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글을 믿는 일은 가능할까?

내 안의 글쓰기 자아

by 한지원

글을 잘 쓴다는 것은 자기 글을 믿고 자기 자신을 믿는 것이라는 윌리엄 진서의 말을 언젠가부터 마음에 새겼다. 은유 작가의 《쓰기의 말들》에서였다. 과연 자기 글을 믿는 일은 가능할까?


초등학교 때부터 가장 비밀스러워야 할 일기는 담임선생님의 검열대상이었다. 어느 날, 선생님이 읽는다는 걸 알면서도 “우리 엄마는 마귀할멈 같다”고 일기장에 썼다. 늘 일기장에 간단하게라도 메모하는 담임선생님의 메모가 없었다.


국어시간에 배운 글은 어렵기만 하고. 쓰고 싶은 자극을 준 글은 없었다. 작가와 시인은 너무 위대해서 타고나는 줄 알았다. 글짓기(글쓰기가 아니었다!) 대회는 진솔한 글이 평가기준이 아니었다. 베끼거나 흉내 낸 글, 잘 지어낸 글이 상을 받았다. 가끔 나도 그중의 일인이었다. 누구든 글을 쓸 수 있고, 써야 한다고 말하는 어른을 만난 건 성인이 되고도 한참 뒤의 일이다.


글짓기가 아니라 글쓰기라고 가르쳐준 건 《우리글 바로 쓰기》, 《우리 문장 쓰기》, 《삶을 가꾸는 글쓰기 교육》을 강조하신 이오덕 선생님이었다. 이오덕 선생님은 《글쓰기 어떻게 가르칠까》에서 글쓰기 교육의 목표가 아이들을 정직하고 진실한 사람으로 키우는 데 있고, 그것이 곧 아이들의 삶을 가꾼다고 하셨다. ‘글짓기’는 삶을 떠나 거짓스러운 글을 머리로 꾸며 만드는 흉내 내기 재주를 가르치고, ‘글쓰기’는 참된 삶을 가꾸는 정직한 자기표현의 글을 쓰게 하는 교육이라고.


《살아있는 글쓰기》, 《갈래별 글쓰기 교육》의 이호철 선생님과 《강아지똥》으로 유명한 권정생 선생님을 통해서도 많이 배웠다. 세 분을 통해 나는 삶과 분리되지 않는 글쓰기, 적극적으로 삶과 연결되고 삶을 가꾸는 동시에 삶을 살리는 글쓰기의 힘을 익혀갔다.


본격적으로 글쓰기에 입문한 계기는 황선미 작가의 <마당을 나온 암탉> 애니메이션 영화를 보고 나서다. 글을 쓰고 싶다는 강렬한 욕구가 일었다. 강렬한 욕구는 곧 신박한 용기로 나아갔고 행운의 여신까지 손짓했다. 나에게는 새로운 매체인 영화로 연결되었고, 신문사 사람들과 소통하게 되었다. 영화 밖에 있던 사람이 영화 전문가들과 나란히 영화칼럼을 쓴, 참 놀라운 시즌이었다.


영화감독이 해석하고 보여준 세상은 흥미진진했다. 서서히 영화의 마력 속으로 빠져들었다. 때로는 그 세상이 적나라하고 가혹해서 많이 아팠다. 글을 구성하고 주제로 연결 짓는 진통도 있었지만, 익명의 독자들에게 나만의 영화 소회를 전하는 기쁨과 영향력에 매료되었다. 아주 가끔은 내가 쓴 거 맞아? 하며 감탄도 했다. 무언가에 끌리듯 곧장 영감이 떠오르거나 누가 불러주는 것처럼 죽 글이 써지는 경험은 짜릿하고도 신비했다.


글쓰기의 전율을 경험한 사람으로, 윌리엄 진서의 말을 내 식으로 해석해 본다. 글을 쓰면 내 감정과 욕구가 드러나고, 보이지 않던 세상이 선명해진다. 이것은 누구보다 나를 응원하고 지지하는 든든한 기반이다. 내 감정과 생각을 존중하며 수용한 글은 무엇보다 나에 대한 신뢰를 더 깊고 단단하게 구축한다. 이제 글쓰기는 모호한 현상과 감정을 풀어헤쳐 다양한 사고와 사유 금고에 채워 넣는 귀중한 나의 실물자산이다.



지금도 글쓰기 자아는 나의 글쓰기를 재촉한다.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은 아찔한 희열을 잊지 못해서다. 나를 대표하는 ‘글쓰기 자아’는 여전히 나의 글을 믿고 내게 전적으로 의지하면서 보이는 세상과 보이지 않는 세계 사이를 예의 주시한다. 글쓰기 자아는 알고 있다. 보이는 세상에 사는 우리를 움직이는 힘이 결국은 보이지 않는 세계로부터 온다는 지금 여기의 현실을.





#브런치 작가님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건필하세요~~^^


*AI 학습 데이터 활용 금지

*이미지 출처: Pinterest@Mary Ban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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