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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 Apr 23. 2024

시각장애인 창석 씨의 봄

창석 씨와 그녀의 5月

창석 씨는 태어나서 한 번도 앞을 본 적이 없다. 서른네 살의 그는 섬마을에 사는 시각장애인이다. 그는 어머니와 함께 그곳에서 슈퍼를 운영했다. 목포에서도 배를 타고 4시간 30분이 걸리는 먼 곳. 그곳에 창석 씨와 어머니가 살고 있었다.


창석 씨가 그녀를 만난 건 날이 제법 따뜻한 오월의 어느 날. 도시의 한 처녀가 큰 차를 몰고 해변에 왔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이 먼 작은 마을에 외지인이 오는 것은 일 년에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정도기에 벌써 여기저기 소식이 퍼져나갔다.


이장한테 듣기론 그 멀다는 서울에서 캠핑을 하러 이곳까지 왔다고 했다. 하지만 그녀는 섬에 온 지 며칠 만에 마을 사람들에게 벌써부터 욕을 먹고 있었다. 민박집 주미네 아줌마에게는 숙박은 이용하지 않고 물만 썼다는 이유로, 동네 어르신 김 씨 할아버지에게는 노인들이 걷고 있는 길을 큰 차로 휑 지나갔다는 이유로 말이다.


도시에서 온 젊은 여자.

간혹 TV 다큐멘터리를 보고 오거나 유명 연예인이 추천했다는 맛집을 찾아 이곳까지 오는 몇몇 젊은이들이 있긴 있었다. 하지만 젊은 여자가 혼자 이 섬에 온 것은 창석 씨가 기억하기론 처음이다. 섬마을에서 하릴없이 똑같은 일상을 보내던 창석 씨에게 그녀의 등장은 호기심을 자극하기 충분했다. 그렇다고 그녀가 있는 곳까지 굳이 앞을 헤매가며 가볼 생각은 없었다. 그럴 수도 없을뿐더러.


저녁 8시. 벌써 한 시간 전에 문을 닫은 슈퍼 문을 누군가 쾅쾅 두드린다.

창석 씨는 직감했다. 이방인. 그녀다.

그는 슈퍼 안에 딸린 작은 방에서 몸을 천천히 일으켜 불을 켜고 문을 열었다. 상쾌한 목소리가 들린다. 들어본 적 없는 낯선 이의 목소리.


“안녕하세요. 슈퍼가 굉장히 문을 일찍 닫네요? 생수 몇 병만 살 수 있을까요?”


이미 문을 닫은 슈퍼를 열고 들어왔음에도 미안한 기색도 없이 명랑한 목소리였다. 창석 씨는 생수가 있는 곳을 설명했다.

“문 옆에 있는 음료수 박스 위에 있어요. 한 병에 이 천 원입니다.”

그녀는 생수를 몇 병이나 사는지 한참 동안 낑낑대더니 돈을 내밀었다. 긴장한 창석 씨는 그녀가 내민 손의 위치를 짐작할 수가 없었다. 더듬거리는 창석 씨의 손을 보고 그녀는 마침내 알아차린 듯, 창석 씨의 눈앞에 손을 몇 번 휘적거리더니 이내 그의 손에 지폐를 꼭 쥐어주었다.


“여기 이 만 원이요.”

“감사합니다.”

짧은 인사와 함께 그녀는 사라졌고, 서울 냄새도 사라졌다.


창석 씨는 다시 슈퍼의 문을 잠그고 작은 방에 가 몸을 뉘었다. 그리고 그녀의 목소리를 떠올리며, 그녀를 상상했다. 잠에 드는 내내 그녀를 그렸기 때문일까. 꿈에 그녀가 나왔다. 창석 씨에게 다정스럽게 팔짱을 낀 채, 사랑스럽게 웃고 있는 그녀. 그리고 그녀의 옆에는 아주 잘생기고 늠름한 모습의 창석 씨가 서있었다. 창석 씨는 사는 동안 한 번도 궁금해해 본 적조차 없던 자신의 얼굴을 꿈속에서나마 자유롭게 만끽했다. 그리고 그녀와 자신의 모습을 잊지 않으려 애썼다.


날이 밝았다. 창석 씨는 불길한 예감에 잠에서 깼다. 바지 앞섶이 젖어있었다.

‘미친놈. 나이가 몇인데.’

창석 씨는 어머니가 오시기 전 서둘러 속옷을 쓰레기통에 쳐 넣었다. 낮 시간 동안 창석 씨는 매우 혼란스러웠다. 몰래 쓰레기통에 넣은 속옷을 어머니에게 들킬까 염려스러우면서도, 단 한 번의 만남으로 자신을 이렇게 헤집어놓은 그녀를 다시 만나고 싶어 미칠 노릇이었다.


저녁 8시.

타박타박. 낯선 이의 발걸음 소리다. 창석 씨는 몸을 일으켜 불을 켰다. 그리고 정말 그녀가 들어왔다.

