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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아이와 달렸고 싸우지 않았습니다.

[대만 소소한 일상] 러닝 보조의 뿌듯함

by KHGXING

“각오하고 뛰어라”


아침 7시 운동을 나가는 길에 와이프의 엄중한 경고 한 마디가 뒤통수에 와서 꽂힙니다.


그 말인즉슨 이렇습니다. 오늘 러닝은 아이와 함께 할 계획인데 이 녀석이 힘들어 할 터이니 각종 짜증과 불만을 쏟아낼 거랍니다. 그러니 잘 받아주고 달래면서 6km 완주하고 오라는 당부죠. 평소 와이프와 아이 둘이서 운동 나갔다가 서로 말 폭탄 한 바가지씩 하고 돌어오는 모습에 익숙한 터라 긴장 아닌 긴장이 됩니다.


지난주엔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야근 하고 있는데 와이프한테 온 카톡이 울립니다. “운동장 같이 나갔다가 대판 싸우고 옴”


그러려니 했습니다. 머 일상이기에 무덤덤하죠. 근데 이번에는 그 이유가 저로서도 신기해서 의아했습니다. 집 근처 운동장 한 바퀴가 400m인데 와이프 말로는 2바퀴 돌았다 하고, 아이 녀석은 5바퀴 돌았다는 거에요. 둘 다 진지하게 ‘우겨댑니다.’ 저로서는 이해가 잘 되지 않습니다. 2바퀴와 5바퀴, 착각하기에는 너무 큰 횟수 차이 아닌가요?


하여간 이런 ‘흉흉한 소문’을 들어왔기에 오늘 아침 달리기가 긴장되긴 합니다. 게다가 달린다는 게 여간 녹록치 않은 것은 사실이니까요. 달리다 보면 힘드니 짜증이 날 거고요. 아침 7시라 하더라도 이미 해는 높게 떠 있고 대만 더위는 여전하니 그 속에서 뛰다 보면 땀도 한 바가지입니다. 그 분풀이를 바로 옆에 있을 ‘먹잇감’ 아빠에게 할 것이고 그럼 또 자기처럼 아주 극렬하게 부딪치며 들어 올까봐 와이프는 지레 걱정이 된 것이죠.


그래도 이 녀석 꽤 빠릅니다. 저는 보통 5k 달리면 30분에서 32분 정도 걸립니다. 1k당 6분으로 달리는 셈인데 이 정도면 저로서는 만족스러운 수칩니다. 그런데 이 녀석은 학교에서 달리는 기록을 보면 5k를 24분에 달립니다. 1k당 5분 안짝으로 들어오는 건데 훌륭하지 않나요?


오늘 저는 자전거를 타고 아이 보조를 담당할 요량입니다. 괜히 따라가려다 뒤쳐져 쓰러지지 말고 아이 보조나 잘 하고 오라는 와이프의 신신당부에 그렇게 하기로 했습니다. 대만에선 유바이크라는 공유 자전거가 잘 되어 있어 자전거는 어디서나 쉽게 탈 수 있죠.


주로 달리는 쌍계천변까지 집에서 걸어서 1k입니다. 약간 빠르게 걸어가며 아이와 이 얘기 저 얘기 합니다. ‘대만에도 가을이 오긴 오나보다’ 부터 해서 ‘엄마 오늘 오전에 약속 있어서 나갈 테니 우리 둘이서 아침으로 단빙(蛋餅) 사먹을까?’ 등등 시시콜콜한 이야기입니다. 아이랑 저랑 죽이 좀 잘 맞긴 합니다. 특히 음식 관련해서요. 둘 다 아주 먹는 걸 좋아합니다.


하여간 분위기 나쁘지 않습니다. 요대로만 하면 아내가 걱정하는 일은 발생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강변에 도착하기 전 유바이크 빌렸습니다. 강변에 도착해서는 이제 각자 시계를 맞춥니다. 지난번처럼 ‘2바퀴와 5바퀴 오해 참사’가 발생하면 안 되니까요.


오늘 목표는 6k 35분 달리기입니다. 시작합니다.


달리는 그림자 모습.jpg


달리자마자 1~200m 지나가기도 전 시계를 들여다봅니다. 아이 속도가 나쁘지 않아서요. 시속 12k 속도입니다. 1k당 환산하면 5분입니다. 물론 처음이니까 그럴 수도 있지만 하여간 괜찮네요.


