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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홍 Oct 20. 2021

랜선 제주 여행 - 익숙한 제주 낯설게 즐기기

프롤로그 - 코로나와 함께 한 1년 

 처음에는 별거 아니려니 했다. 며칠 이러다 말겠지 싶었다. 우리나라에서 코로나 확진자가 처음 나온 게 2020년 1월 20일이었다. 이후 한 달여간 확진자는 하루에 한두 명에 불과했다. 확진자가 발생하지 않은 날이 더 많았다. 언론에서도 가끔 단신으로만 뉴스를 전했다. 일상은 언제나 마찬가지로 완벽하게 평범했고 가끔 지루했다. 마침 봄꽃이 필 무렵에 맞춰 제주도 가족 여행을 계획했다. 그간 제주 가족 여행은 주로 여름에만 떠났고 한두 차례 가을 제주도 만나봤지만, 봄의 제주는 겨울 제주만큼이나 무척 낯설었다. 탐구해야 할 미지의 세계였다. 사실 나는 우리 가족 중 가장 먼저 봄을 만났다. 봄의 문턱에서 언제나 제주로 향했다. 일부러 출장 핑계를 만든 건 아니었지만 5년 동안 한 해도 거르지 않았다. 그때 처음 제주의 벚꽃을 보았다. 우리나라 최남단에 있는 제주도는 가장 먼저 벚꽃이 피었다. 개화 시기에 맞춰 '왕벚꽃 축제'도 열렸다. 팝콘처럼 터진 제주의 벚꽃은 유난히 희고 탐스러웠다. 겨우내 땅속 깊숙이 잠들었던 생명이 기지개를 켜고 새로운 여정을 준비하는 봄의 제주는 작열하는 태양 아래서 시원한 바다에 몸을 맡기는 여름과는 확연히 다른 세상이었다. 봄의 생기로 가득한 제주를 아내와 아이들에게도 꼭 한번 보여주고 싶었다. 함께 해야 할 모험도 많았다. 제주 한달살이할 때 계획했다가 이런저런 사정이 생겨 가지 못했던 다랑쉬 오름과 용눈이 오름도 오르고, 장장 10km에 걸쳐 유채꽃과 벚꽃이 흐드러지게 펴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도 꼽힌 '녹산로'도 손잡고 걷고 싶었다. 진달래며 철쭉이 황홀할 정도로 흐드러지게 핀다는 한라산 영실도 오를 참이었다. 따뜻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해안선을 따라 자전거 여행도 계획했다. 봄의 제주가 나를 욕심쟁이로 만들었지만, 그 욕심이 부끄럽지 않았다.     


 설레는 마음으로 비행기표를 예약하고, 마음에 드는 숙소를 찾아 검색하느라 매일 늦은 밤까지 잠들지 못했다. 여행자에게는 준비하는 과정 역시 또 하나의 즐거움이었다. 그런데 그만 일이 터졌다. 코로나 상황이 점점 심상치 않았다. 하루 확진자 수가 점점 늘더니 급기야 천여 명에 이르렀다. 감기처럼 가볍게 지나갈 줄 알았던 코로나가 우리 삶 한가운데로 깊숙이 파고들었다. 속보로 특집으로 코로나발 기사가 연일 쏟아졌다. 첫 사망자도 나왔다. 마치 인류 최후의 날이 눈앞에 성큼 다가온 것 같았다. 불안감이 공포로 바뀌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빠르게 번지는 낯선 전염병을 막기 위해 ‘사회적 거리두기’라는 생소한 방역지침이 시행되었다. 아이들 개학이 한두 주 연기되더니 급기야 등교 대신 비대면 수업을 진행했다. 회사들도 빠르게 재택근무로 전환했다. 코로나로 10년이 앞당겨졌다는 '언택트 시대'는 혼돈 그 자체였다. 낯선 것투성이였다.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었다. 아무도 예상할 수 없었던 일이었으니까. 당연하게 여겼던 일상,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같으리라는 확신은 봄날 아지랑이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바뀐 일상은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듯 불편했지만 삶은 계속되어야 했다. 우리 가족 또한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려 부단히 노력했다. 매일 다니던 수영장을 더는 갈 수 없게 된 아이들과 틈나는 대로 동네 뒷산에 올랐다. 줄넘기와 배드민턴도 수영의 부재를 채워주었다. 적어도 ‘확찐자’는 되지 말자고 약속했다. 영화관에 가지 못하는 대신 주말이면 거실에 캠핑용 스크린과 빔프로젝터를 설치해 가족 영화관을 차렸다. 때론 김치볶음밥, 때론 피자와 팝콘을 먹으며 좋아하는 영화를 함께 보았다. 부루마블로 세계 도시들을 정복하고, 할리갈리와 치킨차차, 고스트 헌터 같은 보드게임으로 치열한 승부의 세계를 펼쳤다. 사회적 거리두기라는 새로운 생활방식 때문에 마음 편히 외출할 수 없어 답답했지만, 그런대로 견딜만했다. 게다가 아직 제주 여행이라는 희망의 불꽃도 활활 타오르고 있으니 버틸 수 있었다. 그때는 몰랐다. 그 불꽃이 바람 앞의 등불이었다는 걸.      


