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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독특한 버라이어티 Feb 23. 2021

청전 스님

남걀 사원을 출입하면서 매일 아침 행하는 하나의 습관이 생겼다.

"법당의 내부 공간을 청소"하는 일이었다.

처음에는 그저 "다람살라에 머무는 동안 사원의 법당을 청소해보자" 하는 단순한 생각이었다.

새벽 아침 깨끗한 수건 한 장을 들고 숙소를 나서 사원에 들어가 법당 내부의 청소를 시작하였다.

하지만 법당은 생각보다 큰 공간이었다.


그 공간을 걸래로 닦아가며 청소를 하려면 더러워진 수건을 수돗가로 가져가 몇 번이고 빨아가며 바닥을 닦아내야 하는 넓은 공간이었다.

그렇게 무릎을 구부리고 법당 바닥을 청소한 지 얼마 안 된 사흘 정도 지나던 날, 결국 양쪽 무릎이 까지게 되었다.

막상 시작을 하고 보니 그 넓은 공간을 무릎을 꿇고 걸래로 바닥을 청소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는데 무릎이 까지고 나니 다음날 청소하는 일이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그렇게 매일 아침 법당 내부를 청소하기 시작한 지, 1주일쯤 지난 어느 날.

그날도 새벽 아침, 일어나는 대로 사원으로 들러 법당 청소를 시작하려는데 어디에선가 나타난 티베트 스님 한분이 내게 양동이와 마포 자루 밀대 하나를 내미는 것이었다.



스님은 새벽마다 법당에 나와 청소를 하는 모습을 어디선가 계속 보고 계셨던 듯했다.

그런 스님이 내게 건넨 마포 자루 하나.

그렇게 받아 든 밀대에 수건을 끼고 난 후, 이른바 서서 사원 법당의 바닥을 닦게 되니 청소를 하는 일이 한결 수월해졌다.

청소를 하는 시간이 단축되었고 무엇보다도 더 이상 무릎을 꿇고 하지 않아도 되었으니 무릎을 다칠 일이 더는 생기지 않게 되었다.

마포 자루를 쥐고 그 큰 공간을 서서 청소를 하게 되니 지난 1주일을 어떻게 청소를 했나 싶을 정도로 도구를 이용한 청소의 개혁이 시작되었다.


그렇게 시작된 법당의 청소는 다람살라에 머무는 기간 동안 계속 이어졌다.

다람살라에 머무는 동안, 하루아침의 시작은 늘 남걀 사원의 법당 청소로부터 시작되었다.

매일 새벽 아침, 숙소 문을 나설 때면 가지고 간 MP3의 이어폰을 귀에 꽂고 천수경, 금강경을 들으며 사원에 도착하여 가벼운 삼배를 하고 걸래 자루를 집어 들고 남걀 사원 법당의 바닥을 청소하였다.


그쯤 되던 때 시작한 또 하나의 일이 있었다.

잠시 같은 방에 묵던 두 명의 인도 스님들이 다람살라를 떠나가던 즈음이었다.


라다크, 바라나시를 거쳐 부다가야를 이어 올라온 다람살라.

여행객의 신분으로 들어온 인도였지만 고산병에 그리고 폭염에 쫓겨 올라온 다람살라에서 더 이상 갈 곳은 없는 듯하였다. 

매일같이 달라이 라마의 사원을 방문하면서 다람살라에 머무는 동안 시간을 허투루 보내고 싶지는 않았다.


처음 다람살라에 머무는 동안 무언가 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일을 찾고자 하여 생각한 것은 위빠사나였다.

위빠사나는 "호흡에 마음을 집중하고 순간순간을 알아차리는 이른바 명상 수행법"이라 생각하였는데 안타깝게도 다람살라에서 위빠사나를 배울 수 있는 곳은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던 중 부다가야에 머무는 동안 사원에서 행했던 "절 수행"이 생각났다.

생각을 비우는 일.

