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청년 클레어 Oct 18. 2024

수고하고 무거운 짐

어깨가 무거운 독거동 산 81번지 사람들

아래 글은 [연재 브런치북] 밑줄 긋는 브런치 생존기10화 [연재 8] 조언/배려/자기 책망/표현의 자유 사수 편에서 썼던 서두글입니다.


실은 내용의 카테고리상 독거동 산 81번지를 스케치하다 에 해당해서, 언젠가 이 매거진에 추가하려다 차일피일 미뤘는데요. 한산한 오늘 그 작업을 하네요. 독거동 산 81번지를 스케치하다 구독하시는 독자님은 이 글도 참고해 주세요 :)


제가, 종교 묵상글들 위주로만 쓰다 일반글을 본격적으로 쓴게 브런치가 처음이에요. 초기 브런치글은 그야말로 뒤뚱뒤뚱 더듬더듬 설명문처럼 썼다면, 이때부터는 조금 글의 형체가 만들어져 갔던 것 같아요. 독자님들께는 송구스럽지만 실은 제가 개인 사정으로 퇴고를 충분히 못 하고 올릴 때가 태반이랍니다. 요즘도요.


아래 글은 그중 그나마 퇴고를 여러번 하고 올린 글이라 이 매거진에 한번더 올려요 :)












어머니는 학생 때 포함 지금까지, 나에게 단 한 번도 "공부하라"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으시다. 아니 우리 7남매 모두에게 동일하셨다.

어머니는 무학이시다. 학교를 한 번도 안 다녔기에, 글을 읽거나 쓰지 못하신다. 6.25 전쟁 전엔 부잣집 막내딸이었는데, 6.25 전쟁 전후로 가세가 기울었고 그즈음 아버지도 돌아가셨나 보다. 어머니의 엄마 즉 외할머니는 이내 재혼을 했고 어머니는 어릴 때부터 어머니의 외할머니 곧 내 증조 외할머니 손에서 자랐다. 그것도 고약한 할머니 밑에서 말이다. 어린아이를 1년 내내 목욕도 못 하게 했다 한다. 머리가 떡질 때까지 말이다. 거이 방치했고 동시에 고된 집안일을 맡겼다 한다. 어머니는 몸종처럼 8살 때부터 밥 짓고 빨래를 했다 한다. 그렇게 고생했으면, 나중에 결혼할 때 시댁 인복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시어머니도 고약했고 남편은 술만 먹으면 돌변하는 야수였다. 그랬다. 그녀의 인생은 내내 고통과 질곡의 연속이었다.

출처 : 청년 클레어의 <먼저 사람이 되어라> 중에서



청춘의 한복판, 한없이 두렵고 막막해 무너질 듯 절망했던 순간들이 있었다. 쓰러질 듯 아슬아슬한 순간마다 내 손목을 잡아 일으키는 존재가 있었다. 오래된 동화 속 봄날의 아지랑이처럼  포근한 나의 모태, 태어나 지금껏 가장 사랑하는 사람 바로 나의 어머니이시다. 그럼에도 섣불리 사랑한다 제대로 되뇌지 못한 고결한 내 고향도 어머니이시다.


그녀의 인생을 동화 속 햇살 가득한 봄날로 새기고 싶었고, 그것이 현재적 내 사랑의 삶이기 바라고 또 열망했다. 누군가 던진 돌 팔매질에 여지없이 풍비박산 나는 유리 창의 파편처럼, 그녀의 삶은 여렸고 속절없이 조각조각 흩어지곤 했었다. 상상 속에서라도 이 작고 작은 여인을 지켜주고 안아주고 싶었다. 어떻게 한 여인의 인생이 이리도 기구하고 험란하단 말인가, 이건 너무 가혹하지 않은가.


눈망울에 아른거리는 어머니의 모습은, 어린 내 심연에 한없는 연민과 고통을 자아냈다. 어머니는 어려서 아동학대를 당해 잘 먹지 못했다. 키가 140cm가 될까 말까 해, 동네에선 쬐만한 아줌마, 키 작은 아줌마로 통하곤 했다.


