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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독특한 버라이어티 Feb 22. 2021

다람살라에서의 혼숙

한여자 세남자의 혼숙

다람살라.

맥간 광장에서 템플 로드를 따라 쭉 내려온 곳에 자리 잡고 있는 달라이 라마의 남걀 사원.


그곳의 똑같은 자리.

이른 아침 새벽부터 해가 떨어지는 저녁 늦은 시간까지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사원의 계단에 하루 종일 앉아있다.


무표정한 얼굴로 계단 한 귀퉁이에 기대어 앉아 사원을 방문하는 여행객, 순례객, 그리고 사원에서 마니차를 돌리는 사람들을, 절판 위에서 하루 종일 오체투지를 하는 티벳탄을 바라보고 앉아있다.


바라나시의 갠지스 가트에서 만난 사두처럼 세속 일을 달관한 방관자의 입장으로 그냥 그 자리에 무표정한 얼굴로 앉아 하루 종일 멍 때리고 앉아다.

매번 똑같은 자리에 앉아.. 벌써 일주일째.

아무하고도 말을 섞지 않으며.


말로만 듣던 "집시"같은 여인을 처음 만난 날이었다.

속속들이 사정이야 어찌 알겠나만은

이 여자,  자유로움에 있어서는 말 그대로 더할 나위없는 고수였다.


자유로운 영혼.

그녀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재워달란다.





3,287,263 평방킬로미터의 대륙.

면적 하나만 놓고 보자면 세계 7위의 크나큰 대륙 인도.


같은 나라인데도 반팔 셔츠를 입던 바라나시의 기온과는 현저하게 차이가 나니 바라나시에서 한국 여행객에게 무상기증을 한 겨울 점퍼와 침낭이 다시 생각이 난다.


밤이 되면 산간지방 다람살라의 기온은 쭉 떨어져 숙소에서 제공하는 모포한장으로는 아직까지 한밤을 버티기에는 쌀쌀한 날씨가 계속되었다.


다람살라의 생활은 단조로웠다.


중국의 침략을 피해 히말라야를 넘어 망명을 한 달라이 라마와 티베트 난민이 정착해 티베트 임시정부를 만들어 생활을 하는 이곳 다람살라는 사실 관광여행지로서는 그리 매력적이지는 못하다.

박수 폭포, 트래킹 코스 트리운드, 노블링카, 코라 순례길, 그리고 티베트 불교를 공부하는 사라학교, 남걀 사원..

그것이 전부인 셈이다.


하지만 한여름의 인도는 뜨거웠다.

뜨겁다 못해 팔팔 끓는 대륙의 고온을 피해 인도를 방문한 여행객들은 남에서 북으로 북으로 여행루트를 변경하여 올라오는데 이 시기에 지나는 곳이 다람살라이기도 하다.


다람살라를 거쳐 꿀루로, 마날리, 레로 끝없이 이어지는 북인도 북히말라야로의 대장정 여행 루트가 이렇게 시작이 되는 것이다.


다람살라로  들어와서 매일같이 반복해 오는 일은 템플 로드 언저리에 있는 남걀 사원을 방문하는 것이었다.


이른 새벽 잠자리에서 일어나 세면을 하고 맑은 새벽 공기를 마시며 사원으로 가면 부지런한 티벳탄들이 아침일찍부터 사원에 나와 경건한 마음으로 저마다의 기도 의식을 치른다.


이 시간에 사원을 들어서면  항상 법당 주변에서 나무로 만든 절판을 깔아놓고 오체투지를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하루 이틀 지내다 보니 이제는 그 모습들이 낯설지가 않다.

그 주변으로 자리를 깔고 앉아 염주를 돌리며 기도하는 사람들, 탑돌이를 하는 사람들, 마니차를 돌리는 사람들, 그리고 다람살라로 여행 온 여행객들로 사원은  해가 떨어질 때까지 하루 종일 붐비고 있다.


사원에서는

법당의 내부 출입을 특별히 통제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매일 아침 사원의 법당 내부에는 나만이 앉아 있었다.



사원을 방문하는 많은 사람들은 법당 외부에서 방석을 깔고 앉아 기도를 한다거나 염불을 한다거나 아니면 절판을 가져다 놓고 오체투지를 하였지만 아무도 사원 법당 내부로 들어오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 누구도 나를 통제하지는 않았다.


