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애들’은 빠르다. 벌써 3학년 우리 반만 해도 커플이 두 쌍이나 있다. 한 반에 20명도 안 되는데 그중 4명이라면 꽤나 큰 숫자다. 이 CC(Class Couple)들을 포함해 SC(School Couple- 같은 반은 아니나 같은 학교), AC(Academy Couple-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수학학원에서 많이 생긴다)을 흥미진진하게 관찰하다 보면 물음표가 떠오른다. 이걸 사귄다고 할 수가 있나?
‘10살의 연애’라는 말에 고사리 손을 붙잡고 잠시도 떨어지지 않는 모습이나 좋아해, 한마디에 빨갛게 물드는 얼굴들을 상상했겠지만 현실은 밍밍하기 그지없다. 쉬는 시간이면 친구들과 놀기 바쁘다. 붙어있질 않으니 스킨십은 당연히 없다. 학원 가느라 바쁠 텐데 대체 데이트는 언제 하는 건지. 그렇다고 집에 같이 가는 것도 아니다.
대체 사귀는 게 뭐라고 생각하는 건지. 속으로 비아냥대다가 어쩌면 저게 순수한 사랑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태초의 인류는 어떤 식으로 사귀었을지 상상해 본다. ‘젊었을 때 연애를 많이 해봐야 한다’는 어른들의 훈수로부터 자유로웠을 초기의 인간은(제발 그랬기를!) 상대에게 강한 끌림을 느끼면 어떻게 했을까? 로맨스 드라마를 시청하며 자라온 나로서는 알 수 없다. 그래, 대중매체에 절여진 나보다는 마음 끌리는 대로 움직이는 10살들이 사랑의 본질에 더 가까울 것 같다.
한때 내 이상형은 ‘반찬 밀어주는 남자’였다. 포인트는 ‘반찬’이 아니라 ‘밀어주는’에 있다. 식사를 하는 동안 눈을 맞춰가며 다정하게 이야기를 경청하면서도 내가 집으려는 반찬을 슬쩍 밀어주는 남자. 다소 날이 서게 말하더라도 그 속에 담긴 고뇌를 알아채고 마카롱을 건네는 센스남을 원했다. 눈치챘겠지만 다 드라마에서 나온 장면들이다.
스스로도 연애를 할 때면 로맨스 영화의 여자 주인공처럼 행동하려 애썼다. 씩씩하고 발랄한 금잔디에 애교 섞인 목소리와 몸짓 추가요. 카페에서 남자 친구 옆 자리에 앉아 기댄 채 남자 친구가 귀엽다며 볼을 꼬집으려 하면 좋은 척 볼을 내어주고... 오우 쉣, 돌아보니 끔찍하다.
우리가 하던 건 역할 놀이에 가까웠다. 사귀기로 한 그때부터 상대를 절친으로 받아들이고 모든 것을 나눠야 하는 사이. 매일 연락을 주고받고 정기적으로 만나서 데이트를 해야 했다. 스킨십부터 커플 물건에 이르기까지 사귄 시간에 따라 나가야 할 진도라는 게 있었다.
정답으로 간주하는 일이 생겼다는 것은 오답도 탄생했다는 뜻이었다. J와의 연애가 그런 면에서는 최고봉이었다. 내가 셀프 반찬을 옮기고 수저 세팅까지 끝내 놓을 동안 간신히 물컵 하나 채워놓는 J의 느려 터짐이 짜증 났다. J는 연락을 줄이고 싶어 하는 내게 ‘사랑이 식었다’는 딱지를 붙였다.
대체 사랑이란 무엇일까. 이제 연애할 일은 없지만 스스로를 알아가다 보니 나답게 사랑하는 법도 조금이나마 깨달았다. 나는 혼자만의 시간 확보가 필요한 사람이었다. 연락은 용건이 있을 때만 하고 매주 만나는 일에 목매지 않아야 했다(동아리도 아니고 말이야). 늦은 날이면 억지로 밥과 카페 일정을 소화하기보다 밥만 먹고 1시간 만에 헤어지는 게 좋다.
난 진지한 이야기가 오고 가야 대화를 했다고 느끼는 사람이었다. 오늘 먹은 음식을 끼니별로 공유하는 일은 그만. 오글거리더라도 서로의 고민을 나누고 싶다. 생각이 달라 당황스럽더라도 세상 흘러가는 일을 두고 의견을 교환하는 시간이 있길 바란다. 그래, 이제 TV 속 주인공 흉내는 그만둘 때가 됐다.
우리 반의 여러 커플들을 떠올린다. 너희는 언제쯤 ‘진도는 어디까지 나갔어?’라는 질문을 받고는 스킨십을 해야 하나 고민하게 될까. 상대방이 연락이 느리면 널 별로 안 좋아하는 거라는 말에 언제쯤 휘둘리기 시작할까. 제발 그 시기가 늦었으면 좋겠다.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선생님은 그러지 못했지만 너희만큼은 드라마 속 연애를 흉내 내지 않기를, 사랑에 대해 자신만의 정의를 품고 연애하길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