작은 체구로 남편의 알코올 중독과 7명 자식들을 건사했던 한 여인, 그녀는 무엇을 그리 잘못했는지 연신 굽신거리며 살아왔다. 제때 돈을 갚지 않는다며, 역정 내는 빛깔 나는 여자들 앞에서 비굴하게 굽신거려야 했다. 가난에 불편하고 힘든 자식들이 어디에도 기댈 데 없어, 아주 가끔 어머니에게 투정을 토해낼 때면 '왜 그렇게 투정이냐?' 반문하지 못하고, 죄인처럼 굽신거리며 철없는 말들을 마음에 담아 고개를 숙이셨다. 아버지가 술을 거나하게 마시고 온 날, 밥 먹다 말고 밥상을 뒤엎어도 숨 죽이며 무력하게 굽신거리셨다. 방바닥이고 벽지고 빨갛게 튀긴 김치국물, 없는 살림에 요리했을 엎어진 비릿한 생선찌개, 영세민이라 나라에서 준 정부미쌀로 고이 지은 고봉밥. 낮에 드문드문 보였던 개미새끼도 얼씬거리지 않는 폭압 뒤의 고요.


어느 날은 아버지가 술에 취해 초저녁부터 널브러져 주무시다 새벽에 일어나 또 난동을 부리셨다. 아버지는 뭐에 그리 분이 풀리지 않으셨던지 부엌에서 칼을 들고 방으로 뛰어 들어와 "다 나오라"며 반 미치광이처럼 고함을 질렀다. 이미 그 동네 일대에서 우리 아버지는 유명했다. 가족들은 새벽 2시 자다 말고 모두가 도망갔다. 옆집으로, 친척네로, 시집간 언니네로 그렇게 말이다.


그날 나는 어머니와 동네 홀로 사는 한 아주머니댁에 가서 몸을 숨겼다. 콩닥콩닥 주체 못 할 두려움과 서글픔, 무너질 듯 무력한 인생에 피로감마저 들며 삶을 손에서 놓고 싶다 느껴질 그때였다. 홀로 사는 아주머니의 굽은 등을 보았다. 그 아주머니는 꼽추였고 심지어 일어나 걸을 수도 없어 앉아 살아야 했다. 동네 마을 길을 뒤뚱뒤뚱 앉은 걸음으로 쏜살같이 걷곤 했던 낯선 이방인이자 고독한 인생. 알코올중독 남편을 피해 밤마다 쫓겨사는 난쟁이처럼 쪼매난 어머니와 꼽추등의 앉은뱅이 아주머니.


인생이, 현실이 왜 이리 가혹한가. 왜 이 두 여인은 이 기구한 인생을 계속 살아내야 하는가. 마음에 무거운 어둠이 날카롭게 밀려들었다. TV속 행복을 찬미해 마지않는 CF광고는 사기였다. 인생에 행복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해서는 안 된다. 내 삶이 또 이 두 여인이 이토록 불행한데, 세상에 행복이 존재한다는 것은 너무 불공평하지 않는가. 당시 종교가 없던 나는 신이라도 있다면 따져 묻고 싶었다.


"저한테 왜 그러세요? 우리 어머니 그리고 꼽추등 아주머니에게 왜 그러신 거예요? 우리가 무얼 그렇게 잘못한 겁니까? 말 좀 해보세요!!!"





이 외침이 하늘에 닿았던 것일까. 공교롭게 다음 해 6학년 봄, 처음 만난 짝꿍이자 나중에 절친이 된 친구의 인도로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 친구랑 주일에도 함께 놀 생각이 좋아 다녔던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안다. 무의식 깊이 숨겨 놓았던 신에게 묻고 싶었던 '고통'에 대한 반항적 질문, 그 답을 찾고도 싶었던 속내를 말이다. 


신이 머무른다는 사각 건물을 매주 드나들던 어느 날이었다. 그날도 아버지가 오랜만에 부엌칼을 들고 난리를 쳤다. 그날은 시집간 큰언니 집으로 도망갔다. 다행히 형부는 출장 중이었다. 근데 집에서 언니네로 전화가 왔다, 아버지가 큰 언니네로 쫓아오고 있다 했다. 언니와 어머니는 몸을 피했고, 나는 어떤 연유에서인지 언니네 집에 있는 미싱 아래 저 깊숙이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이렇게 죽을 수도 있겠다, 숨을 죽이고 있는데, 밖에서 한바탕 큰소리와 부스럭 거림이 있더니 이내 조용해졌다. 문이 잠겨 있었던 것 같다.


한 바탕 소동이 끝나고 미싱 밑에서 기어 나왔다. 언니네 집은 산중턱에 있는 소박한 전셋집이었지만 작은 마당이 있었다. 그 새벽 까만 하늘에 왜 이리 달빛은 아름답고 별들은 영롱하게 빛났던지, 이 무심한 평화가 야속하게 느껴졌다. 아니 신의 무심한 평정심을 깨트리고 싶었다. 아직 믿음도 없던 그때, 진짜 젖 먹던 힘을 다해 속으로 부르짖었다. 눈에서는 핏빛 어린 눈물을 머금으면서 말이다.