물론 달라이 라마 14세의 법문이라도 있는 기간 동안에는  법당 내부는 달라이 라마의 법문을 듣기 위해 세계 여러 나라에서 온 신도들로 가득 차 그야말로 발 디딜 틈조차 없는 공간이 되지만 평상시의 사원 내부는 하루 종일 텅 비어 있는 공간이었다.


법당에 들어가면 우선 삼배 절을 올리고 서울에서 가져온 불경 책을 읽었다.

천수경을 읽고 금강경을 읽고 지장경을 읽었다.

부다가야에 1주일 머무는 동안 매일같이 마하보디 사원에 들러하던 절을 처음에는 하지 않았다.

경 읽는 것을 마치고는 가벼운 명상을 하는 것이 매일 아침의 일과였다.


매일같이 사원을 다니며 기도생활을 하는 티벳탄들의 모습을 보며 자연스레 나도 그 분위기에 동화가 되고 있었다.


하루 이틀 짧은 일정으로 다람살라에 여행을 와서 마주하는 여행객의 시선이 아니라 그들 생활로 들어가 그들의 모습을 바라다보는 것은 새로운 경험이었다.

그렇게 다람살라의 생활에 젖어들고 있었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사원으로 가 법당 안에서 가벼운 명상을 하고 기도를 하는 것이 첫 일과가 되었다.


사원에 이처럼 매일 있다 보니 하루하루 사원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자연스레 눈에 들어오게 되었는데 벌써 4일째,

매일같이 반복되는 똑같은 광경을 보게 되었다.


저녁 8시,

사원의 모퉁이 벽 한 귀퉁이에서 잠을 청하는 이방인들이 있었다.

노란색 승복과 주황색 적삼을 걸친 두 명의 인도 스님, 그리고 한눈에도 집시처럼 보이는 외국인 여자.



티베트 사원에 인도 스님이라. 

사찰에 스님이 있는 모습이 머그리 낯선 풍경은 아니었지만  문제는 그 스님들이 밤마다 그 사원에서 노숙을 하는 것이었다.

인도비구 두스님은 북인도로 올라오는 순례길 여정에 숙박비용을 아끼기 위함이었을까.


붓다에 의해 불교가 일어난 나라이지만 안타깝게도 쇠퇴 일로의 절정을 치닫고 있는 것이 오늘날 인도 불교의 현주소.


그들은 하루 종일 사원에 있었다.

낮에는 사원 내에 마련되어 있는 벤치에 앉아 사원을 방문하는 사람들을 구경하며 염불을 하며 하루를 보내고 저녁이 되면 그곳에서 그렇게 잠을 청하려 지친 육신을 시멘트 바닥에 누이곤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또 한 사람, 집시 여인.

그들 세명은  마치 홈리스처럼 하루 종일 사원에 앉아있다가 해가 지면 매일 저녁 사원의 모퉁이에서 노숙을 하는 것이었다.


그냥 그 모습이 보기 싫었다.

무슨 마음이었을까.

해가 지고나면 숙소에서 자는 것도 아직까지 춥기만 한데 새벽 공기가 쌀쌀한 다람살라의 사원 한 모퉁이 바닥에서 노숙을 하는 모습을 보는 마음이 불편했던 것은 아마도 승복을 걸친 비구였기에 더 했을 것이었다.





힌디어가 안되고 영어가 안되니 서로 간에 대화로 소통할 수 있는 방법은 전혀 없었다.


사원 밖으로 나가 찻집에서 사 온 짜이 두 잔을 스님에게 건네며 물어보았다.

“벌써 며칠째 이곳에서 잠을 청하는 것 같은데 춥지 않아요?

 괜찮으면 내 숙소로 가서 같이 래요?”


영어로 대화를 청하니 인도 스님 두 분은 그저 입가에 미소만을 지을 뿐이었다.


“아직까진 밤공기가 찬데 괜찮겠어요?”


옆에 앉아있던 집시 여인이 말을 건넸다.


당신, 이 스님들을  숙소로 데려가려는 거야?


"그래,  어제오늘 계속 이곳에서 노숙하는 것 같아서..

