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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 Jun 25. 2024

우정을 나누던 두 사람이
사랑을 나누게 되었다 2.

우정 끝 사랑 시작

14살, 해나의 첫 연애가 처참하게 끝이 났다. 해나는 며칠 동안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밥도 제대로 삼키지 못하며 힘든 나날을 보냈다. 그렇게 꼬박 일주일이 지났을까. 천천히 기운을 차린 해나가 어느새 자신의 옆에 있는 민호를 발견했다. 언제부터인지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해나가 학교를 가기 위해 집을 나오면 어디에나 민호가 있었다. 하루는 서점 앞, 하루는 편의점 앞. 두 사람은 이렇게 우연인 듯 아닌 듯 매일 아침을 함께했다. 그렇게 민호와 해나가 함께 하는 날이 많아지면서 두 사람 사이에는 묘한 기류가 흐르기 시작했다. 항상 밥보단 잠을 선택하며, 집을 나서기 10분 전까지도 침대에 누워있던 해나가 평소보다 30분은 일찍 일어나 샤워를 하고, 거울 앞을 서성였다. 어느 날은 얼굴에 하얗게 무언가를 바르기도 했고, 또 어떤 날은 입술이 빨갛게 빛나고 있기도 했다. 이런 변화는 민호에게도 나타났다. 그는 매일 기분 좋을 만큼의 향수를 뿌렸고, 매일 아침 서점이나 편의점이 아닌 해나의 집 앞에서 그녀를 기다렸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주말에 영화를 보러 가자는 민호의 말에 해나는 하루 종일 심장이 쿵쾅거렸다. 수업도 귀에 들어오지 않고, 친구들과의 대화에도 집중할 수가 없었다. 발가락 사이가 간질간질한 기분에 해나는 ‘그저 친구와 영화 보는 것’일 뿐이라고 마음을 다잡으려 했지만, 떨리는 마음을 숨길 수는 없었다. 그리고 다음 날, 해나는 아침 일찍부터 일어나 꽃단장을 했다. 긴 머리를 동그랗게 말아 넣고, 새로 산 원피스를 꺼내 입었다. 문을 열고 나오자 민호가 기다리고 있었다. 교복을 벗은 민호를 보자 해나는 갑자기 가슴이 뛰었다. 


영화를 보는 두 시간 내내 해나는 화면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머릿속에는 온통 민호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언제부터 얘가 이렇게 키가 컸지?’, ‘근데 갑자기 왜 나한테 영화를 보자고 했을까?’ 영화가 끝난 후에도 한참 생각에 빠져있는 해나를 살피며 민호는 물었다. “너 어디 아파?” 당황한 해나는 고개를 젓고 밥을 먹으러 가자며 민호의 팔을 당겼다. 그때였다. “야. 김해나” 누군가 멀리서 두 사람을 아는 척하며 다가온다. 지훈이었다. 지훈은 두 사람의 얼굴을 살피더니 “야 역시. 남녀 사이에 친구가 어딨냐?”라며 비아냥거렸다. 민호는 그의 말에 대번에 반박했다. “그건 너 같은 새끼가 하는 생각이고”. 민호의 말에 지훈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해나를 쳐다보았다. 해나는 민호의 말을 곱씹다가 끝내 “친구끼리 영화도 못 보냐?”라며 톡 쏘아대고 자리를 떠났다. 


친구. 해나는 영화관을 나서며 잠시나마 민호에게 떨렸던 자신의 마음을 자책했다. 민호와는 말을 하지도 못했던 4살 때부터 함께했던 친구사이다. 서로가 어떻게 컸는지, 엄마들끼리는 또 얼마나 친한지 다 아는. 잠시 민호를 피해 화장실에 들어간 해나는 거울 속 자신의 차림이 갑자기 과하게 느껴져 빨갛게 칠한 입술을 벅벅 지우고 나왔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기 전, 두 사람은 전부터 즐겨 찾던 분식집에 들러 떡볶이를 먹었다. 해나는 이유 모를 우울감에 괜히 더 신나는 척을 해대며 “역시 너랑 있을 때 제일 편해.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 될 때까지 친구 하자”는 등의 이야기를 떠들어댔다. 민호의 표정이 점점 굳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한 채. 


