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일: 산티야나 델 마르에서 코미야스(26.4km)
2019년 6월 5일(수)
일어나서 발바닥을 먼저 살폈다. 자기 전에 갈아 끼운 무명실을 통해 물집 안에 있는 물은 다 나온 상태였다. 앱을 보면서 오늘 걸을 거리를 보니 어제 비하면 짧은 거리였다. 다 걷고 난 후 보니 26km였다. 실을 빼내고 밴드로 갈아 끼운 후 출발했다. 아침 공기는 신선했고 이름 모를 새들의 노래는 콧노래를 부르게 할 만큼 좋았다.
이곳에서 1시간 정도를 걸어가면 알타미라 박물관이 있다. 인류 최초의 벽화라고 알려진 알타미라 벽화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왕복 2시간을 그리고 물집 난 발로 왕복하기는 쉽지 않아서 포기했다. 박물관에는 알타미라 벽화를 완벽하게 묘사해 놓은 가품도 있다고 하는데 지금도 가보지 못한 것이 아쉽다.
마을을 빠져나가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앱을 보니 코미야스까지 10개의 마을을 거치는 순례길이었다. 오레나에 다다르니 저 멀리 바다가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 높지 않은 언덕 위에는 “여기를 지나가야 해”라고 말하는 듯 성당이 자리 잡고 있었다. 드넓은 초원지대를 통과해서 성당으로 향하는 길은 기억 속에 있는 명절을 떠올리게 했다.
지금은 혁신도시로 개발되어서 없어졌지만 어렸을 때 명절이 되면 우리 식구는 시내버스를 타고 큰집에(큰아버지 댁) 갔다. 아주 어렸을 때는 안행교를 지나면 비포장 도로였지만 기억을 할 수 없는 어느 때부터인지 큰집 가는 길이 포장길로 바뀌어 있었다.
척동이란 마을에서 내리면 길 건너편에는 할아버지 집에서 시작한 교회가 자리 잡고 있었다. 마을 입구에는 커다란 느티나무가 있고 그다음으로 마을 회관이 보였다. 마을 회관을 지나 거의 마을 끝에 가면 큰집이 있었다. 그때 걸었던 그 길은 직선이 아니었다. 느티나무까지는 반원이었고 마을회관까지도 반원에 가까운 돌아가는 길이었다.
반원에 가까운 길은 마을 구석구석을 볼 수 있어서 좋았다. 직선이었다면 보이는 곳이 한정되니 말이다. 집집마다 지붕 색깔도 틀려지는 것도 볼 수 있었고 계절별로 달라지는 마을 뒷산도 직선 길이었으면 보지 못했을 것이다.
성당으로 가는 길도 반원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직선은 아니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성당의 다른 면들도 볼 수 있었다. 성당 앞에 다다르니 밑에서 봤던 것과는 달리 조금 규모가 있었다. 그리고 앞으로는 탁 트인 초지와 바다가 내 눈과 마음을 시원하게 해 주었다.
성당을 뒤로하고 내려가는 길에 나무 표지판에는 산티아고까지 530km라고 알려주었다. 코브레스 초입에 다다랐을 때 나는 앞에 보이는 노란색 레인커버를 보았다. 혹시나 하면서 뒤를 쫓아갔는데 노란색 레인커버는 코브레스 성당으로 갔다. 조금 속도를 높여 따라갔다. 역시나 예감은 맞았다.
노랑 배낭의 주인공은 나에게 ‘비아누’를 선물해준 할아버지였다. 반가운 마음에 “올라~~~”했더니 할아버지도 나를 알아보고 환히 웃으셨다. 코브레스 성당에는 순례자를 형상화한 강철 구조물이 있다. 나도 사진을 찍고서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할아버지는 굳게 닫힌 성당 문을 몇 번이고 두드려 보았고 순례자 구조물을 찍고서 나처럼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아침에 비가 올 것 같은 날씨는 구름이 조금씩 떠있는 화창한 날씨로 얼굴을 바꾸어가고 있었다.
코브레스를 지난 카미노 길은 작은 해변을 거쳐 라 이글레시아로 이어졌다. 순례길을 걸으면서 내가 가장 많이 본 동물은 소였다. 드넓은 초지에는 소들이 달랑거리는 방울을 목에 매고 풀을 뜯고 있었다. 소들의 종류도 다양했다.
