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청년 클레어 Sep 07. 2024

[동화] 2. 오선지와 빨래집게

조숙한 어린이의 자학감은 배로 무겁다

[연재 브런치북] 투덜이 털보와 마음숲 글의 자유로운 집필을 위해서 댓글창을 닫아 놓은 점 양해 부탁드려요


본 동화 연재 관련 서사는 아래 링크 참고해 주세요.

13. 생텍쥐페리 '어린 왕자'

동화는 처음이지? <9/5 업데이트>


현대인 우울증의 주원인중 하나인 '자기 비하'와 '자학감'을 주제로 '투덜이 털보'와 함께 나는 따뜻한 자아 치유여행입니다. 어른 동화를 표방하지만 어린이 눈높이에서도 씁니다 :)









01화 [동화] 1. 투덜이 털보의 탄생

어느 초등학교 교실밖 복도 한복판. 신주머니를 잃어버린 초등학교 1학년 아이가 당황해 찾고 있어. 근데 커다란 가방을 든 심술궂은 선생님이 나타나 다그치는 거야.

"너는 애가 왜 그 모양이니? 다들 하는, 그 신주머니도 못 찾니. 아휴, 내가 못 살아. 어디에 두었냐고 묻잖아!"

선생님의 날카로운 목소리에 더 대답을 못하고 쩔쩔매는 아이, 그것이 도리어 더 답답했던 선생님은 성을 내며 소리를 질렀어. 반 아이들은 호통치는 소리에 하나, 둘 주위를 빙 둘러 수군거렸지. 선생님은 주위를 둘러싼 한 아이의 손에 들린 신주머니를 낚아채더니, 눈물을 글썽이려는 아이의 머리를 여러 차례 내리 쳤어. 신주머니를 못 챙겼다는 이유가 전부였어.


몽울거리는 눈물이 지면에 닿는 순간, 이 찰나의 속도는 때로 영겁의 거리처럼 멀기만 하다. 끝내 신주머니를 찾지 못한 꼬마숙녀 다솜이는 커다란 책가방을 짊어지고, 축 쳐진 걸음으로 도시의 아스팔트를 걷어차며 걸었다. 어른 걸음으로 금세 갈 거리를, 부끄러움을 등뒤로 묶어 놓은 채로 한참 앞을 헤쳐 걸었다.


'등뒤로 묶어버리면 보이지 않아'





좀 전까지 홍당무처럼 빨개졌던 얼굴은 이 마법의 주문 덕분에 조금씩 나아졌다. 키가 난쟁이처럼 줄어든 다솜이는 축 늘어지려는 어깨에 빨래집게를 갖다 댔다. 인생의 오선지엔 여러 줄의 빨랫줄이 있다. 마음이 오선지의 밑바닥으로 내동댕이 쳐질 때, 다솜이는 마음의 빨래집게를 꺼내 심장의 파편들을 모아, 영차 영차 오선지 계단을 올라간다. 꼴찌 '도'에 머물러 있던 심장은 어느새 '솔'을 넘어 윗줄 '도'까지 올라간다.


슬픔은 무겁게 다가오며 엄포를 놓지만 실은 겁쟁이다. 빨래집게를 보면 도망간다. 이 빨래집게는 다솜이 어머니가 만들어 준 인생의 비밀이다.


'우리 착하고 예쁜 딸. 너는 잘하고 있어. 실수할 때에조차 너는 앞으로도 더 잘할 수 있어'




두더지처럼 머리를 땅에 숨긴 채, 한참을 걷는데 떡볶이집이 보였다. 빨간 떡볶이, 오뎅, 튀김을 보는 순간 눈치 없이 군침이 돌았다. 치마에 손을 넣고 돈을 뒤져봤지만 허탕인 채로 손톱에 애꿎게 주머니 떼만 끼었다. 까맣게 비집고 나온 먼지 떼들을 보며, 며칠 전 전기세 낼 돈도 없다며 한숨 쉬던 엄마 냄새가 코끝을 울렸다. 비기 싫은 손톱 떼를 흩어보아도 질퍽대며 떨어지지 않았다.


긴 하굣길이 한없이 지루하고 피곤했다. 하루가 이리 길어도 되는 건지 숨이 턱턱 막힐 것만 같았다. 거이 온 것 같은데, 길을 돌아서고도 한참 찐득한 거리를 남겨 두었다. 저기 보이는 계단도 올라야 했다.

  
'걷고 오르는 것을 그냥 탁! 멈출 순 없을까.'



화창하고 생기어린 멀쩡한 세상이 야속하기만 했다. 멈추는 법을 마저 아니 차마 헤아리지 못한 다솜이는, 울렁이는 오후 부산한 가게들을 신발을 질질 끌며 마저 걸었다.


인생의 슬픔엔 휴가가 없다. 심장에 뭉그적 통증이 생겨도 걷던 길은 마저 걸어야 하고, 이 하루도 잔인하게 기어이 마무리해야 한다. 마음이 쉬고 싶다, 다솜이는 생각했다. 



어제보다 더 무거워진 가방엔 부끄러움, 슬픔, 억울함, 깨어진 하루의 얼룩들이 가득했다. 모멸감과 수치심, 서러웠던 감정들이 땀범벅이 되어 무의식 밑바닥에서 다솜이를 갉아먹곤 했지만 다솜이에겐 또 하나의 빨래집게가 있었다.


'엄마가 알면 걱정하실 거야. 엄마가 슬프면 안 돼.'


집에 도착할 즈음 다솜이의 가방은 아까보다 더 많이 부풀어 올랐다. 작달막해졌던 키는 빨래집게 덕분에 다시 자라 어른이 된 것 만 같았다. 빨래집게는 오늘도 다솜이를 아무 일 없는 착한 아이로 만들어 주었다.