추운데.. 입 돌아가잖아"


집시 여인이 인도 스님을 바라보며 힌디어로 무어라 얘기를 시작했다.

힌디어를 하는 그 집시 여인을 통하여 인도 스님 두 분이 순례 여행 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내가 따로 방을 구해 줄 입장은 못 되지만

다람살라에 며칠이나 계실 건지.. 좁은대로 내 방에서 같이 잠을 잔다면 새벽 한기는 피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잠자코 집시 여인의 말을 듣고 있던 스님의 입가에 가벼운 미소가 흘렀다.

집시 여인의 힌디어는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그들과 대화를 하는 데에는 전혀 지장이 없어 보였다.


잠시 후, 스님 두 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같이 갑시다"

나는 가벼운 눈웃음을 지으며 길을 앞장섰다.

그때였다.

집시 여인이 따라 일어서면서 내게 말을 건네는 것이었다.

나도 같이 자


뭐라고?"

"나도 재워달라고!"

"갑자기? 너는 여자잖아, 여자를 데리고 한방에서 어떻게 자겠어?”

“그냥 바닥에서 자면 되지 뭐, 나도 추워


자기도 춥다며 당당하게 요구하는 그녀에게 머라 더 할 말이 없었다.

“... 그래 그러던지


처음 생각은 순례 여행 중이라는 스님 두 분을 모시고 나의 숙소로 가서 그들이 다람살라에 머무는 동안 함께 지낼 요량이었다.


그런데 나의 말을 힌디어로 통역을 해주던 집시 여인까지 같이 숙소로  따라오겠다고 떼를 쓰는 것이었다.


자유로운 영혼들은 거칠 것이 없었다.

스님도 그러했지만 집시 여인도 짐이 없었다.

그들을 위해서 여분의 치약과 칫솔을 마련해 욕실에 내놓았다.


그리고

이름을 묻지도 않았고 알려하지도 않았다.


다만 이른 새벽, 매일 아침 눈을 뜨면 간단한 세면을 하고 방을 나서는 나를 따라 그들도 사원으로 발걸음을 향했고 해가지면 나를 따라 그들도 방으로 들어오는 이상한 일상생활이 시작되었다.


먼저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닌 다음에야 사적인 질문을 전혀 하지 않았고 그것이 서로에게 편했다.


다만 좁은 공간이지만 아직은 노상의 한기를 벗어난 곳에서 그들에게 쉴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해 주는 것으로 족했고 그렇게 그들과 같이 이상한 혼숙을 하게 되었다.


예전처럼  새벽이 되면 세면을 하곤 사원으로 나가 예불을 드리고 경을 읽고  명상을 하면서 거의 하루 종일을 사원에서 보내었다.


그렇게 열흘 정도의 시간이 흐른 어느 날, 인도 스님들은  다람살라를 떠나갔다.


인도 스님들은 다람살라를 떠나갔지만 남아있는 집시 여인과의 한방에서의 혼숙 아닌 혼숙은 그 이후로도 간간이 3주 정도 더 이어졌다.


간간이라 함은 매일같이 내가 머무는 숙소에서 그녀가 잠을 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만 나가고 싶으면 나가고 들어오고 싶으면 들어오는 외출냥이 마냥 본인이 들어오고 싶으면 사원에서 나를 따라 들어왔고 그것이 아니면 들어오지를 않았다.


간간이 샤워와 빨래가 필요하면 나를 따라 들어와 밀린 빨래와 샤워를 하고 쉬어가던 그녀와의 그러한 생활은 한 달이 다 되어갈 무렵 어느 날 갑자기 리시케쉬로 떠날 것이라는  말을  남긴 이후로 끝을 맺게 되었다.

그날 이후로 그녀를  다람살라에서 다시 볼 수는 없었다.


그렇게 다람살라에 들어와 보낸 첫 한 달은 나와 마찬가지로 다람살라에서는 서로 낯선 이방인이었던 그들에게  지친 육신을 누일 수 있는 조그마한 공간을 보시하기 위한 기간이었다.


집시 여인까지 다람살라에서 떠나보낸 다음 날, 다람살라에서 19년째 수행을 해오시고 계시던  청전 스님을 뵙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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