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의자 하나 내다 놓기

희곡 읽은 그 다음날

이 아침에 잠깐,


아침에 눈을 뜨면 내 몸의 단 1프로를 먼저 살핍니다. 입안의 공기를 욕실로 가서 헹구어내는 일이죠. 그 순간 거울을 봅니다. 내 얼굴 내 마음 오늘도 안녕한가? 살피는 그 잠깐,


커피를 마시는 습관이 아니라, 커피 한 잔 내려놓고 앉아서 먼 하늘을 쳐다보는 일을 몸과 마음에 물들이고 있습니다.


아침의 브루잉이 점점 손에 익어요. 첫 커피 내리기 전 원두향을 맡고, 커피를 갈아낸 직후 다시 향을 맡고, 물을 다 내린 후 좋아하는 커피잔에 커피를 담고 문밖으로 나가서 아침 공기와 함께 따스한 커피를 만나는 그 잠깐,


어머니 가꾸시는 화초들에게 인사하고, 가까운 지붕들에게 안녕을 질문하는 이 아침의 잠깐,


온전히 내가 나에게, 진짜 나를 위해 내가 마련하는 이 잠깐으로 또 하루치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어냅니다.


커피 고맙습니다.

커피잔 고맙습니다.

문밖의 지붕들 고맙습니다.

오늘도 고맙습니다.


매일 아침, 속마음 풀어내듯이 가만히 앉아서 머리를 쉬게 하는 일을 공부합니다. 가까운 문장들을 읽다가 멀리까지 쳐다보는 일이 큰 도움이 됩니다. 사실,


의자 하나 문밖에 내다 놓는 일이 생각보다 오래 걸렸습니다. 생각만 하고 1년 넘게 미루다가 결국 그렇게 했습니다.


언제든지 앉을 수 있도록! 앉기 싫으면 그냥 내버려 두어도 좋을 의자 하나, 거기 있다는 걸 알고 힐긋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내가 앉아서 쉴 곳이 하나 마련되었다는 안도감이 생겨납니다. 그 의자에 앉아서 남들에게 속시원히 말도 못 하는 불면의 밤들을 용케 지워내고 있습니다.


의자에 앉고 보니,

어제의 기억이 다시 살아납니다.


소리 내어 읽기.

옆에서 들리는 말소리를 잘 들으며

눈으로 따라 읽기.

등장인물의 마음이 훅 끼쳐오는 순간을

잘 감당하기.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일은 언제나 쉽지 않지만, 다정한 공간에서, 새로운 이야기 속에서, 새로운 인물을 만나고 선뜻 그 사람의 말을 내 말로 받아 적는 일, 소리 내어 희곡 읽기는 언제나 마음이 푹 빠지게 됩니다.


희곡 읽기란,

마치 오래된 친구가, 자기 속마음을 편지로 써서, 내 앞에서 읽어주는 것처럼 귀 기울여 듣게 됩니다. 어제 그 단어 ‘경청’인 것이죠.


내가 꼭 하고 싶었던 말을 누군가 내 대신 글로 적어놓았다는 느낌을 받을 때처럼, 내 말을 남의 말처럼 발음하고, 남의 말을 내 말처럼 발화하는 그 순간을, 우리 마음이 살짝 흔들리는 그 잠깐을 겪는 일이 바로 희곡 읽기입니다.  


오늘 자정이 되기 전에 다시 떠올려보세요. 이양구 작가의 희곡 ‘노란 봉투’의 인물들의 말 중에서 밑줄 그은 문장들을 다시 발음해 보아요.


그 잠깐, 인물과 다시 만나고 다시 헤어집니다.


그래야 비로소 어제가 다 지나갑니다.


어제를 잘 보내고 오늘을 다시 걸어가야죠.


#날일달월

#위대한서점

#좋은희곡읽기모임

#이양구 희곡

#노란봉투




작가의 이전글 자기 앞의 생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