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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홍 Sep 15. 2024

블랙아웃_2030년 6월

<한뼘소설> 31화

 민준은 날 선 목소리로 에어컨 바람 세기를 최대치로 요청했다. 구멍 난 풍선에서 바람 빠지는 듯한 소리가 들리더니 순식간에 냉기가 신형 아이오닉 10을 덮쳤다. 운전대에 습관적으로 올려 둔 손이 시원해지자 뾰족했던 마음이 조금은 뭉툭해졌다. 계절의 경계가 흐리터분해진 요즘, 1년에 절반 소리 없이 돌아가는 에어컨이 유일한 구세주였다. 오죽하면 '인간은 어머니에게서 나서 에어컨 곁에서 죽는다'라는 썰렁한 농담이 유행했다. 이른 시간인데도 고지식한 태양은 한순간도 게으름 피울 줄 몰랐다. 맹렬히 내리꽂는 열기에 단단한 아스팔트가 오븐 속 모차렐라 치즈처럼 사르르 녹아내릴 듯했다. 지난밤 민준은 지독한 열대야로 잠을 설쳤더랬다. 살인적인 더위가 밤낮을 가리지 않은지 오래되었다. 기상 관측을 시작한 이래 가장 더운 여름으로 기록되리라는 뉴스가 연일 SNS를 도배했다. 지난해에도, 그 지난해에도 토씨 하나 다르지 않았다. ‘양치기 소년과 늑대’ 우화처럼 사람들은 점점 날씨 뉴스에 둔감해졌다. 더 더워지면 에어컨을 더 세게 틀면 그만일 뿐이었다. 어제도 그럭저럭 살만했으니 오늘도, 내일도 괜찮으리라는 허튼 희망 속에서 위태로운 일상은 계속되었다. 진한 풍미와 황금색 크리마가 매력적인 카프리치오를 두 잔이나 연거푸 마시고 차가운 물에 샤워까지 하고 나온 민준은 자꾸만 아래로 내려앉는 눈꺼풀을 밀어 올리려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주차장을 방불케 하는 정체가 그런 노력을 번번이 무산시켰다. 

  

 월요일 출근길 정체를 예상해 두 시간이나 일찍 집을 나섰더랬다. 아마도 죄다 같은 바람을 품었나 싶었다. 8차선 도로가 귀경길 고속도로처럼 꽉 막혔다. 그 순간, 운전자의 기분을 눈치챈 AI가 ‘이 시간 교통 정보’ 앱을 자연스레 작동시켰다. 

 “인류 건강, 동물 복지, 지구환경에 이바지하는 대안육 브랜드 베스트 미트와 함께하는 이 시간 교통 정보입니다. 아, 정말 힘든 월요일 아침입니다. 출근길 정체를 피해 아침 일찍 집을 나선 운전자분들은 지금 무슨 상황인지 의아해하실 듯합니다. 서울 시내로 진입하는 모든 간선도로에 빨간불이 들어왔습니다. 올림픽대로나 강변북로도 마치 거대한 주차장을 연상케 합니다. 동부간선도로 성동교 아래 화물차끼리 충돌하는 사고까지 나면서 강변북로 이촌동 부근에서 성수 방향으로 차량 흐름이 사실상 끊긴 상태입니다. 내부 순환로 길음동 부근에는 고장 난 전기차가 흐름을 방해해 신내동에서 신영동 방향으로 진행도 무척 더딥니다. 성산대교 건너 도심 진입도 지체 피하기가 어렵습니다. 내부 순환로 홍은동까지 꽉 막혀있고 옆으로 성산로도 마포구청에서 이대 후문까지 긴 구간 정체입니다. 이 같은 출근길 정체의 원인은 바로 어젯밤 발생한 블랙아웃 때문입니다. 한국전력공사가 긴급 복구팀을 투입했지만, 여전히 도심 일부에서 정전 사태가 계속되고 있어 교통 신호 시스템이 정상적으로 작동되지 않습니다. 출근 준비 중인 분들은 이 점 참고하셔서 가능하면 긴급 복구된 대중교통수단을 이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이 시간 교통 정보 AI 기상캐스터 W.C. 식스(6)였습니다.” 

