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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 Jun 18. 2024

우정을 나누던 두 사람이  사랑을 나누게 되었다 1.

우정 끝 사랑 시작

이 이야기는 수많은 논쟁에 늘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그놈의 남사친(남자 사람 친구), 여사친(여자 사람 친구)에 대한 글이다. 결과적으로 이 세상에 남사친, 여사친은 존재할 수 없다는 글. 때문에 제목을 보고 ‘이성은 절대 친구가 될 수 없다’며 쌍심지를 켜고 들어온 사람은 안도하길 바라고, ‘이성도 역시 친구가 될 수 있다’며 웃으며 들어온 사람은 끝내 고개를 젓게 될 테니 미리 양해 부탁한다.


민호와 해나는 4살 때부터 한 동네에 살며 30여 년을 함께 한 친구다. 둘은 유치원부터, 초등학교. 중학교를 함께 다니며 꽤 오랜 시간을 붙어 다녔다. 학교를 오고 갈 때, 심부름을 갈 때. 친구끼리 싸우거나 엄마한테 혼났을 때. 조금 더 큰 이후로는 각자 이성 친구를 사귀며 눈물콧물 짜며 지지리 궁상을 떨 때에도 두 사람은 서로가 서로에게 위로가 되어주곤 했다. 그들의 우정은 이처럼 꽤 오래전부터 시작되었다.


7살의 어느 날, 유치원에서 놀고 있던 해나에게 민호가 울면서 달려왔다. 그러더니 대뜸 “너네 아빠 때문에 피나잖아!”라며 엉엉 울어버린다. 해나는 어리둥절했지만 먼저 우는 민호를 달래주기 바빴다. 한참을 큰 소리로 울던 민호는 해나의 토닥임에 진정이 되었는지 울음을 멈추고 사연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오늘 아침 늦잠을 잔 탓에 헐레벌떡 유치원으로 뛰어오던 길, 우연히 길에서 해나의 아버지를 만났다고 했다. 그리고 그는 지각한 민호를 위해 유치원까지 오토바이를 태워 데려다주었다고. 해나는 민호의 콧잔등 위에 상처를 보다가 다시 물었다. “근데 왜 피가 났어?” 그녀의 질문에 민호는 “내가 손을 어디에 둘지 몰라서 거울을 잡았다 놨다 하는데 오토바이가 움직여서 코를 박았잖아!”라고 대답하며 다시 눈물을 글썽였다.


해나는 민호의 말을 듣고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자신은 아무렇지도 않게 매일 타는 오토바이에서 민호는 어쩌다 다친 것일까? 하지만 해나는 훌쩍이는 민호를 달래주느라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유치원을 마치고 집에 가는 길, 민호의 책가방을 들어주고 집까지 데려다주었다.


집에 돌아오니 해나의 아버지가 그녀에게 물었다. “민호는 좀 괜찮아?”. 아버지의 말에 해나는 궁금했던 것을 묻기 시작했다. “근데 왜 민호 코가 까졌어?” “아니 고놈이 오토바이를 처음 탔다지 뭐야. 어쩐지 손잡이를 잡았다가 놓았다가 불안하게 서 있더라고. 그러다가 과속방지턱을 넘을 때 손을 뗐는지 계기판에 그대로 코를 박았지 뭐.” 해나의 아버지는 민호를 유치원에 보내고 그 길로 민호의 집으로 향해 그의 어머니께 자초지종을 설명하며 사과했다고 한다. 하지만 민호의 어머니는 아들 셋을 가진 어머니답게 씩씩하게, “에이 조금 까진 건데요 뭐, 부러지지 않았으니까 됐죠.”라며 웃어넘겼다고. 여하튼 그 오토바이 사건 이후로 해나 아버지는 민호를 볼 때마다 유독 마음을 쓰며 그를 챙겼고, 민호 어머니도 해나를 예뻐하며 두 가족은 빠르게 가까워졌다. 함께 소풍을 가거나, 꽃구경을 다니기도 하면서.


8살이 되던 해, 민호와 해나는 초등학교 입학식에 함께 갔다. 그의 부모님들도 같이. 모든 것이 새롭기만 한 환경 속에서 다행히 둘은 같은 반에 배정받으며 첫 학교생활에서도 함께할 수 있었다. 민호와 해나는 같이 구구단을 외우고, 덧셈과 뺄셈 등을 연습하며 매일 함께 등교했다. 그리고 다음 해, 다 다음 해까지. 민호와 해나는 같은 반이었다.


