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청년 클레어 Sep 21. 2024

[동화] 3. 이탄의 추방

악의 징벌과 지구인들


다솜이는 꿈속에서 거대한 숲과 산들을 보았다.


구름 위에 떠있는 거대한 지층은 마치 수박에서 잘려 나온 사각뿔 조각 같았다. 아래쪽엔 고구마처럼 투박한 암석 흙덩어리들 주렁주렁 매달고 있었다. 축구장 잔디밭처럼 파릇한 녹음이 대지를 뒤덮고 있는가 하면, 사방으로 쏟아내는 폭포수는 구름에 떨어질 때마다 사탕 알갱이를 공기 중으로 품어냈다. 요정들은 그 사탕 알갱이를 채집해 손위에서 입김을 불며 흔들어 댔는데, 그럴 때면 알사탕은 이내 솜사탕으로 변했다.  


빨주노초파남보 다양한 야광불빛을 내는 동식물들이 온 땅에 가득했다. 요정과 난쟁이들은 너무도 해맑게 뛰놀고 있었는데, 그들은 불행이나 슬픔을 전혀 모르는 존재 같았다. 난쟁이들은 어른 팔 길이 만한 키였고 근육이 단단해 보이는 것으로 보아 숲의 탁월한 일꾼 같았다. 요정들은 난쟁이들보단 아담했는데, 어른 아래팔 키 큰 요정부터 주먹만 한 꼬맹이 요정도 보였다. 자세히 보니 인간의 손가락 길이 아니 엄지손톱만 한 존재들도 보였는데, 그들끼리는 핑커족이라 부르는 것 같았다.


향기로운 멜로디가 피어나는 숲과 신비로운 산, 곳곳에 오래된 성들은 마치 동화책에서 막 튀어나온  풍경 같았다.



좀 전까지 숲 속을 뒤흔들었던 소리는 큰 산 꼭대기에서 들리는 음성이었다. 이제껏 들어보지 못한 소리였다. 지구를 움직이는 거대한 엔진소리보다 더 큰 굉음이었다. 아마도 그 세계를 설계한 가장 높은 존재, 주인의 소리 같았다. 어디서고 형체는 보이지 않았고 묵직한 음성과 강렬한 불꽃, 드문드문 피어나는 연기만 느껴질 뿐이었다.  


정신없이 흩날리는 꿈의 몽롱함 속에서도, 요정들과 난쟁이들이 뿜어내는 현기증 나는 군중 소리는 선명하게 들렸다.     


"야! 야! 로고스가 산 위로 다가오고 계셔. 큰 일이다. 모두 하던 일 멈추고 조용히 있어"


"이번에도 이탄이 때문인가?"


"그 녀석이 결국 문제를 일으킬 줄 알았어. 아, 참.. 큰 일 났네."     


다솜이는 이 대목에서 피식 웃음이 나왔다. 마치 월요일 전체 조회시간에 몸을 비비 꼬며 애들끼리 속닥거리는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다음 순간 쿵! 소리를 내던 숲의 괴성은 두려움을 자아내는 공명으로 울리기 시작했다.


"이탄, 이 녀석! 네 잘못을 알겠느냐?"


요정집 버섯지붕 밑에 쪼그리고 숨어있던 이탄은, 누군가 밀었는지 숲 중앙의 기억나무 아래로 던져졌다.

  

"...."


로고스의 맹렬한 다그침은 자비가 없었다.


"어디를 가든지, 매일 불평 불만만 쏟아내고, 에코나라 요정과 난쟁이들을 욕하고 툭하면 마음숲 동식물들에게 성질부리고 말이다.

그 벌로 이미 투덜거릴 때마다 털이 하나씩 솟아나는 벌을 받않았느냐? 그것도 모자라서 내 책망을 고도 에코나라를 돌아다니며 삿대질에 욕설까지 퍼부었다지.

흠.. 더 이상 에코나라의 행복을 해치는 너를 그냥 둘 수가 없구나."


