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순혈주의와 동물과의 교감 관하여
반려동물의 시대다. 개가 유치원에 가기도 하고 유모차에 탄 모습도 심심찮게 보인다.
부모님 연배만 되어도 "개 팔자가 상팔자" 라며 혀를 끌끌 차겠지만, 시대 흐름이 바뀌고 있는 것은 거스를 수 없는 사실이다. 반려견, 반려묘를 상전 대접하는 것은 차치하더라도 동물에 대한 시선이 바뀌고 있는 것은 환영할 만하다. 제레미 리프킨 <회복력 시대>에서는 효율성을 추구하던 시대는 끝났고 인간은 생명체와 자연에 의존해 생존하고 있다는 '생명애' 의식 자각을 통하여 회복력의 존재로 전환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 와중에 이런 기사는 다소 당혹 스럽다.
혼혈 반려견을 순종으로 속여 분양한 가게 업주가 경찰에 넘겨졌다는 기사다. 애견샵에서 꽤 인기가 있는 '꼬동 드 툴레아' 라는 종인데 피해자들은 점점 털이 꼬부라지는 것을 이상하게 여겨서 수사를 의뢰했다고 한다. 수사기관은 3마리 정도를 약 1500만원 정도에 넘긴 것으로 판단하고 있단다.
사기를 친 당사자들이야 처벌 받아야 마땅하겠지만 저 많은 돈을 주고 순혈을 고집하는 사람들에게도 시선이 쏠린다.
순혈주의란 무엇인가.
사전에선 순수한 혈통만을 선호하고 다른 종족의 피가 섞인 혈통은 배척하는 주의라고 설명한다. 굳이 동물까지 논하지 않더라도 인간사에서도 '순혈주의'는 경계해야할 단어로 떠오른지 오래됐다. '순혈주의'라는 단어로 검색을 해봤다. 기사들의 헤드라인만 쭉 훓어봐도 기득권을 깬 인물이나 사건을 설명할때 쓰인다.
<순혈주의 벗어난 한국 야구>
<사장단 확 젊어졌다...외부 인력으로 순혈주의도 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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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혈주의=기득권, 보수를 연상시키는 상징적 메타포. 특히 한국은 단일민족, '순혈주의'가 강한 나라로 보는 시각도 많다. 그것에 대한 자부심이 강할수록 타민족이나 문화에 대한 배타적인 특성도 강해진다.
정체성과 차별 사이에서 우리는 각자 밸런스를 찾고있다.
KB경영연구소가 발표한 ‘2021 한국 반려동물보고서’에 따르면 2020년 말 반려가구는 604만 가구로, 한국 전체 가구의 29.7%를 차지한다. 실제로 강아지 공장을 자처하는 펫샵을 없애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독일은 2002년부터 '동물권'을 법에 명시하고 있다.
나는 김훈 작가의 소설 <개>를 생각했다. 특유의 날것을 보는 듯한 필력으로 개의 시선을 담았다. 집을 짓고 모여서 마을을 이루고 우물을 파고 땀을 흘려 논밭을 일구는, 또 죽은 사람을 잊지못해서 산소를 만드는 인간을 지켜본다. 극중 개의 이름은 보리, 보리가 바라보는 인간들의 아름다움을 그리는 소설이지만 사람들은 그 사실을 잘 모른다. 온몸으로 세상을 감각하고 느끼는 동물만이 안다. 댐 건설로 수몰 위기에 몰린 작은 마을에 사는 사람들은 물이 차오르자 하나 둘씩 마을을 떠난다.
"사람들은 개처럼 저 혼자의 몸으로 세상과 맞부딪치면서, 앞다리와 뒷다리와 벌름거리는 콧구멍의 힘만으로는 살아가지 못한다. 나는 좀 더 자라서 알았다. 그것이 사람들의 아름다움이고 사람들의 불쌍함이고 모든 슬픔의 뿌리라는 것을."
반려동물을 키우는 사람들 중에 많은 이들은 어렴풋이 동물의 이런 감각을 느껴 봤을 것이다. 주인이 집에 돌아오면 문앞으로 달려들며 격하게 반기는 강아지랄지, 멀찍이 떨어져 주인을 살피다 슬그머니 무릎에 앉는 고양이랄지. 말못하는 짐승의 시선을 고민해 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교감은 어렵다.
"말은 온 세상에 넘친다. 개는 그 말을 알아듣는데 사람들은 알아듣지 못한다. 사람들은 오직 제 말만을 해대고 그나마도 못 알아들어서 지지고 볶으며 싸움판을 벌인다. 늘 그러하니, 사람 곁에서 사람과 더불어 살아야하는 개의 고통은 크고 슬픔은 깊다."
왜 베르베르의 <고양이>가 아닌 김훈의 <개>가 떠올랐냐고 묻는다면, 사람이 사람의 아름다움을 알 때까지 개들을 대신해서 짖겠다는 작가의 말도 한 몫했다.
보리가 보는 시선은 허구이지만 말에 갇히지 않으려면 우리는 더 많이 상상하는 것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