두 사람의 우정에 작은 변화가 생기기 시작한 것은 열두 살, 초등학교 5학년 때일 것이다. 밸런타인데이다 뭐다 해서 아이들 분위기가 잔뜩 들떠있는 때였다. 학교를 마치고 집에 가려는데 민호가 해나의 반으로 찾아왔다. 사춘기가 시작된 후부터는 둘이 함께 등하교를 하는 일은 거의 없었는데, 웬일인지 그가 집에 함께 가자는 것이다. 의아했지만 해나는 오랜만에 만난 민호에게 종알종알 떠들어대며 초콜릿을 많이 받았냐고 물었다. 당시 민호는 하얗고 큰 눈을 갖고 있어 학교 내에서는 ‘미소년’으로 불리며 인기가 상당히 많았다. 민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잠시 걸음을 멈춰 섰다. 그리고 가방을 열어 자신이 받은 초콜릿을 꺼내 모두 해나의 가방에 담아 주었다. 민호가 건넨 초콜릿은 생각보다 훨씬 많았다. 한가득. ‘민호를 좋아하는 아이들이 이렇게 많았나?’라고 생각하던 해나는 이내 초콜릿이 가득 찬 자신의 가방을 보고 신이 나 활짝 웃고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민호는 해나의 인사에도 한참이나 할 말이 있는 듯 서있었지만,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돌아갔다. 그 이후로도 매년 밸런타인데이가 되면 민호는 자신이 받은 초콜릿을 전부 해나에게 주었다.


14살, 중학교에 입학한 민호와 해나는 사춘기를 심하게 앓았다. 해나의 교복은 선생님의 눈을 피해 야금야금 짧아졌고, 민호는 매일 교문 앞에서 머리를 자르라는 지적을 받음에도 불구하고 절대 자르지 않았다. 민호와 해나는 이제 함께 등교를 하는 일은 없었지만, 아주 가끔 함께 집에 돌아가곤 했다. 어느 날이었다. 해나는 집에 돌아가는 길에 우연히 민호를 만났다. 그리고 설레는 목소리로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았다. “나, 지훈이한테 고백받았어!” 얼굴을 붉히며 쑥스러워하는 해나를 바라보며 민호는 뚱한 표정을 짓는다. “지훈이? 걔 바람둥이야. 내가 그저께 다른 애한테 고백하는 것도 봤는데?” 하지만 민호의 말은 들리지 않는 것처럼 해나는 잔뜩 신이 났다. 그렇게 해나에겐 첫 남자친구가 생겼다. 이후 해나는 지훈과 만나느라 학교가 마치자마자 사라졌다. 해나와 지훈은 파르페를 먹으러 가거나, 영화를 함께 보며 데이트를 했다. 매일 밤 이불속에서 통화를 하고, 문자 메시지를 주고받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렇게 해나는 첫 연애에 푹 빠져있었다.


해나는 늘 지훈의 곁에 붙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민호가 오랜만에 해나를 찾아왔다. 잠시 교실 밖으로 나오란 말에 어리둥절했지만 해나는 웬일인가 싶어 민호를 따라나섰다. “왜?” “야. 김지훈 만나지 마. 걔 어제 송유정이랑 둘이 영화 보러 갔어.” 해나는 당황했다. 어제는 지훈이 머리가 아프다며 집에 일찍 돌아간 날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친구 유정이랑 지훈이? 절대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한 해나는 그대로 민호에게 화를 내고 교실로 돌아갔다. 그리고 여느 때처럼 지훈의 손을 잡고 하교하던 해나는 집 앞에서 그와 헤어지기 전, 조심스레 물었다. “너 어제 많이 아팠어?” 해나의 질문에 잠시 지훈의 눈빛이 흔들리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인다. 민호의 말 때문인지 갑자기 눈을 이리저리 굴리는 지훈이 의심스럽지만 해나는 끝내 지훈을 믿기로 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고민 끝에 민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어제 지훈이 정말 아팠대. 네가 잘못 본 걸 거야’. 하지만 민호는 답장이 없다.


해나의 첫 연애는 그렇게 고비를 넘긴 듯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처참하게 끝이 났다. 그녀와 가장 친했던 친구 유정의 휴대폰 케이스와 고리가 지훈이 자신에게 선물했던 것과 똑같다는 걸 본 그 순간. 의심은 확신이 되었기 때문이다. 해나는 그대로 유정과 지훈을 불러 몰아세웠다. 둘은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전혀 미안한 기색 없는 표정으로 해나에게 사과했다. 소리치는 해나에게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대로 떠났다. 홀로 남은 해나는 복도 한가운데서 엉엉 울었다. 그녀의 첫 연애는 이렇게 엉망으로 끝이 났다.


한참 다른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울고 있는 해나에게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다. “야. 뭐 해” 민호였다. 민호는 아이들 사이로 파고들어 해나의 손을 잡고 그녀를 빼내었다. 눈물 콧물이 범벅이 된 그녀를 수돗가로 데려온 후 민호가 말했다. “내가 말했지. 걔 만나지 말라고.” 아직 울음이 가시지 않은 해나는 “네가 뭘 알아!” 라며 괜히 민호에게 쏘아대고, 있는 힘껏 찬물로 얼굴을 씻어냈다. 그리고 곁에서 그런 해나를 지켜보던 민호는 한숨을 쉬며 해나가 좋아하던 바나나 우유를 하나 건네며 말했다. “이거나 마셔”. 해나는 민호가 건넨 우유를 시원하게 들이켜고선, 휴지로 젖은 얼굴을 벅벅 닦아냈다. 14살의 해나는 이처럼 누구보다 뜨거운 여름을 맞고 있었다. 그녀의 옆에 선 민호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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