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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랑쥐 Jun 18. 2021

[남편의글]빨간 고무장갑을 끼고 에어기타를 치는 꿈

꽤 흡족한 소비

intro

꽤  흡족한 소비



이거 사고 꽤나 만족스러웠던 것 있어?

사놓고 아직 자랑해보지 못한 물건.

혼자 만족스러워서 낄낄 거렸던 거 말이야.


아니면

남들한테 민망해서

사놓고 말하지 못한 거라도 좋아


이제 자랑 한번 해봐!

이런 특별한 경험 너도 있을걸?





빨간 고무장갑을 끼고 에어기타를 치는 꿈


"음악 좀 다른 걸로 넘기면 안 돼?"


웬만한 건 다 이해 해주는 아내가 참지 못하는 게 하나 있다. 

차에서 헤비메탈 곡이 쿵쾅쿵쾅 울릴 때다. 음악이 기타솔로 부분을 지나 절정을 향해 달려갈 때는 전두엽에 아드레날린이 분사되는 게 느껴진다. 

어깨가 들썩들썩, 고개는 까딱까딱. 그럼 불안한 눈빛으로 아내는 다른 곡으로 넘겨버린다. 

에이, 한참 좋았는데.


고등학생 때 내 꿈은 록스타가 되는 것이었다. 

대학생이 되면 반드시 머리를 어깨까지 길러서 기타를 치며 헤드뱅잉을 하려고 했다. 

내 우상인 '메탈리카'의 기타리스트 '커크 해밋'처럼.


실제로 수능 시험이 끝나고 제일 먼저 한 일은 통기타 하나를 사서 실용음악 학원에 등록한 것이다. 대학교에 가서는 결국 원하던 록 밴드에 들어갔다. 가장 거친 음악을 하는 스래시 메탈 밴드로! 


하지만 열정은 오래 가지 못했다. 친구들과 술 마시고 놀러다니기에 바빠서 제대로 연습해본 적이 없었다. 불성실한 밴드 부원이었다. 자취방 한 구석에 세워진 전자기타에는 먼지만 쌓여갔다. 결국 나는 한 학기만에 록 밴드를 나왔다.


그렇지만 록 음악에 대한 애정은 여전히 마음 속 한 구석에 불꽃으로 남아 있었다. 좋아하는 밴드가 내한 공연을 오면 공연장에 가서 모르는 사람들과 어깨동무를 하고 떼창을 하고 온 뒤 잠자리에 누워서 못 이룬 록스타의 꿈을 꾸곤 했다. 


그러던 중 내 마음에 다시 불을 지피는 상품을 발견했다. 전자악기 브랜드 펜더가 블루투스 스피커를 발매했다는 것이다. 밴드부 선배들은 나에게 "어차피 기타 쇼핑은 펜더로 끝나니 시작부터 펜더를 사라"고 귀가 닳도록 말했다. 돈이 없던 내가 간신히 40만원을 모아 중고로 산 기타를 보면서 하는 말이었다. 


그때는 그렇게 비싸고 선망의 대상이었던 펜더가 이제는 보급형 블루투스 스피커도 만들고 있었다. 록음악의 인기가 시들면서 전자기타만으론 살아남기 어려웠을 것이다. 


2019년 여름, 펜더에서 만든 스피커 '인디오'를 직접 보러 용산 전자상가의 한 악기상에 갔다. 전원을 올리자 "따라란~" 잘 튜닝된 전자기타 소리가 울렸다. 그 자리에서 구매해 집으로 가져왔다. 


가정에서 듣기에 충분한 40와트의 출력, 과장하거나 뭉개지 않은 정직한 베이스 소리, 쭉쭉 뻗는 고음이 마음에 들었다. 아날로그 감성을 그대로 살려놓은 투박한 디자인도 취향저격이었다.


우렁찬 음악을 틀어줘야 하는데 자취방에 살면서는 소심하게 볼륨을 낮추고 들을 수밖에 없었다. 결혼을 하고 거실이 있는 집으로 이사를 하면서 이 스피커도 따라왔다. 

이사하면서 살아남은 몇 안 되는 내 물건이다. 

TV와 에어컨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손님이 온 날엔 카페 음악을 틀어 분위기를 내는 역할을 톡톡히 한다. 


펜더스피커의 위상



그러나 헤비메탈 만큼은 '지구 종말할 것 같은 소리'라고 표현하는 아내의 눈치를 보느라 당당하게 볼륨을 높이지 못하고 있다. 나에게 허락된 시간은 아내가 운동이나 약속으로 외출한 주말 오후 뿐. 

펜더 스피커의 볼륨을 올리고 설거지를 하면서 메탈리카의 2집 '라이드 더 라이트닝'을 정주행한다. 

헤드뱅잉도 맘껏 하고 고무장갑 낀 손으로 기타 연주 흉내도 실컷 낸다. 


펜더로 헤비메탈을 즐기는 방구석 록스타가 되는 이 순간, 

아내는 모르는 나만의 꿈에 다가가는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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