 달력 날짜를 하나둘씩 지워가던, 제주 출발이 얼마 남지 않은 어느 날이었다. 텔레비전에서 충격적인 뉴스를 보았다. 아이들과 손잡고 걷고 싶었던 녹산로의 유채꽃 길이 사라졌다는 보도였다. 코로나 시대에 관광객의 발길을 잡아끄는 유채꽃을 가만히 둘 수 없었나 보다. 축구장 13개 크기라는 유채꽃밭은 트랙터 4대가 온종일 갈아엎어야 할 만큼 넓었다. 봄 나비가 훨훨 날아다녀야 할 꽃밭에 뿌연 흙먼지만 가득했다. 트랙터 아래로 짓이겨지는 유채꽃들이 비명을 질러댔다. 저 곱기만 한 유채꽃들이 무슨 죄가 있을까…. 유채꽃밭을 갈아엎기로 한 마을 주민의 마음도 편하지만은 않았을 터였다. 아직 코로나 청정지역이던 제주에 관광객과 함께 전염병이 올까 두려웠을 그분들의 깊은 고민을 이해할 수 있었다. 마을 주민도 유채꽃도 안쓰러웠다. 아름다운 녹산로를 걷는 것 말고도 가보고 싶은 곳, 해보고 싶은 일들이 많았지만, 가족회의 끝에 제주 여행을 포기하기로 했다. 우리의 행복이 누군가의 불행으로 이어지길 바라지 않았다. 집에 머무르기로 했다.      


 제주에 닿을 수 없다는 걸 깨닫자 그리움은 더욱 커졌다. 인간은 가질 수 없는 것을 더 욕망하는 법이니까. 봄의 제주는 만개한 벚꽃들로 아찔하다. 꽃망울이 다른 지역보다 훨씬 큼지막하다. 수사적인 표현이 아니라 정말 터진 팝콘 모양 그대로 닮았다. 해운대 달맞이 고개에서 본, 여의도 윤중로에서 본, 설악산 입구 벚꽃 터널에서 본 벚꽃 모두 감탄사가 절로 나왔지만, 꽃망울만 보면 제주의 그것을 벚꽃의 여왕이라고 부를 만했다. 유채꽃은 또 어떤가? 제주에서 유채꽃은 기름을 얻기 위한 유료 작물로 처음 재배되었다. 추위와 습기에 강하고 빨리 자라는 습성이 있어 척박한 섬의 토양과 잘 맞았다. 유채꽃은 고달픈 삶을 살았던 제주의 아픈 기억이기도 한 셈이다. 언제부턴가 지천으로 핀 유채꽃이 제주 하면 떠오르는 상징적인 이미지가 되었다. 봄이면 상춘객을 불러 모으는 대표적인 관광상품이 되었다. 한 해에도 몇 번씩 20년 넘게 제주를 찾았으니 그 풍경이 익숙해질 법도 한데 여전히 만개한 유채꽃을 보면 눈 내리는 날 마실 나온 동네 개처럼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좋아 어쩔 줄 모른다. 한라산 영실 탐방로의 진달래 능선은 어떤가? 아름다운 풍경이 차고 넘치는 제주에서도 가장 아름답다고 손꼽히는 절경이 아니던가! 올봄 꼭 걸어보리라 다짐했던 제주의 꽃길들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가지 못하니 그 어느 때보다 더 간절히 제주에 가고 싶었다. 그때 어떤 생각 하나가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우리 가족처럼 제주로 떠나지 못하고 스스로 고립된 여행자들을 위로해 줄 방법이 없을까? 나보다 남을 먼저 배려하는 사람들과 제주를 향한 그리움을 함께 나눌 방법이 없을까? 이런 질문에서 '랜선으로 떠나는 제주 여행'이라는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마침 제주 한달살이하면서 찍었던 예쁜 사진들과 공부했던 책들도 있어 시도해볼 만했다. 사실 한달살이가 끝난 후 그 경험을 책으로 출판할 욕심으로 써놓은 졸고도 있어 새로 써야 한다는 부담도 적었다. 물론 그중 일부를 SNS에 <탐라유람기>라는 제목으로 소개하기도 했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많은 관심은 받지 못했다. 예전에 쓴 글을 그대로 옮길 수는 없어 거의 새로 쓰다시피 했다. 그동안 제주 여행하며 찍었던 만 장이 넘는 사진을 다시 하나하나 살펴보기도 했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에게나 익숙하고 친숙한 제주를 어떻게 하면 색다르게 즐길 수 있을지 고민했다. 여행 전문가도 아니고 제주 전문가도 아니므로 평소 우리 가족이 제주를 즐기는 방법 그대로를 소개하기로 마음먹었다. 비슷한 듯 다른 우리만의 제주 여행에 동참하고, 여러분도 각자만의 방식으로 제주를 즐기게 되기를 바란다. 이 글을 쓰는 내내 즐거웠다. 글을 쓰면서 위로받기도 했다. 글을 쓴다는 행위 자체만으로도 행복했지만, 그 대상이 제주라 더할 나위 없었다. 이 글은 제주로 떠나지 못한 여행자의 애절한 자기 고백이자 애틋한 연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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