그날 이후 민호는 친구들과 학교에서 축구를 하기로 했다는 등의 이유로 더 이상 해나의 집 앞에 찾아오지 않았다. 해나는 혼자 설레어했던 자신의 마음을 탓하며 민호와의 관계는 절대 불변한 우정,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며 스스로를 세뇌했다. 그리고 얼마 후, 민호에게 여자 친구가 생겼다는 소문이 들렸다. 상대는 민호를 꽤 오래전부터 짝사랑해 오던 옆 반 아이였다. 이유 모를 씁쓸함이 밀려왔지만 해나는 민호를 축하해 주기 위해 메시지를 보냈다. ‘야 여친 생겼다며? 축하해’ 그리고 한참 후 민호에게서 답이 왔다. ‘그래 고마워’


16살 겨울, 민호는 그 아이와 꽤 오랫동안 만나다가 최근 헤어졌다. 해나도 이후 몇 번의 남자친구를 만났지만 그리 오래가진 못했다. 두 사람은 각자 연애를 하느라, 그리고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느라 서로에게서 잠시 멀어졌다. 아주 가끔 동네에서 우연히 마주치는 것 외에는. 그렇게 중학교 3년을 보낸 후 마지막 겨울방학을 보내고 있을 때였다. 민호의 어머니가 해나의 집에 방문했다. 해나는 간단히 인사를 마치고 다시 방으로 돌아와 누웠다. 문 밖으로는 어머니들의 대화 소리가 들렸다. 


“해나는 어디 학교 가?”

- “어, 저기 일인여고”

“집 옆이라 너무 좋겠다. 우리 민호는 제중남고야. 버스 타고 다녀야 돼”

제중남고. 해나와 민호가 사는 곳에서 버스로 20분 정도 떨어진 곳이다. 해나는 어머니들의 대화를 들으며 잠에 빠졌다. 새삼스레 민호와 떨어져 학교를 다닌다고 생각하니 신기하고도 두렵다는 생각과 함께. 


중학교 졸업식 날. 민호와 해나의 부모님이 함께 두 사람의 학교로 왔다. 민호와 해나는 각자의 반에서 졸업장을 받고 밖으로 나와 부모님과 함께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부모님의 권유로 두 사람은 나란히 서서 사진을 찍었다. 생각해 보니 초등학교 졸업식 때에도 이렇게 사진을 찍었더랬다. 어수선한 분위기 속 민호가 해나에게 조용히 말을 걸었다. “나 제중남고에 가. 너는?” “들었어. 나는 일인여고. 앞으로 우리 더 못 보겠다” 괜히 눈물을 글썽이는 해나에게 민호는 “연락해. 그럼 언제든 올게”라며 그녀를 다독였다. 


고등학교에 입학 후, 민호와 해나는 걱정했던 것과는 다르게 각자의 자리에서 빠르게 잘 적응을 마쳤다. 전과는 달라진 학습량에 두 사람은 학교를 마친 늦은 밤에도 학원을 다녔고, 아침에는 누구보다 일찍 학교에 가기 바빴다. 그렇게 한 동네에 사는 민호와 해나는 점점 더 얼굴을 마주치는 날이 적어졌다. 


18살 여름, 도서관에서였다. 해나는 저 멀리 민호와 닮은 사람을 보자마자 민호에게 연락을 했다. ‘너 어디야?’ 이어 민호에게 답이 왔다. ‘나 도서관’. 해나는 조용히 밖으로 나가 민호에게 전화를 걸어 자신이 있는 곳을 알렸다. 그리고 잠시 후 도서관에서 민호가 나왔다. 훌쩍 자란 키, 까무잡잡하게 그을린 피부. 전엔 미소년이었다면, 이제 제법 남자다운 티가 나는 민호가 눈앞에 섰다. “야 키가 왜 이렇게 컸어? 혼자 뭐 먹냐?” 장난치는 해나에게 민호는 잘 지냈냐며 안부를 물었다. 두 사람은 벤치에 앉아 음료수를 나눠먹으며 그동안의 이야기를 나눴다. 


