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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관 Dec 17. 2024

그리운 날도 사라질 날도 50

소설


50.


 “자네는 말이 별로 없군. 나도 한때는 자네 같았다네.”      

         

 슈퍼 주인은 또 막걸리를, 라면을 덜어 먹던 자신의 밥그릇에 부어서 마시고는 나에게도 막걸리 한 잔을 더 부어주었다. 나는 이제 그만이라고 하려다가 그대로 받아먹었다. 실내의 공기는 앉아있는 나와 공통점이라고는 전혀 없는 할아버지를 이어주고 있었다.         

      

 “실은 말을 많이 하고 싶지만, 입 밖으로 말이 나오면 생각과는 다르게 나와서 저도 놀랄 때가 많아요. 그래서 굳이 필요 없는 말을 하지 않으려고요.”         

      

 나는 바닥에 조금 남아있는 막걸리를 다 마시고 슈퍼 주인에게 막걸릿병에 남아있는 나머지 막걸리를 할아버지에게 다 부어주었다. 슈퍼 주인은 아주 맛있게 막걸리를 마시고 김치를 집게손가락과 엄지손가락으로 걸 하게 집어서 입에 넣고 턱을 움직였다. 김치를 씹는 경쾌한 소리가 하얀 눈밭으로 울리는 것 같았다. 주인 할아버지는 내 마음을 알았는지 김치 종지를 내 쪽으로 밀어주었다.    

           

 “지금껏 살면서 나도 많은 말들을 하면서 살았지. 그렇지만 많이 해버린 말들에 대해서 책임을 반드시 져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네. 그건 말이지 시간이 지나서 보면 쏟아냈던 수많은 말들이 다 기억나지 않는다는 거네. 어딘가 소멸하여 버린 말들은 그대로 그렇게 잊히는 거라네. 내가 기억하고 싶은 말만 기억이 나더군. 마찬가지로 사람들도 그렇지. 자신이 기억하고 싶은 말만 기억한다네. 그것이 사람들이 아무렇지 않게 매일 살아갈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네.”


 “어떤 모임에서 사람들은 서로 오랜만에 보니까 말을 많이 하지. 서로 질세라 말을 쏟아낸다네. 그래도 사람들은 마지막 사람이 한 말만 기억하지. 이미 나이가 들어버리면 그런 것마저 신경이 쓰이지 않아. 그런 거라네. 자네도 너무 필요한 말만 하지는 말게. 필요한 것은 불필요한 것이 많이 있을 때 빛을 발한다네.”               

 주인 할아버지는 초탈한 모습 같았다. 막걸리를 마셔서 그런지, 나와 이야기해서 그런지 기분이 좋은 듯 상기된 얼굴로 조작조작 걸어서 난로의 땔감을 밖에서 한 움큼 들고 들어왔다. 땔감을 난로 안에 집어넣으니 땔감의 나무는 타닥거리는 소리를 내며 타들어 갔다. 난로의 입구를 열고 있으니 나는 나무가 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가스레인지의 불은 사람을 잡아끄는 매력이 없는데 이렇게 나무가 타닥타닥 타오르는 모습은 늘 끌린다. 바람이 없는데도 불은 자유롭게 타올랐다. 슈퍼 주인 할아버지는 한동안 나에게 말을 많이 했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 할아버지는 학창 시절에 축구선수가 되려고 했다. 하지만 결국 되지 못했다. 아내가 살아있었으면 어떤 모습일까. 하지만 죽어버린 그 시점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채이기 때문에 회환이 예전만큼 되지 않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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