으면 아버지는 시원하지도 않으면서 아 시원하다고 하면서, 팔다리도 가는 나에게 넌지시 용기와 칭찬을 주었다. 아버지는 무뚝뚝하고 대 놓고 속에 있는 말을 하는 스타일이 아니었기에 그게 아버지로서 최대한 자신의 의사표현이었다. 목욕탕을 나오면 맞이하는 겨울의 공기는 아주 차갑고 몹시 상쾌했다. 새벽의 이슬 같은 느낌일까. 투게더를 양손으로 들고 집으로 오면 그때서야 저녁을 먹었다. 대략 저녁 8시 정도. 우리는 밥상에 둘러앉아서 겨울 저녁을 먹는데 어머니가 오뎅탕을 끓여 왔다. 집에서 먹는 오뎅탕은 밖에서 먹는 오뎅과는 맛이 다르다. 좀 더 정돈된 맛이라고 해야 할까. 그래서 밖에서 먹는 오뎅보다는 맛이 떨어졌다. 


하지만 밖에서는 오뎅탕에 밥을 말아먹지 못하지만 집에서는 가능하다. 밥을 다 먹고 나면 우리는 냉장고에 넣어둔 투게더를 꺼내서 먹었다. 하드는 여름에 맛있지만 아이스크림은 겨울에 맛있었다. 겨울의 토요일 저녁은 행복했다. 밤이 되면 전부 이불을 덮고 티브이를 보았다. 아마 토요명화 같은 프로를 봤을 것이다. 겨울이니까 크리스마스 대소동을 봤다고 치자. 코미디 영환데 적당히 야한 장면이 가득한 미국미국 한 영화다. 아주 어린 줄리엣 루이스가 나온다. 줄리엣 루이스는 황혼에서 새벽까지도 그렇고, 그 옛날 로버트 드니로가 무시무시하게 나온 케이프 피어에서도 그렇고, 당차고 거센 이미지가 있다. 하지만 어린 시절에는 그런 외국 배우들에 대해서 알지 못했다. 재미있는 크리스마스 영화를 보다가 잠이 드는 게 좋다는 걸 그때는 알지 못했다.


코로나가 도래하기 전 조깅을 하고 돌아오면서 포장마차에 서서 오뎅을 하나씩 사 먹었다. 특히 겨울에 먹는 오뎅은 유독 맛있었다. 이유는 아무래도 어린 시절의 추억이 덧입혀졌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보통 8킬로미터 정도를 조깅을 하니까 겨울에 그 정도 달리면 후끈하지만 금세 몸은 식어버리고 만다. 그때 버티고 서서 먹는 오뎅은 꿀맛이었다. 오뎅국무 역시 맛있었다. 오뎅국물은 그저 무로 시원하게 우려낸 국물이 좋다. 그 안에 게껍질이나 새우를 넣어서 우려낸 국물은 나는 별로다. 매운 국물도 별로다. 그저 무로 끓여낸 오뎅국물이 좋다. 그렇게 겨울에도 오뎅을 하나씩 먹으면 사라져 가는 어린 시절의 겨울철 오뎅 맛을 느끼려고 했다. 오뎅과 행복을 결부시켰다. 그러나 코로나 시기가 되면서 포장마차가 문을 닫았다. 조깅을 하는 활동 반경 내에 있던 오뎅 포장마차가 전부 사라졌다. 코로나 시기는 그런 분위기였다. 뭔가 바이러스가 옮겨질 것 같은 분위기는 아예 없애 버렸다.


바이러스는 사람에서 사람으로 옮겨간다. 그렇게 바이러스가 전염이 잘 되는 곳이 목욕탕이었다. 어릴 때는 당연하지만 그걸 몰랐다. 감기가 걸리면 어른들은 목욕탕에서 뜨거운 물에 몸을 푹 담갔다가 오면 낫는다고 했지만 목욕탕을 나오면 기침이 더 났다. 그때는 그걸 몰랐다. 지금은 감기가 걸리면 사람들이 피하거나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고 학교도 가지 않고 신경을 쓴다. 그러다 보면 날카로워지지만 어릴 때는 기침을 하면 좀 포근한 느낌이었다. 부모님은 따뜻하게 보리차를 끓여 주었고 담요를 덮어 주었다. 그래도 기침이 심하면 약을 하나 먹고 잠을 푹 자고 나면 기침이 싸그라 들었다.


요즘은 손을 자주 씻어서 그런지 감기도 잘 걸리지 않고 오뎅도 먹지 않는다. 인공지능으로 세상은 재미있어졌는지 모르겠지만 인간은, 적어도 나는 재미가 없다. 몸에서 재미라고 하는 세포들이 점점 떨어져 나간다. 일상을 공허하게 보내고 있다. 만약 바쁘게 보낸다고 해도 바쁜 일상이 공허하다고 느낄지도 모른다. 공허라는 공간이 있다면 나는 지금 그 어떤 상황이든 그 공간을 지나가야만 해서 중간을 지나가고 있는 것뿐이다.


오뎅탕으로 따뜻하고 든든하게 배를 채우고 두꺼운 이불속으로 쑥 들어가 토요명화를 본다. 머리만 빼꼼 드러내놓고 더빙된 토요명화를 보고 있으면 잠이 오소소 떨어진다. 잠들지 않으려고 아버지에게 계속 질문을 한다. 재미없는 영화라도 아버지가 영화를 설명해 주면 마법처럼 재미있었다. 더불어 잠은 더 쏟아졌다. 창밖으로 휘이잉 하는 바람이 실내로 들어오려고 화가 났지만 우리는 절대 창문을 열어주지 않는다. 잠이 쏟아진다. 잠들지 않으려고 악착같이 버티지만 결국 천사의 망치를 맞고 어느 순간 까무룩 잠이 들어 버린다. 그래서 토요일마다 보던 겨울의 토요명화의 결말은 알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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