절은 몸으로 하는 명상의 일부라 하지 않았는가. 부다가야의 마하보디 사원에서 애써 남들이 시키지도 않은 500배의 절을 하면서 매일같이 흘러내리던 "까닭 모를 눈물의 이유"를 이곳에서도 계속 이어간다면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청소가 끝나면 더러워진 걸래를 수돗가에 가서 깨끗이 빨아놓고 법당으로 들어와 불경 책을 읽고 절 수행을 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의 사찰과 달리 별도의 방석이 구비되어 있지 않은 티베트 사찰에서 한국식의 절을 하는 것은 무릎이 까져 나가는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템플 로드에서 산 얇은 모포를 바닥에 깔고 절 수행을 하니 한결 수월해졌다.


일 배, 이배..

몸이 이끄는 대로 제단 위에 모셔진 불상을 바라보며 그렇게 다람살라 달라이 라마의 사원, 남걀 사원의 법당에서 매일 새벽 아침, 법당의 청소를 마치고 행하는 하루 500배씩 이어지는 백일기도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즈음.

오후 12시에 남걀 사원 입구에서 경안 스님을 만났다.


지난번 청전 스님을 만난 자리에서 내 얘기를 전한 경안 스님은 청전 스님께서 "점심공양을 같이 하게 데리고 오라"는 말씀이 있으셨다 하여 스님과 함께 청전 스님의 처소로 향하는 길이었다.


경안 스님과 함께 찾아가게 된 청전 스님의 처소는 남걀 사원에서 체 5분도 안 되는 지근거리에 있었는데 마침 스님께서는 일찌감치 점심식사 준비를 마치시고 우리들을 기다리고 계시던 참이었다.


스님께 예를 갖추어 인사를 올린 뒤  바로 식사자리가 이어졌다.

자그마한 테이블에 참으로 오랜만에 대하는 쌀밥, 그리고 시래기를 푹 삶아 얹은 구수한 된장국을 준비해 놓으셨다.


다람살라에 들어와 홀로 19년째 수행을 해오고 계시는 스님은 오신채 없는 소박한 음식으로 하루 두 끼 하시는 공양을 직접 준비하셔서 드시는데 찬이 몇 개 되지 않는 공양이었지만 인도로 떠나와 마주하게 된 그 어느 음식보다도 정갈하면서도 맑고 맛이 있는 그런 공양을 마주하게 되었다.


밥이 꿀맛이었다.

정말로 맛이 있었다.


훗날, 청전 스님께서 기거하시는 옆방에 마련해 주신 방을 하나 얻어 생활하게 되면서 다람살라에 머무는 기간 내내 날마다 스님 처소를 방문하여 스님과 함께 공양을 하는 호사를 누리게 되었으니 이는 무슨 인연에 의한 배려인지.


“처사님은 인도에 언제 오셨나요”


“예, 스님

지난 3월에 인도에 입국하였습니다.

처음 행선지는 라다크였는데 아직 겨울인 그곳에서 고산병에 걸려 내려오게 되었습니다.”


“라다크를 방문하였습니까?

라다크는 매년 여름 봉사활동을 하러 저도 갑니다. 한겨울에 비행기로 도착하게 되면 고산병의 위험이 있지요"


아! 청전 스님께서는 라다크를 해마다 방문하고 계셨구나.


신학교에서 가톨릭 신부수업을 받으며 신학공부를 해오시던 스님은 공부를 다 마치치 아니하고 어느 날 송광사의 방장 구산 스님을 만나 출가 1978년 사미계를, 1979년 비구계를 수지 받으셨다.


불가에 입문을 한 이후 1987년, 삶에 대한 화두를 가지고  미얀마, 태국, 스리랑카 등의 순례길을 걸으셨다.

그런 순례길에서  인도로 들어온 스님은 가톨릭의 마더 테레사 수녀를, 티베트 망명정부가 있는 다람살라에서는 달라이 라마를 만나게 되셨는데 스님은 그 후 다람살라에 정착, 달라이 라마를 모시고 19년째 수행을 이어 오시고 계셨다.


달라이 라마의 남걀 사원.

티베트인들의 정신적, 정치적 지도자인 달라이 라마 14대 겔룩파의 본산.


인도와 지리적으로 가까웠던 티베트는 인도의 불교를 가장 완전한 형태로 계승하게 되었고 지금도 라다크, 시킴 등 북인도 지역에서도 티베트 불교의 오랜 명맥을 유지해 오고 있다.


