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람살라에 들어와 홀로 19년째 수행을 해오고 계시는 스님은 오신채 없는 소박한 음식으로 하루 두 끼 하시는 공양을 직접 준비하셔서 드시는데 찬이 몇 개 되지 않는 공양이었지만 인도로 떠나와 마주하게 된 그 어느 음식보다도 정갈하면서도 맑고 맛이 있는 그런 공양을 마주하게 되었다.
밥이 꿀맛이었다.
정말로 맛이 있었다.
훗날, 청전 스님께서 기거하시는 옆방에 마련해 주신 방을 하나 얻어 생활하게 되면서 다람살라에 머무는 기간 내내 날마다 스님 처소를 방문하여 스님과 함께 공양을 하는 호사를 누리게 되었으니 이는 무슨 인연에 의한 배려인지.
“처사님은 인도에 언제 오셨나요”
“예, 스님
지난 3월에 인도에 입국하였습니다.
처음 행선지는 라다크였는데 아직 겨울인 그곳에서 고산병에 걸려 내려오게 되었습니다.”
“라다크를 방문하였습니까?
라다크는 매년 여름 봉사활동을 하러 저도 갑니다. 한겨울에 비행기로 도착하게 되면 고산병의 위험이 있지요"
아! 청전 스님께서는 라다크를 해마다 방문하고 계셨구나.
신학교에서 가톨릭 신부수업을 받으며 신학공부를 해오시던 스님은 공부를 다 마치치 아니하고 어느 날 송광사의 방장 구산 스님을 만나 출가 1978년 사미계를, 1979년 비구계를 수지 받으셨다.
불가에 입문을 한 이후 1987년, 삶에 대한 화두를 가지고 미얀마, 태국, 스리랑카 등의 순례길을 걸으셨다.
그런 순례길에서 인도로 들어온 스님은 가톨릭의 마더 테레사 수녀를, 티베트 망명정부가 있는 다람살라에서는 달라이 라마를 만나게 되셨는데 스님은 그 후 다람살라에 정착, 달라이 라마를 모시고 19년째 수행을 이어 오시고 계셨다.
달라이 라마의 남걀 사원.
티베트인들의 정신적, 정치적 지도자인 달라이 라마 14대 겔룩파의 본산.
인도와 지리적으로 가까웠던 티베트는 인도의 불교를 가장 완전한 형태로 계승하게 되었고 지금도 라다크, 시킴 등 북인도 지역에서도 티베트 불교의 오랜 명맥을 유지해 오고 있다.
티베트 불교는 크게 4개의 종파로 분류되는데 파드마 삼바바에 의해 완성된 구파인 닝마빠와 신파의 사캬빠, 까규빠, 까담파, 겔룩빠가 있다.
그 가운데 아티샤의 가르침을 근거로 하는 까담파의 계통을 이어받은 겔룩파는 현재까지 달라이 라마 14대에 의해 그 가르침이 이어지고 있고 다람살라에 있는 달라이 라마의 남걀 사원이 그 겔룩빠의 본산인 것이다.
청전 스님은 이곳 다람살라에서 19년을 한결같이 수행을 해 오시면서. 해마다 육로의 길이 열리는 여름이 되면 매년 빠지지 않고 히말라야 오지인 라다크, 쟌 스카, 스피티 밸리의 산간 오지 마을을 찾아다니신다.
고립된 그곳의 오지 주민들과 티베트 스님들을 위한 의료봉사 활동이다.
해발 3,000m 에서 5,000m를 오가는 쟌 스카, 스피티 밸리 저너머 깊은 북인도 히말라야 산자락.
겁도 없이 한겨울, 비행기를 타고 들어가 고산병을 얻어 죽을 고생을 하고 쫓겨 내려왔던 그 라다크 보다도 더 높은 고산지대.
병원도 약국도 찾아보기 어려운 그 높은 고산지대에 살면서 아무런 의료혜택을 받지 못하고 영양 결핍에 시달리는 수많은 아이들과 주민들을 위한 보시 순례의 여정을 해마다 이어오시고 계신 것이다.
경안 스님은 다람살라의 방문이 처음은 아니었다.
동안거를 마치면 나오는 인도 순례길에 부처님이 득도를 하신 곳, 부다가야를 거쳐 이곳 다람살라까지 방문을 하곤 하였는데 다람살라를 방문하게 되면 이곳에 계시는 청전 스님을 항상 찾아뵙곤 하였던 듯싶었다.
그리고 그러한 일은 비단 경안스님뿐만은 아니었다.
실제로 청전 스님을 뵌 그날 이후로 다람살라에 머무는 동안 항상 청전 스님과 점심공양을 같이 하게 되었는데 다람살라를 방문하신 한국 스님들을 청전 스님의 거처, 점심공양 자리에서 또다시 뵙게 되는 일이 많았다.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콧구멍으로 들어가는지 모를 그렇게 어려운 자리의 공양시간이 계속 이어졌다.
공양을 마치신 스님이 차를 우리시며 말씀을 이어가셨다.
"다람살라에는 얼마나 있을 생각인가요?"
"그게 이제 다람살라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되어서.. 당분간은 이곳에 머물며 지내려 하고 있습니다."
"그래요? 이곳에서는 무얼 하며 보내고 있나요?
" 네, 매일 아침 사원에 들러 법당 청소를 하고 기도를 하며 보내고 있습니다.
100일 기도를 시작하였습니다."
...
"다람살라에 머무는 동안은 이곳에 와서 점심공양을 같이 하도록 합시다."
스님께서는 스님의 처소 옆 빈방을 구해 내가 이사 와서 편히 기도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신경을 써 주셨다.
해마다 4월, 5월이 되면 뜻을 같이하는 서울의 신도분들이 다람살라 스님의 처소로 그들이 입었던 옷, 소화제와 해열제, 소독약, 파스 등을 담은 의약품들과 간단한 반찬류들을 곱게 포장해 소포로 보내곤 하였는데 그럴 때면 소포를 집으로 배달해 주지 않는 다람살라의 우체국 시스템으로 인해 직접 우체국을 방문하여 소포를 챙겨 오곤 하였다.
북인도의 육로가 해동되는 즈음, 여름이 되면 스님께서는 그렇게 의약품과 옷가지들, 생필품들을 꾸려 라다크로 봉사 활동을 가셨고 스님이 다람살라를 비우신 동안은 스님을 대신하여 비어있는 스님의 처소를 관리하며 기도생활을 이어가게 되었다.
그날 이후로 사원의 입구에서 파는 짜이 한잔으로 아침을 대신하고 점심에는 스님의 처소에서 스님과 함께 하는 감사한 점심공양을 하며 "절 수행"을 하는 다람살라의 생활이 시작되었다.