그녀는 콜라를 몇 캔을 사곤, 내 손에 돈을 꼭 쥐어주며 ‘오 천 원이에요’라고 힘주어 말하고 떠났다. 어머니가 가게 앞에 써놓은 <07시~19시> 팻말 따윈 개의치 않다는 듯이 그로부터 며칠 동안이나 그녀는 계속 늦은 시간에 물건을 사러 왔다.


그녀가 섬에 온 지 5일쯤 됐을까. 다시 생수를 사러 온 그녀가 친근한 목소리로 창석 씨에게 말을 붙인다.

자신과 나이가 비슷해 보인다며, 창석 씨의 나이를 묻는 그녀에게 창석 씨는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서른 넷이요.”

“나도 서른 넷인데!! 친구네!”


어색하게 웃는 창석 씨 옆으로 그녀가 방 문 턱에 걸터앉아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한 회사의 디자이너로 일했던 그녀는 몇 달 전 회사를 그만둔 후부터 여기저기 캠핑을 다니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역시나 다큐멘터리에서 본 섬 반대편 끝에 있는 사구(모래언덕)가 궁금해 이곳을 찾았다고. 신나는 목소리로 창석 씨에게 사구를 봤냐고, 감탄하며 묻던 그녀가 단 몇 초 후 말실수를 했다고 사과했다. 창석 씨는 덤덤한 목소리로 괜찮다고 했다.


그녀는 ‘사구를 봤냐’는 질문에 죄책감을 느껴서일까. 급하게 이야기를 마무리하더니 내일 보자는 인사와 함께 떠났다. 오늘도 내일도, 창석 씨는 두 눈으로 그녀를 볼 순 없지만 그 인사가 괜히 반가웠다. 그녀가 떠난 후, 창석 씨는 삼십 년이 넘게 이 섬에 살았지만 전혀 생각조차 해보지 않았던 사구를 떠올렸다.


다음 날, 그녀가 웬일로 일찍 슈퍼를 찾았다. 그리곤 창석 씨를 채근해 슈퍼 문을 닫고, 자신의 차에 태웠다.

차에 타는 것부터가 쉽지 않았지만, 그녀는 창석 씨를 거의 의자에 꽁꽁 묶은 채 해변을 거칠게 달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차를 멈춰 세우더니 조심스레 창석 씨를 내렸다. 그리고 말했다.


“여기가 사구야. 지금 햇볕이 강해서 모래가 반짝반짝 빛나고 있어. 높이가 정말 어마어마해. 저 위에서 썰매를 타도되겠어.”


그녀의 말에 창석 씨는 고개를 들어 올려보았다. 그의 고개가 향한 곳이 사구가 있는 정확한 방향인지는 모르겠으나, 창석 씨는 결국 사구를 보았다. 그녀의 옆에 서서. 한참 사구 앞에 서있던 두 사람은 잠시 신발을 벗어 해변을 밟기 시작했다. 그래봤자 그녀의 안내로 열 발자국쯤 될까.


창석 씨는 그녀와 함께 태어나 처음으로 사구가 있는 섬의 반대편에 왔다. 앞을 보지 못하는 그가 오기에는 상당한 거리였을뿐더러 곳곳에 큰 바위가 있었기 때문이다. 맨 발로 해변을 밟은 것도 오랜만이다. 작은 조개껍데기, 돌, 유리조각 같은 것들 때문에 신발을 벗고 해변을 걷는 것조차 앞이 안 보이는 그에게는 꽤나 어려운 일이기에, 어릴 적 집 앞 해변에서 잠깐 놀던 기억이 전부였다. 창석 씨는 오늘, 전에는 꿈조차 꿔보지 못했던 걸 단 한 번에 모두 이루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창석 씨는 이름도 모르는 그녀를 따라 섬 반대편까지 갔다가 다시 슈퍼의 작은 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곤 홀로 방 안에 남아 자신의 발을 만져보았다. 발가락 사이로 빠져나오던 모래의 감촉. 내리쬐던 햇볕. 처음 마주한 사구. 그녀와 함께한 단 몇 시간 동안 창석 씨는 눈을 뜬 기분이었다.


그녀는 창석 씨와 사구를 다녀온 그날로부터 이틀 뒤에 섬을 떠났다. 이틀 동안 그녀와 창석 씨는 슈퍼 작은 방 문턱에 걸터앉아 여러 이야기를 나눴지만, 이상하게 서로의 이름은 묻지 않았다. 하지만 창석 씨에게 그녀의 이름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에게 그녀의 이름은 어마어마한 사구, 부드러운 해변, 따뜻한 햇볕으로 충분했으니까.


창석 씨는 그녀가 떠난 후로도 종종 그녀의 꿈을 꿨다. 그녀와 함께 사구에서 썰매를 타고 내려오고, 두 손을 마주 잡고 함께 해변을 걷는 꿈을. 그녀가 다시 이 먼 섬마을까지 자신을 찾아올 일은 없을 거란 걸 알면서도, 창석 씨는 매년 오월이 되면 그녀를 기다린다.


그녀는 창석 씨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봄날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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