투우대회에 나올법한 뿔이 긴 소도 있었다. 우리나라 소를 닮은 누런 소도 보았고 흔히 보았던 얼룩무늬 소도 자주 보았다. 중간중간 말이 소와 함께 풀을 뜯는 모습도 보기도 했다. 보는 것은 참 좋았다. 그런데 소들이 길에 싸놓은 배설물들은 지뢰밭을 피해 가는 것처럼 나를 힘들게 했다. 보기 좋게 뻗은 도로에도 소들의 흔적은 정말 크게도 남아있었고 우리나라 같았으면 소 주인 엄청 욕먹었겠지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었다.
마지막 마을인 콘차를 지나 주택가를 지난 순례길은 코미야스 광장에서 끝났다. 이곳에는 공립 알베가 없었다. 그래서 가장 저렴한 사립 알베를 찾았다. 주택가 언덕에 위치한 알베에 들어갔다. 알베 주인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스펜인말로 뭐라 하는데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었다. 통역기를 돌리면 그래도 필요한 의사소통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와이파이 비번을 알려달라고 했다. 그런데 주인은 잠시 기다리라면 손짓을 하고 자기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이윽고 나에게 보인 화면에는 ‘너 예약했니’라는 영어가 눈에 들어왔다. 고개를 저었더니 예약 손님 때문에 이미 만실이라고 영어로 된 답변이 눈에 들어왔다. 순간 눈 앞에 캄캄해졌다. 하지만 이미 리엔도에서 경험했던 일이라 다른 알베를 찾아야지 하면서 알베를 나왔다. 검색을 해보니 알베는 눈에 띄지 않았고 결국 가장 저렴한 호텔을 찾아갔다.
돌아 나온 알베에서 400m 떨어진 곳에 호텔이 있었고 가격은 45유로였다. 다음 마을까지 가기에는 이미 시간이 빠듯했다. 그리고 더 어려운 것은 왼쪽 발바닥 물집 때문에 더 이상 걷는 것은 무리였다. 45유로를 주고 호텔에서 묶기로 했다.
이때만큼이나 예약이란 글자가 미웠던 때가 앞으로 한 번 더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쉬운 마음으로 키를 받아서 방에 들어갔다. 그리고 나는 만세를 불렀다. 화장실에 욕조가 있었기 때문이다.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는 것으로도 몸은 회복 되었다. 하지만 어제 같이 바람을 많이 맞은 날에는 따뜻한 물에 몸을 담갔으면 하는 마음이 굴뚝같았다.
대충 짐 정리를 하는 동안 욕조에 물을 틀어 놓았다. 내 몸이 들어가도 물이 넘치지 않을 만큼 물이 욕조에 찬 것을 확인하고 몸을 물속에 담갔다. 16일 만에 몸을 물에 담그니 천국이 따로 없었다. 온몸의 긴장된 근육들이 스멀스멀 풀리고 나른해지는 느낌은 정말 좋았다.
나른함의 기분을 나는 침대로 가져갔다. 한 시간 정도 잔 것 같았다. 그래도 밖은 어두워지지 않았다. 저녁을 먹기에는 이른 시간이었다. 이곳에 가우디의 작품이 있다는 것을 책에서 읽었다. 작품이 있는 곳에 마침 마트도 있어서 주섬주섬 옷을 입고 길을 나섰다.
마트에서 내일 아침, 점심거리를 사서 가우디의 작품이 있는 공원 앞에 도착했다. 그런데 30분 뒤에 문을 닫는 시간이었다. 작품을 감상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라고 생각해서 발길을 돌려서 광장으로 향했다. 광장으로 가는 길에는 노란색 화살표가 내일 갈길이 여기야 하면서 알려주었다. 저녁 시간이 되어선지 사람들이 북적이고 있었다.
뭘 먹을까 하면서 광장 근처 식당을 기웃거렸다. 마침 사진으로 메뉴를 보여주는 식당이 있어서 내가 먹고 싶은 음식 사진을 찍어서 점원에게 보여주며 주문을 했다. 결론은 꽝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내가 시킨 음식은 해물 빠에야 세트메뉴였다. 그런데 빠에야의 쌀은 설익어서 생쌀을 씹는 느낌이었다. 그나마 두 번째 나온 음식이 허기진 배를 채워주었다. 디저트도 아이스크림이었는데 포장된 막대 아이스크림이었다. 가격은 14유로. 돈을 지불하면서 얼마나 화가 나던지. 이날 이후로 식당에서 밥을 먹을 때 나는 사람이 없는 곳에는 가지 않았다.
호텔로 돌아오면서 보니 대부분의 식당이 daily menu를 14유로에 판매하고 있었다. 다시 한번 땅을 쳤다. 그러나 어쩌랴 이미 뱃속에 들어간 것을. 넓은 호텔방에서 나는 오랜만에 푹신한 침대에서 꿀잠을 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