한참 떠들고 있는데 누군가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야 여기서 뭐 해?” 민호의 친구였다. “안녕? 나는 김재민”, “어 나는 김해나야” 갑자기 등장한 재민에, 어색해진 해나는 민호에게 급히 인사를 나누고 도서관으로 돌아갔다. 해나가 사라진 후 재민은 들뜬 목소리로 민호에게 말했다. “야 누구야? 웬 여자 사람? 너 여친이야?” “아니 뭔 여친이야. 그냥 친구야” 당황한 민호에게 재민은 다행이란 듯이 “야 그럼 나 좀 소개시켜줘”라며 엉겨 붙는다. 민호는 그런 재민에게 해나는 이미 남자친구가 있으니 꿈 깨고 공부나 하자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아쉬워하는 재민을 뒤로하며 민호는 속으로 생각했다.‘내가 왜 거짓말을 했을까’


그리고 1년이 더 흘렀다. 19살, 대망의 수능을 코앞에 둔 어느 날. 학원에 있던 해나의 휴대폰이 울렸다. 민호였다. 이따 집 앞에서 잠깐 보자는. 해나는 오랜만에 민호를 볼 생각에 신나 학원을 마치자마자 동네로 향했다. 어렸을 때부터 두 사람이 자주 찾던 작은 놀이터에 민호가 앉아있었다. 민호는 우물쭈물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더니 해나에게 건넸다. 초콜릿, 사탕, 엿 등. 온갖 단 것은 다 있었다. 이어 수능 잘 보라는 응원과 함께 같은 대학에 갔으면 좋겠다며 쑥스럽게 웃는 민호. 그런 그의 말에 해나는 “그럼 네가 좀 평소보다 잘 못 봐야 해”라며 장난을 쳤다. 조용히 웃던 민호는 다시 한번 가방을 열어 노트 하나를 꺼내 해나에게 주었다. “수능 끝나고 봐”란 말과 함께. 집으로 돌아온 해나는 민호가 건넨 노트를 들고 한참을 고민하다가, 책상 서랍에 넣어두었다. 민호의 말대로 수능이 끝남과 동시에 펼쳐보겠다고 생각하며. 


마침내 두 사람이 수능 시험을 마쳤다. 아침 일찍 일어나 서둘러 고사장으로 향한 두 사람은 그간 공부했던 모든 것을 쏟아 시험을 치렀다. 긴 시간 끝에 시험을 마치고 나온 해나와 민호는 얼른 집으로 돌아가 쉬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해나는 바로 택시를 잡아타고 집으로 돌아와 침대에 널브러졌다. 그리고 가채점을 마친 뒤 그대로 잠에 빠졌다. 몇 시간쯤 흘렀을까. 전화가 울렸다. 민호였다. 잠이 덜 깬 해나의 목소리에 민호는 자신이 건넨 노트를 봤는지 물었고, 아직 확인해보지 않았다는 해나의 대답에 읽어보고 내일 연락을 달라는 말을 남긴 채 전화를 끊었다. 


잠에 취한 해나는 전화를 끊고 난 뒤에도 몇 시간을 더 자다가 일어나 홀린 듯이 서랍을 열었다. 그리고 민호가 건넨 노트를 펼쳐 들었다. 그리고 해나는 첫 줄을 읽자마자 잠에서 깨버렸다. 


‘to. 해나

갑작스러운 편지에 놀랐지? 하지만 이건 내가 아주 오래전부터 너에게 썼던 편지들이야.’


간단한 민호의 인사말 뒤에는 수많은 그의 편지들이 붙어있었다. 유치원에서 적은 것처럼 보이는 삐뚤빼뚤한 글씨와 그림이 그려진 종이, 초등학교 때 해나가 좋아했던 공주 캐릭터의 편지지에 쓰인 편지, 이후로 해나와 지훈이 사귀었을 때쯤 쓴 편지, 매일 그녀의 집 앞으로 해나를 찾아오던 날들에 썼던 편지, 영화관에서 지훈을 만난 뒤 썼던 편지. 그리고 서로 다른 학교를 가게 되고, 만나지 못했던 날들에 썼던 편지... 이 수많은 편지들의 맨 위에는 전부 해나의 이름이 쓰여 있었다. 해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잠시 노트를 닫았다가, 이윽고 다시 펼친 다음 민호가 썼던 모든 편지를 하나하나 천천히 읽어보기 시작했다. 


열아홉의 겨울, 민호는 아주 오래전부터 시작된 자신의 마음을 그렇게 해나에게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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