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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관 Dec 18. 2024

그리운 날도 사라질 날도 51

소설


51.


 “내 마누라는 영원히 아름다운 나의 모습이야”라며 슈퍼 주인은 자기 가슴에 손을 댔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불과 얼마 전까지는 성욕이 있었다고 했다. 바닥에 미미하게 남아있었던 성욕이라는 것이 전부 비었을 때 이제 죽어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면서 아주 편안하다고 할아버지는 말했다.


 슈퍼 주인은 땔감을 난로에 계속 집어넣었다. 그것은 일종의 반복으로 운동을 대신했다. 주인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인간은 나이가 들어가는 것을 거부할 수는 없어서 어느 정도의 시점을 지나고 나면 그것을 받아들이게 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과연 나도 받아들이고 알게 되는 날이 올까.    

 

 나에게 잘못 채워진 단추를 올바르게 채울 수 있을까.    

 

 아니면 저 밑단 끝까지 가서 옷을 가위로 잘라내야 할까.     

          

 슈퍼 주인은 나에게 그런 말을 했다. 인간의 늙음은 끝에서부터 안으로 들어온다고 했다. 끝이 먼저다. 손톱 끝과 발가락, 머리카락에서 시작된다고 했다. 그리고 인간은 죽으면 부패가 시작되는데 페니스가 가장 먼저 썩는다고 했다. 죽음은 끝에서 안으로 서서히 영역을 좁혀오는 것이다. 늙음과 죽음은 그런 것이다. 나는 어쩐 일인지 주인 할아버지의 말을 듣고, 순간적이었지만 그처럼 빨리 늙어 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전에는 전혀 느끼지 못했던 감정이었다. 빨리 늙어 버리면 지나간 일도 금방 잊힐 것이다. 잘못 채워진 단추 따위 이미 어쩔 수 없다며 받아들일 수도 있을 것이다. 서서히 늙어가 봐야 지나간 일도 서서히 잊을 뿐이다. 그런 생각을 하니 무서웠고 기이한 시간에 들어가 있는 것 같았다. 지구 저편 어딘가 모르는 곳에서 숨 쉬고 있다는 이상한 기분이었다.     

          

 나는 슈퍼 주인에게 잘 먹었다는 인사를 하고 그곳을 나왔다. 주인 할아버지는 언제든 와서 라면을 먹고 가라고 했다. 나는 허리를 구십도 가까이 굽혀 인사를 했다. 눈이 내렸지만, 사람들은 제 갈 길을 오가고 햇살은 눈 위에 내려앉아서 반짝였다. 바람이 없는 차가운 날이었다. 나는 천천히 그 속을 걸었다. 선배는 곧 입대할 것이고 나는 고향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녀는 어떻게 될까. 자신 옆의 빈 여백을 어떤 식으로 채워나갈까. 아니면 그대로 둘까.         

      

 그녀의 모습을 떠올리면 애달팠다. 바닥에 쌓인 눈은 내린 지 몇 시간 만에 더러워지고 빗자루에 쓸려 천덕꾸러기 신세가 되어 버릴 것이다. 하늘에서 떨어질 때만 눈으로서의 환상과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세상의 아름다운 것들은 금세 없어진다. 아름다운 것, 아름다운 것의 소멸은 나를 아프게 한다.    

           

 “눈은 모든 것을 덮어버리지. 성당도, 사찰도, 아파트도, 산에도 내리고 나면 똑같게 만들어버려. 저 눈밭에 나가서 서 있으면 누구나 할 것 없이 눈을 맞으면 다 같아진다네. 결국 인간은 눈이 내리는 저곳으로 가는 똑같은 존재지.”         

      

 슈퍼 주인의 말이 맴돌았다. 눈은 모든 풍경을 같게 만들어 버린다. 다 같아진다. 아름다운 눈은 쌓여서 시커멓게 되어 버리고 더 이상 겨울을 상징하는 그 눈이 아니게 된다. 인간의 생각이 만들어낸 모순이다. 눈싸움하는 이들도 눈에 띄지 않았으며 집안에서 집 밖을 쳐다보는 아이들의 모습도 없었다. 주택가는 흰 눈이 내려 길을 덮었고 발자국만 그림을 만들어냈다. 나는 그림을 만들어낸 발자국이 난 길을 밟으며 고개를 숙이고 옷깃을 좀 더 여미고 자취촌을 걸었다. 새벽에 나와서 꽤 먼 거리를 걸었다. 다리는 아프지 않았지만, 페니스에 미약하나마 통증이 남아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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