"제발 이 고통 좀 끝내 주세요. 저희 아버지 좀 데려가 주세요. 진짜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면 데려가 주세요"


그렇게, 내 인생에 고통을 방치한 절대자에게 항변하듯 반항하듯 앙심 품은 기도를 토해냈다. 운명의 공교로움인가, 그 일이 있고 다음 해 봄, 아버지는 공사장에서 막노동을 하다 3층에서 떨어져 그 자리에서 숨을 멈추셨다. 며칠 전 대선에서 자신이 뽑은 후보가 대통령에 낙선했다며 내내 술을 드셨던 터였다. 그날도 낮술을 드시고 공사장 건물에 오르다 발을 헛디딘 것이었다.


세상의 모든 시간이 멈춘 것만 같았다.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 한동안 멍했다.


나는 살아있고 그는 존재하는 않는 세상. 나의 숨겨놓은 살의는 존재의 부재 앞에 발각 나고 말았다. 내 손을 쓰지 않고도 천지가 요동하여 끝내 이뤄낸 살의, 그것은 이내 작은 아이의 마음에 누구도 모를 비밀스러운 전과를 남기고 말았다. 나와 신만이 아는 '마음의 전과'는 오래도록 죄책감이 되어 아버지를 아예 생각에서 지웠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를 빼곤 모든 가족들이 돌아가며 매년 산소에 갔다 왔으나, 나는 공부를 또 직장일을 핑계로 지금껏 한 번도 못 갔다. 아니 안 갔다. 돌이켜 보건대 그건 회피가 아니라 나를 향한 스스로의 징계였다. 그래도 자식들 중 나를 가장 예뻐하셨던 아버지인데 말이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주산학원 대회에서 큰 상을 받았다 기뻐하셨고 이내 남매들 몰래 재래시장에서 후트티를 사다 주셨던, 동전 모아 생일선물 드리자 함박웃음 지으셨던, 지나가다 주운 가짜 반지를 선물드리자 내내 고이 간직했던 나의 아버지. 왜, 그 아버지는 세상 모두의 미움을 받아야 했는지, 끝내 나마저도 그를 포용하고 이 땅에 아니 내 마음에 잡아둘 순 없었는지, 나마저 손 놓은 무거운 죄는 벌이 되어 내면을 곪고 병들게 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태복음11:28)





폭풍 같았던 혼란스러운 청춘은 매해 아빠 냄새나는 봄을 맞고 있었다. 그 언제부터인가, 죄와 벌 그리고 죄사함에 대해서 깨닫게 되었던 때였던가, 아버지를 마음에서 놓아주게 되었다. 그의 부재를 열망했던 만큼 그의 부재를 가여워하며 안쓰러워하며 안타까워하며, 한 남자를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나의 사부곡은 그렇게 속죄의 일상으로 인도되었다. 용서는 내가 받아야 했다. 연약하여 또 무력하여 삶의 고통을 이겨내지 못남자, 아버지를 잠시나마 증오하며 내뱉었던 간구, 그 무거운 말이 돌고 돌아 한 아이의 내면을 평생 후벼 팔 줄은 몰랐다.


그 어느 해 새벽처럼 밤의 달이 또 별이 영롱하다.


"아빠 안녕!"


오늘이 살아지는 힘이 또 이유를 묻는 내게 어디선가 들린다.


"딸도 오랜만에 안녕!"


서툴고 어리석어 지었던 숱한 과오는 안녕이란 말에 묻혀 과거가 되고 현재를 다독여 준다.

 




타인도 자기 죄로 고통한다는 사실을 아는가? 그것은 멀리 갈 것도 없이 나 자신을 들여다보면 금세 알 수 있다. 내가 알고 지은 죄든 모르고 지은 죄든, 실책은 죄책감과 두려움을 포함해 여러 고통을 남긴다. 그리고 이런 고통은 나에게 위해를 입힌 사람들도 겪고 있다는 사실, 이것을 알 때 세상을 보는 너른 눈이 열린다. 죄로 인해 고통하고 신음하는 타인, 이 앞에서 인간은, 거울처럼 그들에게서 나를 다시 한번 보게 된다.

출처: 청년 클레어의 <내가 가장 평안할 때(12) 타인의 고통> 중에서













*꼽추 : ‘척추 장애인’을 낮잡아 이르는 말이나 글의 표현상 표준어 대신 꼽추로 명명한 점 양해 부탁드려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