이탄이라 불리는 털북숭이는 그제야 상황판단이 섰는지, 사시나무 떨듯이 땀을 뻘뻘 흘리기 시작했다. 참, 이상한 것은 두려워 떨면서도 절대 자기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다.


"나도 잘하려 했는데. 다들 저를 괴롭혔어요. 상처 주고 놀리고 말이죠."


로고스는 감정을 냉철하게 다스리며 직전보다 더 단호한 음성으로 말했다.


"구제불능 녀석 같으니.. 쯧쯧쯧. 너는 이제 저 우주밖 다른 행성에서, 홀로 수고하며 너만의 나라를 일구거라. 거기서는 네 마음껏 투덜대고 욕하고 성질을 부리려도 좋다. 단, 그런 삶도 2만 년까지만 허용되는 줄 알아라. 그 후엔 네 존재도 소멸될 것이다."


"아니, 제 말 좀 들어봐 주세요. 그건 너무 잔인하잖아요. 여긴 가족과 친구들도 있고 맛있는 열매도 있는데, 저 혼자 떨어져서 어떻게 살아요?"


"네 동족은 스스로 재배해서 만들 수 있을 테니, 이젠 군말 말고 떠나거라!"


쿵! 한 번 더 큰 소리가 나자 작은 털북숭이 이탄은 까만 우주밖으로 순식간에 내던져졌다. 진짜 빛의 속도 같았다. 우주엔 털북숭이의 울부짖는 비명 소리로 한때 미세한 떨림이 있었다.


이탄은 투명한 공기풍선에 잡아먹혔고 이내 정적이 흘렀다. 저 멀리 한 별이 잠시 반짝였던 것으로 미루어 보건대, 이탄은 식물의 씨처럼 황무한 행성에 홀로 떨거져 안착한 것 같았다. 그제야 로고스의 음성이 다시 들렸다.


"이탄은 오늘부로 추방이다. 다시는 이곳 에코나라엔 돌아올 수 없다. 다른 행성에서 스스로 수고하며 자신을 닮은 동족들을 일구며 살아갈 것이다.

당장 이탄을 파괴하고 싶지만 이만 년 시간을 남겨둔 것은, 아름다운 별 지구의 인간들, 그들의 선악에 대한 의지를 단련할 도구가 필요해서다."


에코나라. 인간들을 돕는 또 다른 나라의 기원은 지구의 시작보다 훨씬 앞서 있었다. 인간이 살아내는 삶은, 메아리가 되어 에코나라에 앨범처럼 하나하나 축적되어 갔다.


에코나라는 지구의 어머니와 같은 곳이며, 인간들의 좋은 감정과 좋은 기억은 에코나라의 중요한 식량이 되었다.






타임머신을 타고 세월이 지난 현재, 에코나라의 거대한 산을 사람들이 삼삼오오 걸어 올라갔다가는 이내 내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사람들은 그 산을 허무산이라 부르는 것 같았다.


"헛되다. 헛되다."


이 기묘한 소리만 들렸다.




또 한 번 쿵! 큰 소리가 났다. 다솜이는 영혼이 빠졌다 돌아온 것 마냥 잠에서 깨어났다. 엄마가 파출부 일을 마치고 들어오며 현관문을 닫는 쾅! 소리에 깬 것이다.


다솜이에게 이 꿈은 낯설지 않았다. 자주 꾸는 꿈이기도 하거니와 엄마가 만들어준 동화에 종종 등장하는 대목이기 때문이다.


"다솜이 잤니? 숙제했어?"


엄마는 다솜이의 얼굴을 응시하며 신발을 마저 흔들어 벗고선 거실 슬리퍼로 갈아 신었다. 다솜이네 집에서 실내화를 신는 사람은 엄마뿐이다. 엄마는 무슨 의식이라도 하듯 집에 들어오면 꼭 슬리퍼를 신었다.


다솜이는 목이 잠긴 목소리로 대답했다.


