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65.
나는 옷도 잘 갈아입지 않았고 며칠 만에 한 번씩 씻었다. 책도 읽지 않았고 티브이도 보지 않았다.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 걸음을 옮길 뿐 잘 걷지도 않았고 밤과 낮의 구분도 힘들었다. 먹는 것이 의미가 없다고 느꼈고 어떤 음식도 맛을 느낄 수 없었다. 당연하지만 음악도 뜨지 않았고 생각하는 것도 피하려 했다.
하지만 생각은 의지와 다르게 쓰나미처럼 밀려왔다가 쓸려갔다. 생각은 곰팡이처럼 습한 곳을 대상으로 영역을 점점 부풀려갔다. 그러다 아버지의 후배 권유로 자동차 회사의 협력업체에 취직했다. 헤드라이트 만드는 회사였는데 자동차 회사의 굉장한 수출이 성사되는 바람에 그해에는 야근이나 야간을 돌아가며 생각 없이 기계적으로 일을 했다.
몇 개월만 하다가 나와야지 했지만 어쩔 수 없이 만류하는 회사의 부장 덕분에 지금까지 회사에 다니고 있었다. 그녀가 사라지면서 내 속에도 무엇인가가 빠져나갔고 그 자리에는 아무것도 끼어들 수가 없었다. 새벽에 끝나가는 시간대에 집을 나가서 회사에 출근하여 유니폼으로 갈아입고 점심시간까지 반복적인 일을 하고 점심을 한 시간가량 먹고 잠시 해가 비치는 곳에 앉아서 멍하게 앞을 보다가 해가 떨어지는 퇴근이 올 때까지 또다시 반복적인 일을 했다.
반복되는 일이라 전날 마신 술이 덜 깬 직원 중 하나가 일전에 손가락이 잘려 나가는 사고가 있었다. 회사는 점점 강압적인 분위기를 이어갔고 우리는 ‘모던 타임스’의 찰리 채플린처럼 감시받으며 일과시간에는 열심히 작업에만 몰두했다. 일을 마치면 나는 직장 상사에게 끌려 회식 자리에서 술을 진탕 마셨다. 누군가에게 끌려가는 것에 대한 모호한 안도감이 있었다. 닿을 곳이 없는 무엇인가를 향해서 팔을 뻗어봐야 허공에서 손짓만 허무하게 하다가 끝났다.
술을 마시고 이동해서 또 술을 마셨다. 일주일에 4일 이상은 술을 마시고도 멀쩡하게 아침에 일어나서 일을 하고 또 술을 마셨다. 이렇게 술을 마시다가 시인 박인환 같은 죽음을 맞이할 것 같았다. 옆에서 동료가 버지니아 울프 담배를 피웠다. 프루스트는 자아가 군대 행렬 같다고 했다. 여러 자아가 상대방에 따라서 나타난다고 했는데 내 속의 자아는 달랑 하나였다. 대표적인 자아가 없었다.
그녀와 함께 죽어버렸으니까.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