오늘따라 더 커진 가방은 아무도 눈치채지 못 했다.  




집에 도착해 현관에 들어서는데 거실이 어두웠다. 때마침 어른 남자의 기침소리가 들린다. 다솜이의 데디였다. 이 어른 남자는 낮시간에도 집에 내내 머문다. 몇 년 된 것 같다. 이틀에 한 번씩 십자가 달린 건물에 다녀오는 일이 전부였다. 어른 남자는 신장투석하러 다녀오는 것인데, 다솜이는 배가 많이 아프다고만 알고 있다. 다만 어머니가 가끔 혼잣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왜 그 병에 가습기까지 써가지고..'


데디는, 다솜이가 애기 때부터 어깨 무등과 배 비행기를 자주 태워주곤 했다. 그토록 환했던 데디가 언제부터인가 배가 아프기 시작하더니 회사도 안 가고 어두운 표정으로 집에만  시작한 것이다. 데디가 병원에 다녀올 때면 다솜이는 혼자 생각했다.


'다 나 때문이야...'


다솜이는 배 비행기를 하루에도 몇 번씩 조르곤 했던 것이다. 데디가 배 아픈 것은 자기 때문이라는 자책감이 수시로 콕콕 찔렀다. 병에 대해 제대로 알리 없는 초등학교 1학년 다솜이는, 가족 누구에게도 물어보지 않고 이 비밀한 고통을 혼자 끙끙 앓았다. 데디의 마른 기침소리는 쿵! 돌덩이가 떨어지는 소리처럼 들렸다. 다솜이는 마음에 지뢰처럼 터지는 쿵소리 궤적을 좇아 매일 스스로를 괴롭히곤 했다.




데디병과 무능력, 가난해진 집, 새벽엔 녹즙 배달하고 저녁까지 파출부 일하는 엄마, 기억력이 깜박거리는 할머니. 집안을 어둡게 뒤엉키고 있는 버거운 이유들이, 다솜이는 전부 자기 탓인 것만 같았다.


'나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해..'


거실에 앉아 현관에 어지러이 놓인 신발들을 보면서 갑자기 닭똥 같은 눈물이 떨어졌다. 바보 멍충이 신주머니는 왜 잃어버린 거야, 등뒤로 묶어버린 녀석은 매일 닳고 닳은 죄책감에 닿을 때에서야 다솜이를 울리고 말았다.


때마침 방에서 흘러나오는 기침소리에 그나마 삐져나온 눈물도 재빨리 손등으로 훔쳤다. 마음의 빨래집게를 허둥대어 찾아 끼어, 떨구었던 고개를 얼른 찰랑이며 안방 문을 열었다.


"(데디) 안 자고 있었네? 난 또."

"학교는 재밌었어?"

"그럼. 재밌었저. 하루종일 모 했어?"

"다솜이 언제 오나 기다리며 텔레비전 보고 있었지"

"그래? 나 오늘 신기한 거 배웠어. 잠깐만"


다솜이는 가방에서 책을 꺼내려는데 순간 마음이 휘청거릴 뻔했다. 손등으로 머리카락을 제치는 척하며 눈두덩이를 스치듯 짓눌렀다. 다솜이는 집안의 무거운 공기에 익숙해졌 그 어두움을 들이킬 때면 눈물은 금세 도망갔다.


다솜이는 길거리에 너저분하게 방치된 포대 자루 같은 감정뭉치가 터지지 않게 몰아 쥐었다. 이런 날은 엄마가 언제 오시나 시계만 연거푸 보곤 했다.   





해가 떨어질 즈음, 다솜이는 으슬으슬 감기 기운이 느껴졌고 찌릿한 열감에 거실 소파 쿠션에 기대어 모로 누웠다. 오늘따라 엄마를 기다리는 시간이 늘어졌다. 이 이상한 하루가 가짜였으면 좋겠다, 생각했고, 이내 눈가에 눈물을 그렁거리며 잠이 들었다.






다솜이는 그 저녁, 꿈속에서 한 숲을 보았다. 어디선가 숲속 요정들이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칠 번, 이게 모야? 기억의 나사가 풀렸잖아. 구 번, 빨리 이걸 얼려야 해. 백이십 번, 포장이 잘못 됐잖아."


커다란 나무 위에서는 잠자리채로 무언가 흔들어대는 요정들이 보였다. 날아다니며 나뭇잎과 공기로 포장지를 만드는 요정들도 있었다. 땅속엔 여러 층마다 많은 방들이 있었다. 요정들이 차가운 얼음을 만지고 있었고,  낡아빠진 작업복을 입은 1000세는 될듯한 난쟁이들이 쉴 새 없이 땀을 흘리며 열심히 일하고 있었다.


"오늘 중에 빨리 투덜나라로 택배를 보내야 해. 세인트는 언제 온댔지?"


다솜이 귀에 '세인트'란 말이 달라붙었다. 자세히 보니 어디선가 본 듯한 요정이었다.


'어, 산타 할아버지랑 닮은 거 같은데?'




무엇을 얼린다는 건지 귀를 쫑긋 세우지만 들리지 않았다. 그때 쿵! 숲속이 흔들리는 소리가 들렸다. 검정 털이 가득한 아기곰 같은 동물이 이리저리 숲을 헤집고 다녔다. 





한참을 지나, 곰처럼 생긴 털보는 근엄한 난쟁이 앞에서 놀란 눈과 갑자기 볼룩해진 코킁킁거리며 시무룩한 표정이었다.


그때 다시 쿵! 또 한 번 숲이 흔들리는 큰 소리가 들렸다.  




이전 01화 [동화] 1. 투덜이 털보의 탄생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