 듣는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들어 주는 통통 튀는 목소리가 오늘따라 열받는 소식만 전했다. 민준은 운전대 위로 머리를 풀썩 떨어뜨렸다. 어느 해 보다 뜨거운 초여름이었다. 사상 최대 폭염이 지구촌을 강타하더니 며칠 전부터 유럽 몇몇 국가가 블랙아웃에 시달린다는 외신이 들려왔다. 그리고 바로 어제 한 고위 관료가 유튜브 라이브 방송에 출연해 우리 정부는 블랙아웃에 철저한 대비를 해 두었다고 자신 있게 설명했는데 12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대규모 정전이 그가 사는 부자 동네를 포함해 대한민국 심장을 마비시켰다. 그것도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규모 시설물 가동도 하지 않은 한밤중에. 아마 한낮에 발생했다면 엄청난 재앙으로 번졌을 터였다. 불행 중 다행이었다. 정전의 여파라고 해봤자 냉장고에 보관해 둔 하겐다즈 아이스크림이 녹아버렸다거나 출근길 정체가 고작일 테니 말이다. 우리나라는 유럽에 비하면 그나마 형편이 나았다. 올해는 특히 유럽에서도 고위도 지역에 자리 잡은 노르웨이가 이상 기온으로 몸살을 앓았다. 지구 평균 기온이 1.5℃나 상승하면서 이상 기후가 빈번하게 발생했고, 이번 여름에는 수도 오슬로가 기온 관측이 시작된 이래 처음으로 40도를 기록했다. 불과 몇 해 전까지만 해도 6월 평균 기온이 20℃ 안팎이었던 북유럽의 도시가 역사상 최고 기온을 기록하자 전 세계 언론들이 ‘노르웨이가 녹고 있다’라는 자극적인 기사를 앞다퉈 내보냈다. 사실 참혹한 현실에 비하면 기사 제목은 순한 편에 속했다. 한낮의 뜨거운 열기에 철도 선로가 뒤틀려 열차가 전복되는가 하면, 가르데르모엔 국제공항에서는 활주로 일부가 순식간에 부풀어 올라 항공기 운항이 전면 중단되었다. 운송 수단이 멈추자 연이어 물류 대란이 일어났다. 식량과 생필품을 대부분 수입에 의존하는 터라 재난은 또 다른 재난을 촉발했다. 정부가 국가 비상사태인 적색경보를 발령해 학교를 휴업하고 관공서와 기업은 재택근무에 들어갔다. 시민들은 미봉책에 불과하다며 분노했다. 노르웨이 가정 대부분이 에어컨을 갖추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선풍기와 에어컨이 몇 곱절은 비싸게 팔렸지만, 그나마도 금방 바닥이 드러났다. 수요가 많지 않아 재고를 안고 있는 매장이 많지 않았다. 전문가들은 폭염으로 일만 명 이상 숨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몇 해 전부터 북유럽에서도 이상 고온으로 사망자가 발생하는 걸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죽은 이들 대부분은 기후 약자였다. 가난한 이들에게 폭염은 암이나 바이러스보다 더 가혹했다. 케임브리지대 실존위기연구센터에서 근무하는 한 기후 전문가는 BBC와의 인터뷰에서 불과 3년 전에 스웨덴이 겪은 고통을 이번에는 노르웨이가 고스란히 겪는다며 지구 온난화에 따른 이상 기후 현상이 인류가 예상하는 것보다 더 빨리, 더 강하게, 그리고 더 불규칙하게 닥치리라 경고했다. 아울러 지금이라도 각국 정부와 기업들, 그리고 개인이 탄소발자국을 줄이기 위해 노력한다면 3년 후에 ‘핀란드가 녹고 있다’라는 뉴스는 보지 않으리라는 간절한 소망도 함께 전했다. 

  

 신경질적으로 울려대는 자동차 경적에 화들짝 놀란 민준은 미어캣처럼 머리를 곧추세워 창밖을 두리번거렸다. 겨울잠 자는 반달가슴곰처럼 잔뜩 웅크리고 있던 자동차들이 꾸물거렸다. 곧 정체가 풀리리라는 신호였다. 잠결에 꺼진 듯한 자율주행모드를 재빨리 가동했다. 날렵한 그의 전기차가 소금쟁이처럼 미끄러지듯 나아갔다. 민준은 스스로를 환경주의자라고 생각했다. 여전히 여러모로 불편한 전기차를 타고 일주일에 한 번, 월요일에는 비건 식단으로 끼니를 해결했다. 주말에는 마음 맞는 주민들과 쓰담달리기로 운동 겸 거리청소도 했다. 일회용품을 줄이려고 에코백과 텀블러를 늘 지니고 다녔다. 그런 행동이 유별나다는 듯 색안경 끼고 바라보던 친구, 동료들이 하나둘 그에게 탄소발자국 줄이는 방법에 관해 물었다. 민준은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궁금했다. 그가 태어난 이래 지구 평균 기온은 꾸준히 상승했다. 자신처럼 탄소발자국을 줄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났는데도 지구는 계속 뜨거워졌다. 미래가 정해진 양 블랙홀처럼 현재를 빨아들였다. 민준은 가끔 무슨 수를 써도 풀려날 수 없는 탈출 마술 한가운데 있는 실패한 마술사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오늘 아침도 그랬다. 그 순간, 한 운전자가 차마 입에 담기 힘든 숫자들을 열거하며 곡예 운전하듯 민준의 차를 앞질러 나갔다. 꿈틀대며 기어가던 맹수들이 비로소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어느새 시계가 8시 40분을 가리켰다. 꾸물거리다 지각할지도 몰랐다. 민준은 다시 자율주행모드를 끄고 운전대를 꼭 쥐었다. 햇볕은 여전히 수직으로 내리 꽂혔다. 점심은 채수로 맛을 낸 시원한 평양냉면 한 그릇 먹으면 좋겠다 싶었다. 언제 정체가 있었냐는 듯 민준의 차가 8차선 도로를 시원하게 질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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