달리는 자세도 확연히 달라졌습니다. 모든 운동이 그렇듯이 러닝도 자세가 예쁘면 더 잘 달립니다. 올 초만 하더라도 달리기 모양이 다소 엉거주춤했는데 오늘 보니 제대로 된 모습으로 달리네요. 제가 다 뿌듯합니다.


아이 달리는 2~3m 뒤에서 자전거 페달을 밟고 있습니다. 보통 러닝 힘을 북돋는다면 약간 앞에서 달리며 끌어주는 형태겠지만 오늘은 그냥 아이 페이스에 맞추려 합니다. 그리고 ‘파이팅!’, ‘조금만 더!’ 등 소위 격려의 말을 삼가고 있습니다. 아이 녀석도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처음부터 ‘경고’네요.


이 녀석 보니 저랑 비슷합니다. 저도 그래요. 힘을 북돋는다고 격려한다고 하는 말이 오히려 거추장스럽거나 신경에 거슬리는 것을 많이 경험합니다. 그냥 묵묵히 바라보면 되는데, 그럼에도 던지는 말들은 솔직히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이 힘을 받으라 하기 보다는 그 말을 하는 사람들의 자기만족인 경우가 더 많습니다. 그냥 바라만 보고 있으면 됩니다.


1k 지점 시간을 보니 4분55초 정도입니다. 훌륭합니다. 이러한 페이스는 2k에도 이어집니다. 자전거 페달을 어느 정도 밟지 않으면 따라가지지 않을 속도입니다. 만족스럽습니다.


달리기 옆모습(흑백 스케치 형태).png


3k 지나며 이제 좀 속도가 늦어집니다. 시속 9k에 미달하는 속도네요. 아무 소리도 하지 않습니다. 그냥 재밌어요. 이 녀석 힘들면서도 계속 뛰어가는 모습을 보면 그냥 미소를 짓게 됩니다. 아이 모습을 보니 땀도 송골송골 맺히네요.


4k 지나서는 자세에서도 다소 힘든 기색이 보이네요. 결국 잠시 멈췄습니다. 표정 보니 (제가) 잘 대응해야겠다는 마음가짐을 갖게 됩니다. “멋져! 속도나 자세나 모두 좋아! 시원한 물 한잔 마시고 갈래?” 아이가 고개를 주억거립니다. 물병을 건넵니다. 물 한 모금 마시더니 바로 뛰어갑니다. 제법입니다.


이제 5k를 지났습니다. 시간은 27분 정도 지난 것 같습니다. 목표했던 6k까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강변을 돌아 건너편에 와 있는데 계속 뛰어 올라가 고궁박물관 가는 도로까지 와 있습니다. 아이가 시계 버튼을 누릅니다. 제 시계도 보니 6k를 이미 지났네요!


진심으로 함박웃음을 짓게 됩니다. “너 놀랍다! 잘 했어!” 숨을 고르고 걸으며 시간을 체크하는 녀석. 목표했던 35분 안으로 들어왔기에 나름 괜찮게 뛰었다는 생각이 자기도 들었나 봅니다. 보기 좋습니다.


전 그렇습니다. 성공이 성공의 어머니라고요. 실패가 성공의 어머니라 하지만 그럴 수도 있지만 일반 사람들에겐 성공의 기억이 더 중요한 것 같습니다. 그 기억에 다시 한번 할 힘이 나는 것 같습니다. 실패가 성공의 어머니가 되는 사람은 정말 범상치 않은 사람들이에요. 그러기는 더 어렵기 때문입니다. 아무쪼록 다음번엔 분명 더 잘 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칭찬도 적당한 수준에 해야 합니다. 사회생활 하다 보면 무조건 칭찬을 사방팔방 날리는 사람들이 많은데 별 감흥이 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전 그런 칭찬은 안 듣는 게 더 좋을 때도 많습니다. 진심이 아니고 습관성 칭찬인데 하나마나란 생각이 들어서요.


오늘 제가 아이에게 했던 감탄은 진심입니다. 또는 진심에 가까운 목소리입니다. 또는 안도의 소리일 수도 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아이와 아주 다정하게 돌아올 수 있었거든요. 저한테는 주말 즐거움 가운데 하나인 테니스도 치지 않고 아이와 뛰었는데 이 시간이 그 테니스보다 더 즐거웠다니 기분 좋네요.


아내의 경고와 불안감은 맞지 않았습니다. 그것 또한 너무 좋네요.


강변 모습.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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