티베트 불교는 크게 4개의 종파로 분류되는데 파드마 삼바바에 의해 완성된 구파인 닝마빠와 신파의 사캬빠, 까규빠, 까담파, 겔룩빠가 있다.


그 가운데 아티샤의 가르침을 근거로 하는 까담파의 계통을 이어받은 겔룩파는 현재까지 달라이 라마 14대에 의해 그 가르침이 이어지고 있고 다람살라에 있는 달라이 라마의 남걀 사원이 그 겔룩빠의 본산인 것이다.


청전 스님은 이곳 다람살라에서 19년을 한결같이 수행을 해 오시면서. 해마다 육로의 길이 열리는 여름이 되면 매년 빠지지 않고 히말라야 오지인 라다크, 쟌 스카, 스피티 밸리의 산간 오지 마을을 찾아다니신다.


고립된 그곳의 오지 주민들과 티베트 스님들을 위한 의료봉사 활동이다.


해발 3,000m 에서 5,000m를 오가는 쟌 스카, 스피티 밸리 저너머 깊은 북인도 히말라야 산자락.

겁도 없이 한겨울, 비행기를 타고 들어가 고산병을 얻어 죽을 고생을 하고 쫓겨 내려왔던 그 라다크 보다도 더 높은 고산지대.


병원도 약국도 찾아보기 어려운 그 높은 고산지대에 살면서 아무런 의료혜택을 받지 못하고 영양 결핍에 시달리는 수많은 아이들과 주민들을 위한 보시 순례의 여정을 해마다 이어오시고 계신 것이다.


경안 스님은 다람살라의 방문이 처음은 아니었다.


동안거를 마치면 나오는 인도 순례길에 부처님이 득도를 하신 곳, 부다가야를 거쳐 이곳 다람살라까지 방문을 하곤 하였는데 다람살라를 방문하게 되면 이곳에 계시는 청전 스님을 항상 찾아뵙곤 하였던 듯싶었다.


그리고 그러한 일은 비단 경안스님뿐만은 아니었다.


실제로 청전 스님을 뵌 그날 이후로 다람살라에 머무는 동안 항상 청전 스님과 점심공양을 같이 하게 되었는데 다람살라를 방문하신 한국 스님들을 청전 스님의 거처, 점심공양 자리에서 또다시 뵙게 되는 일이 많았다.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콧구멍으로 들어가는지 모를 그렇게 어려운 자리의 공양시간이 계속 이어졌다.


공양을 마치신 스님이 차를 우리시며 말씀을 이어가셨다.


"다람살라에는 얼마나 있을 생각인가요?"


"그게 이제 다람살라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되어서.. 당분간은 이곳에 머물며 지내려 하고 있습니다."


"그래요?  이곳에서는 무얼 하며 보내고 있나요?


" 네, 매일 아침 사원에 들러 법당 청소를 하고 기도를 하며 보내고 있습니다.

100일 기도를 시작하였습니다."

...

"다람살라에 머무는 동안은 이곳에 와서 점심공양을 같이 하도록 합시다."


스님께서는 스님의 처소 옆 빈방을 구해 내가 이사 와서 편히 기도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신경을 써 주셨다.


해마다 4월, 5월이 되면 뜻을 같이하는 서울의 신도분들이 다람살라 스님의 처소로 그들이 입었던 옷, 소화제와 해열제, 소독약, 파스 등을 담은 의약품들과 간단한 반찬류들을 곱게 포장해 소포로 보내곤 하였는데 그럴 때면 소포를 집으로 배달해 주지 않는 다람살라의 우체국 시스템으로 인해 직접 우체국을 방문하여 소포를 챙겨 오곤 하였다.


북인도의 육로가 해동되는 즈음, 여름이 되면 스님께서는 그렇게 의약품과 옷가지들, 생필품들을 꾸려 라다크로 봉사 활동을 가셨고 스님이 다람살라를 비우신 동안은 스님을 대신하여 비어있는 스님의 처소를 관리하며 기도생활을 이어가게 되었다.

그날 이후로 사원의 입구에서 파는 짜이 한잔으로 아침을 대신하고 점심에는 스님의 처소에서 스님과 함께 하는 감사한 점심공양을 하며 "절 수행"을 하는 다람살라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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