"응? 응!..."


거실에, 작년 겨울 중고로 산 소파는 바깥의 찬바람과 어디서 묻혀 왔는지 모를 반찬냄새를 받아냈다. 이 낯선 온도와 냄새는 처음엔 싫었지만, 언제부터인가 익숙해졌고 이내 안도감을 주었다. 생명은 살아있는 한, 여러 온도와 냄새를 남기기 마련이다. 엄마의 생기를 증명하는 삶의 은유들에 다솜이는 새삼 감미로움을 느꼈다.


엄마는, 다솜이 안색을 살피더니 이내 손을 내밀어 그 이마를 더듬고는 입술을 내밀었다. 엄마가 입술을 내밀거나 삐죽거리는 모습은 다솜이아픔에 공감한다는 특유의 애정표현이었다. 엄마는 미열을 느꼈던지 다솜이에게 오렌지 냄새의 부루펜 시럽 한 스푼을 먹여 주었다. 낮에 주전부리로 먹어댄 다 식어빠진 붕어빵 덕분에 저녁은 안 먹고 더 자도 된다 했다. 다솜이는 이때다 싶어, 엄마에게 자기 전에 동화책을 읽어 달라고 졸랐다. 다솜이가 아픈 날은 횡재하는 날이다. 그런 날이면 엄마는 뭐든 땡강을 받아 주기 때문이다.


"데디와 할머니 저녁식사 마치면 다락방에 가서 읽어줄게"


다솜이는 신이 났다. 엄마와 다솜이에겐 비밀 방이 있다. 조금 있으면 그 방에 들어간다.

 


다솜이네 거실 창을 비집고 나온 대화들은 하늘에 철자를 나부끼며, 어느 고속전철 승강장을 지나간다. 바람이 제법 쌀쌀해지기 전, 모두들 겨울방학을 나기 위해 분주했다. 심드렁한 일상으로 뒤덮인 도시는 종종걸음과 잰걸음, 박진감 넘치는 걸음들이 자아내는 음률 속에서 지루함을 이내 감추고 있었다.


도시의 평온을 깨뜨리듯 철자 한 글자가 전철역 플랫폼에 쨍그랑 떨어졌다. 노신사는 고속전철을 향해 등을 잔뜩 웅크린 채 걸어갔고, 무겁게 다문 입에선 간헐적으로 하얀 증기가 추운 날씨를 헤치고 나왔다. 고속전철 안은 좌우 2열씩 좌석이 배치되어 있었고 노신사는 측 창가 쪽에 자리를 잡았다.


오래 투박해진 중절모자와 마스크를 낀 채 레일 깔린 먼 길을 바라보던 노신사, 그의 눈빛은 창가에 걸쳐져 이윽고 지난한 세월의 어느 한 점에 멈춰 서버렸다. 


마스크를 벗어 답답한 숨을 뿜어내는 얼굴은 덥수룩한 수염으로 어수선해 보였다. 미간의 옅은 주름과 인자한 표정은 헛헛한 삶을 통달한 연륜과 깊은 애수를 담고 있었다.


그때 희뿌연 유리 창문 너머에서 칠판의 분필이 쉴 새 없이 글자를 자각해 내고 있었다.

 










[스포일러] 함께 만들어가는 클레어의 어른동화


아래 두 영상의 스토리를 동화 중간 어딘가에서 소설화해서 녹여볼 예정입니다. 에코나라 요정들이 지구에서 경험한 아름다운 감정들 중에서 나올 듯도 해요.

최근 쉬는 날이면 짝꿍과 함께 보는 영상들은 주로 이런 주제랍니다 :)  



< 중국 화산의 짐꾼 부부>

https://youtu.be/5yM9Gso6YUA?si=-7RFsQe9b2EzxBGS


<목숨을 건 중국 잔도공>

https://youtu.be/rJOs530YXYo?si=ApzTLa5xWtIcJs-2


이전 02화 [동화] 2. 오선지와 빨래집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